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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연령대라는 분류 표지가 되다

[건축신문] 청년 몰락

청년을 부르는 신조어의 범람

어느 대담에서 사회학자인 지크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우리 시대에는 오직 두 가지의 인물만이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얻는다고 침통하게 말한다. 그 두 가지 인물형이란, 바로 스타와 피해자이다. 먼저 스타가 있다.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열정과 의지로 자신을 빚어내는 데 성공한 매력적인 인물.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TV를 석권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승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공적인 창업으로 부를 거머쥔 기업가 혹은 기업가 정신을 체현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그런 기업가적인 인물의 모범으로 가장 자주 우려먹는 이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청년과 예술가이다.

다음으로 피해자가 있다. 오늘날 타인의 관심을 끄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을 피해자로 그려내는 것이다. 자신을 무고한 피해자로 드러낼수록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난민수용소에서 물과 빵을 외치며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대는 난민은 우리에겐 걸리적거리고 불편한 타인이다. 시리아 난민이 그런 꼴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기꺼이 관심을 보일 수 있다. 해변의 모래밭에서 발견한 어느 어린 소년으로서의 시리아 난민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들이 희생자라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청년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청년은 그러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상연하는 데 열중한다. 청년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의 범람은 이를 잘 보여준다. '88만원세대'에서 '흙수저 계급', 'N포세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청년의 팍팍한 삶을 풍자한 퍼포먼스. ⓒ2030정치네트워크

청년 정체성의 여정

오늘날 청년이라는 이름에 깃든 이율배반적인 기대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성공한 청년 창업의 주인공이라는 초상에서, 우리는 스타의 후광으로 에워싸인 청년을 발견한다. 흙수저 계급, N포세대로서의 청년을 토로하는 청년에게서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로서의 청년을 발견한다. 이러한 청년의 이율배반적인 면목(面目)은 청년이라는 낱말의 역사적인 편력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이들에겐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친김에, 청년이란 정체성이 겪은 여정을 한 번 추적해보도록 하자.

인구학은 '세대(世代)'라는 개념을 세상에 물려주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역설하듯 인구란 개념은 생명권력(bio-power)의 등장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까다로운 철학자의 생각을 잠깐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인구란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을 마름질하기 위해 발명된 획기적인 개념이다. 권력은 누구에 대하여 행사되는가. 그전까지 종교나 정치철학을 비롯한 사변적 담론은 신민(subject), 시민(citizen, citoyen) 같은 개념을 내세웠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노동자와 농민의 반란과 저항은 계급(투쟁)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나아가 민족(nation)이란 개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역시 '민족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쓸면서 인류의 의식 속에 뿌리박히게 된 개념이다. 그렇지만 이런 개념들이 정치적인 캠페인, 행동, 투쟁, 전략 속에 등장하고 성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개념을 집어삼킨 인간의 이름은 '인구(人口)'였다. 인구는 아주 겸손하게 뒷전에 물러난 채 다른 여러 개념을 조정했다.

▲1945년 영국 노동당의 선거 포스터. ⓒPBS(www.pbs.org)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문제가 산업문제로서 혹은 노사문제로서 규정되며 노동자의 건강·안전·교육·영양·노후 등에 관련된, 즉 노동자의 생명(life) 혹은 삶에 관련된 문제로서 정의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시민 역시 다르지 않다.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육체의 모습에 깃들지 못한 시민이란 개념은 이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며 삶의 안녕을 추구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에 포개진다. 따라서 출생과 사망률, 세대별 분포, 남성과 여성의 비율, 가족의 수와 형태, 거주 방식과 위생, 교육 수준과 이주율 등의 복잡한 사실들을 집적하고 또 분석하면서 권력은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대상을 상상한다. 그것은 인구라는 렌즈를 통해 규정된 생명 덩어리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이 다루어야 할 대상임을 가정하고, 또 그 가정에 따라 권력은 자신이 작동하는 제도, 법률, 규칙과 절차 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얼추 세대라는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드러난다. 인구란 개념은 생명의 주기 혹은 단계로서 세대란 개념을 자신의 짝으로 삼기 때문이다. 영어로 '세대(generation)'란 낱말은 생식 혹은 생명의 산출이란 뜻을 겸비한다. 그러므로 젊음, 혹은 청년기는 인구학적인 범주에 불과한 걸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가 청년이란 낱말에 마주했을 때 언제나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다. 인구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청년기라는 세대가 따로 분리되어 이해되어야 했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지만, 청년이란 낱말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거느리게 됐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는 부르주아사회 초기에 청년이란 말이 차지하던 의미를 요령 있게 짚은 바 있다.1) 이때 그의 관심은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로 널리 알려진 소설 형식에 등장하는 청년이다. 지금은 시들해졌거나 자취를 감춘 근대문학의 유명한 장르인 그 소설들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때의 청년이란 인생사의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 인구학적 청년이 아니라, 근대세계의 상징적인 형식으로서의 청년이다.

