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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죽었죠?" "아니요!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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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죽었죠?" "아니요!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다시 시를 찾아서] <곡면의 힘> 펴낸 서동욱 시인

사람들이 더 이상 시집을 사지 않는 시대에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어떨까?

시인 입장에서는 어쩌면 곤혹스러울지도 모를 이런 호기심이 이번 인터뷰를 추동했다.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가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민음사 펴냄), <우주 전쟁 중에 첫사랑>(민음사 펴냄)에 이어서 세 번째 시집 <곡면의 힘>(민음사 펴냄)을 펴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저런 고약한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른 호기심도 있었다. 서동욱 교수는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펴냄), <일상의 모험>(민음사 펴냄), <철학 연습>(반비 펴냄) 같은 책을 펴낸 철학자다. 때로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은 문학 평론가로서 <익명의 밤>(민음사 펴냄)과 같은 비평서도 냈다. 그의 철학책과 비평서 독자로서 '시인 서동욱'의 특별함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마침 서동욱 교수는 <곡면의 힘> 출간에 맞춰서 <프레시안>에 3회에 걸쳐서 '우리 시대의 시와 예술'이라는 주제로 연속 지상 강연을 연재할 예정이다. 우리 시대 문학의 중요한 테마인 진실, 구원, 사회와 정치를 다루는 이 연재는 5월 둘째 주 금요일(13일) 처음 독자를 찾아간다.

이렇게 고약한 또 소박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인 서동욱'은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출판 시장에서 시집이 팔리지 않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시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한국 시가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고작 열두 명의 사도와 몇 명의 신도가 전부였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교회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 시대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했습니까?"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민 오락"처럼 시가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든 현실도 포착한다. 시 모임, 웹사이트 심지어 최근 논란이 된 지하철 역사 게시판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시가 넘쳐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순간을 포착한 짧은 단상 역시 그 형태는 시의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시는 만만찮은 성취로 무장한 시인과 시를 읽는 노고를 기꺼이 감당할 독자와의 행복한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만남을 방해하는 시에 대한 오해는 무엇인가? '시인 서동욱'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 그가 사랑하는 시인은 누구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터뷰가 끝날 때 즈음엔 나도 다시 시집을 '사서' 시를 한 편, 한 편씩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4월 25일 오후 '시인 서동욱'과 나눴던 대화를 공유한다.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프레시안 : 7년 만에 새 시집 <곡면의 힘>을 펴냈습니다.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 전쟁 중에 첫사랑>에 이어 세 번째군요. 독자로서 또 기자로서 궁금합니다. 문학 특히 시의 독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 이때에 새로 시집을 펴내는 감상이 어떤가요?

서동욱 : 말씀하신 대로 시 넓게는 문학이 출판의 영역에서 독자를 잃어가는 시절입니다. 그렇지 않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사라지는 황혼을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긴 하군요. 물론 이미 먼 시대이긴 하지만요.

개인적으로 문학의 이상적인 모습을 이런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고대 그리스에서 문학은, 서사시든 비극이든 간에 어느 것 하나 오늘날 독자가 그렇듯이 골방에서 혼자 책을 펴들고 묵독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낭송을 통해 향유하는 대상이었지요.

그 정황이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에서 얼마간 묘사되는데, 소크라테스가 시 낭송가 이온이라는 인물에게 이렇게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표시하기도 합니다.

"이봐요, 이온. 사실 나는 그대들의 직업이 부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오. 그대들은 직업상 늘 최대한 곱게 차려입고 보기 좋게 모양을 내잖아요." (<이온/크라튈로스>(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2014년), 13쪽)

시 낭송가들은 국민적인 연예인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그렇게 모인 사람이 넋을 잃고 낭송자의 입을 쳐다보는 모습이야말로 문학의 원초적인 모습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바로 그런 문학은 공동체를 설립하는 힘을 지닌 문학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낭송되고 울려 퍼지고 되풀이 노래됨으로써 그리스 공동체의 정체성을 창출했지요. 그리스의 문학은 이렇게 사적인 내밀성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개방성을 그 근본적인 특징으로 삼았습니다.

최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책 가운데 하나인 <세계를 향한 의지>(박소현 옮김, 민음사 펴냄)에도 이와 관련해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 나옵니다.

프레시안 : 스티븐 그린블랫의 셰익스피어 평전이죠?