청년, 세대가 아닌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

교양소설에서 그려내는 문학 내적 존재로서의 청년이란, 부르주아 혁명 이후 등장하게 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인물로서의 청년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은 개인의 삶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타협하며 결국 사회와 화해하는 삶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말했듯이, '모든 청년은 부르주아'다. 부모의 지위를 세습하는 자본주의 이전 세계의 인물에겐 청년이란 인물형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정은 다르다. 그는 자유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청년이란 세상이라는 문턱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두고 번민하는 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청년은 자신의 꿈과 현실적 생존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적 생존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깨닫고 성숙해지며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욕망과 꿈을 철부지의 미몽(迷夢)으로 흔쾌히 처분한다.

이처럼 부르주아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부과한 운명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타율성을 자신의 삶의 선택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성으로 둔갑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처를 남긴다. 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은 예외 없이 시큼한 우울을 우리에게 남긴다. 우리는 마침내 어른이 되기 위한 문턱을 넘어서지만, 그것은 나의 자유를 양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성장소설은 그러한 우울을 보상할 교훈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것은 성장을 위해 그리고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할 대가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응축하면서 또 전치 시키는 형상(figure)이다. 모레티는 그것을 성장소설이라는, 지금은 주춤하거나 사라진 문학 장르에서 읽어낸다. 결국 모레티가 말하는 청년이란, 세대라기보다는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에게서 청년은 일정한 연령대에 속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집단으로서의 청년은 없다. 오직 청년은 개인이라는 형태의 인물형(character)으로서만 존재한다. 청년이란 이름이 알고 있는 인물은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한때 문화적 은유이자 상징이었던 청년의 소멸

▲ <생산의 거울>(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백의 펴냄). ⓒ백의
그렇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은 다른 모습을 획득한다. 그것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회학자가 말하는 청년이다. 시대는 바뀌어 우리는 20세기의 중반으로 뛰어넘는다. 이때 청년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는 성인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방식으로 코드의 이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 도처에서 젊은이의 반란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비-장소가 모든 사회계층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 정치, 과학, 문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무책임이며, 말을 빼앗겼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반란이다."2)

서구 여러 나라를 휩쓴 '68혁명'은 청년이라는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새겨 넣었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선정적이면서 간추려진 표현을 통해 밝힌다. "젊은이는 성인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방식으로 코드의 이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 때, 그는 젊음 혹은 청년에게서 세계를 부정하는 자리를 찾아낸다. 비(非)-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그가 말할 때, 그것은 그 세계의 부정성을 육화한다는 말과 같다. 청년은 세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그는 이런 뻔한 상식에 대해 이견을 제출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청년은 비-장소이다. 그는 세계 자체를 거부하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장소의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청년은 비-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록 뮤직과 카운터컬처 그리고 체 게바라는 청년을 부정의 대명사로서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철 지난 먼 옛날의 낭만으로 비아냥거림 받을 뿐이다. 청년들은 왜 저항할 생각을 않고 칭얼거릴 뿐이냐는 '꼰대'의 불평에 대해 청년은 왜 저항의 책임을 청년에게 요구 하느냐며 볼 멘 소리로 따진다. 청년이 왜 부정의 상징으로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하냐는 그럴듯한 반박이 출현하는 것은 21세기의 초엽, 바로 오늘이다.

개인화의 알레고리로서 등장한 청년, 전체 세계의 대립 항으로서의 청년. 그러한 역정을 거치며 청년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왔다. 그러나 청년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영예로운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비참하고 우울하며 무엇보다 빈곤하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마침내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인구학적 세대로서, 즉 사회집단을 분류하는 명칭 가운데 하나로 돌아간다. 이는 세계의 문화적 은유이자 상징으로서 청년은 마침내 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연령대라는 분류의 표지 말고는, 가난과 실업이라는 사실적 상태 말고는 여느 사회집단과 특별히 다를 게 없는 청년. 이것이 오늘날 청년세대가 마주하는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각주

1)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프랑코 모레티 지음,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2) <생산의 거울>(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백의 펴냄) 중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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