서동욱 : 맞습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문학가'로 칭하기보다는 "대중오락 분야의 뛰어난 대가"로 평가합니다. 이 책의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극장에서 보여 준 예술가적 기교는 즐거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문화적 차이를 음미하는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종류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오락 분야의 뛰어난 대가였다. 지상층 구덩이의 흙바닥에 서서 공연을 보는 문맹 관객부터, 푹신한 방석을 깐 특별석에 안락하게 자리 잡은 엘리트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공연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의 연극들은 기존 관념의 카니발적 파격 속에 신분의 높고 낮음과 부귀빈천을 한데 뒤섞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13쪽)

한 마디로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을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모두가 그의 작품을 향유하면서 희로애락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지닌 문학을 거의 상실한 게 아닌가 싶어요.

오늘날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누렸던 모습은 더 이상 향수로도 그리워할 수 없는 사라져버린 세계의 한 모습입니다. 사실 그것은 오늘날의 문학이 저 시대에 비추어 모자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이렇게 독자가 줄어든 시대에 문학의 정당성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런 비유는 어떨까요. 우리 시대의 교회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교회는 열두 명의 사도와 몇 명의 신도가 전부였죠. 그렇게 변변치 못한 규모였지만, 초기 교회 공동체는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한 것은 전혀 아니었죠. 오늘 날의 말은 열매라면 그 시대의 말은 오히려 열매를 낳는 씨앗이었죠.

감히 비유해 보건대, 지금 이순간의 문학 공동체도 얼마간 그와 같은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사람들 사이엔 말이 뿌려지지만 그것은 지금 바로 집어들 수 있는 열매이기보다는 씨앗처럼 사람들의 생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 성장해나갈 말인 거죠.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 역시 그런 말의 씨앗이 엮어내는 공동체의 자리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집 <곡면의 힘>의 말미에는 서동욱의 시론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시와 공동체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작(詩作)이란, 홀로 훈련하는 운동선수가 오직 스스로에게 몰두하는듯하지만 기실 자신의 의식과 상관없이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수백 개 째 혼자 공을 던지는 투수의 훈련에서 오로지 의식되는 것은 자신의 구질이지만, 다른 한편 그의 공을 쳐낼 자를 의식의 바깥에서 필연적인 근거로 삼으며, 패스를 연습하는 축구 선수는 공의 향방만을 의식하지만 그야말로 자신의 패스를 받을 자를 필연적인 근거로 삼는다. 우리가 공동체를 인식하기 이전에, 우리의 실존은 공동체를 향해 이미 개방되어 있으며, 이 개방성은 타자를 향한 영원한 운동으로 표현될 것이다. 우리는 고독할 새가 없다기보다도 고독을 통해서조차 공동체를 향해 나간다. 따라서 표면에 나타난 형태가 나이건 너이건 어떤 것이건 간에 시를 주관하는 근본적인 화자는 '우리'이다." (<곡면의 힘>, 123~124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계속 짓궂은 질문을 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한국 문학에서 시의 위상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문학의 위상이 예전만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문학 가운데서도 시의 위상은 예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아진 것 같습니다.

서동욱 : 시의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단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복잡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우리가 기억하기에 과거 1980년대는 문학 특히 시의 위상이 높았습니다. 1980년대에 정치를 중심으로 한 삶에 시가 아주 잘 응답했죠.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국민 시인' 혹은 '국민 작가'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출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시의 위상은 분명히 낮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시는 그 성취가 유례없이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서 한국 시의 모습이 훨씬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가 한 공동체가 즐길 수 있는 노래로서의 지위를 가지는 방식으로 풍요로워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좁아지되 분명히 깊어지는 방식으로 풍요로워진 것이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현상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도서 시장에서 '시집'이라는 출판물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한 시의 소멸의 징후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쩌면 시를 대면하는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市場)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시장의 차원에서는 시집만이 문제가 아니라 출판 자체가 음반 산업처럼 출구가 어디인지 모를 터널 안으로 들어와 있지요.)

합평회, 시 모임, 각종 웹사이트 등을 통해서 국민 오락처럼 사람들 속으로 시가 깊이 스며들어간 것도 사실입니다. 질적 성취 문제를 떠나서 사람들은 여전히 시와 더불어 즐거워합니다. 시가 빛나는 자리가 출판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그것이 시의 소멸의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연구해야 하는 것은 오늘 날 어느 매체, 어느 장소에서 시가 출현하며, 또 가장 잘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죠.

프레시안 : 질문을 잘못 꺼낸 바람에 악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웃음) 말씀을 듣고 보니, 최근 화제가 되었던 뉴스가 하나 기억납니다. 서울 지하철 역사의 게시판의 시들을 놓고서 최근에 '좋은 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습니다. 방금 시적 성취의 측면에서 보면 좋은 시가 많아졌다고 하셨습니다만.

서동욱 : 지하철 역사의 시 말이군요. 먼저 전제부터 얘기하자면, 공공장소에 시가 꼭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공장소이니 만큼 공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하지만 공공장소에 시를 게시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공 설치 예술로서 시가 갖는 장점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다만, 미술 작품 중에서도 설치 미술이 별도의 영역으로서 있잖아요? 이런 설치 미술이 성공하려면 그에 맞춤한 고유한 개념, 주의, 절차가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작용이 생기기 십상이죠. 이번에 서울시 역사 게시판의 시를 둘러싼 논란도 바로 이런 준비가 부족한 탓에 생긴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 자체에 긍정적인 면모가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지하철 게시판의 시들을 보기 싫어한다는 것, 이것의 의미는 사람들이 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죠. 게시판의 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유심히 살펴보고 때로는 눈을 찌푸리며 평가를 한다는 것이죠.

즉, 시인과 독자가 모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현대 시인들이 시적 성취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독자와의 소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서동욱 : 여기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야겠군요. 시의 중요한 역할은 기존에 우리가 익숙해 있는 통념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통념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당연하게 시는 보편적이지 않은 자리에 외롭게 서 있어야 마땅하겠죠. <곡면의 힘> 뒤에 실린 시인의 글('시')에서도 이렇게 썼었죠.

"(…) 시 역시 고삐 풀린 말이 되었다. 봉인이 풀려 버린 마귀가 선한 인간의 눈앞에서 달아나 버린 것과도 같이, 시는 공통적 지성을 지닌 사람들 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양산박과도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장소, 현행적인 법이 와해된 장소, 그러므로 비장소에서 나타난다." (<곡면의 힘>, 112~113쪽)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서 독자를 찾기보다는 양산박에서 독자를 찾는 게 바로 시라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게 (좋은) 시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공동체의 문학이라는 이상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서동욱 : 1980년대나 지금이나 시는 당대인이 처한 고통,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 역시 치열하게 바로 지금 이 시대의 공동체를 성찰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시들이 (1980년대와 다르게) 독자에게 가 닿지 않는 것일까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좋은 시는 당연히 통념에 안주하는 사람의 눈에는 띠지 않겠죠. 다르게 표현하자면, 시는 언어가 통념에 젖어 있도록 놔두지 않고, 언어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언어를 향유하는 독자도 괴롭히고 있고요. 그러니까 독자가 찾아와야 할 지점을 가리키며, 독자에게 노고를 요구하는 게 바로 시입니다.

아주 절실하게,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독자의 협조 즉, 독자의 노동을 요구하는 게 바로 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통념을 깨고 나오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 결코 시가 요구하는 노고를 하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과 시가 만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이런 반문도 가능하죠. 시는 과연 독자들이 와야 할 지점을 제대로 가리키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게 저와 우리 시대 시인의 몫이겠죠.

ⓒ프레시안(최형락)

"언어의 씨앗이 어디서부터 날아와 시가 되다"

프레시안 : 화제를 바꿔서, 시 창작 얘기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철학자로서 <차이와 타자>나 <일상의 모험> 같은 저작을 쓰고, 평론가로서 <익명의 밤> 같은 비평서도 씁니다. 그 와중에 시를 써서 벌써 세 권의 시집을 내셨죠. 시를 쓴다는 게 다른 글쓰기와 다른 어떤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동욱 : 비유하자면, 하루를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질서 속에서 보낼 수 있는지 시간표를 만드는 작업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런 작업은 분명히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루의 삶을 실천하면서 우연성 속에서 그 때 그 때 맞닥뜨리는 일들에 대응하는 건 필수적이면서도 시간표 짜기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계획표를 완벽하게 짜 놓았다고 해도, 우리의 하루는 철저히 우연성 속의 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계획표를 짜는 일, 하루를 질서 속에서 장악하는 일이 바로 철학적 사유, 철학적 글쓰기의 문제라면 실제로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발적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곤혹스럽게 무엇인가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것에 해당하는 일이 바로 시 쓰기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저는 언어를 통해서,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반성하고 성찰하기도 하지만, 예상 못한 미지의 삶의 국면에서 미지의 언어가 도래할 때 그 때 그 때 개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응답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 놓여 있는 게 바로 시 쓰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둘은 결코 치환 불가능한 것이죠.

프레시안 : 독자로서 호기심이 생겨서 묻습니다. 그렇게 논리에 기반을 둔 글쓰기를 할 때와 시를 쓸 때의 자아가 바뀝니까?

서동욱 : 그렇게 자아가 바뀌느냐고 물을 때는 통일된 자아가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이죠. (웃음) 저는 통일된 자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그 때 대응해야 할 사태의 특수성이 바로 그에 맞춤한 자아를 선택할 뿐이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철학적 글쓰기를 할 때 선택되는 자아와 시 쓰기를 할 때의 자아는 분명히 다르죠.

이런 자아들은 어디서 나오느냐고요? 아마도 익명의 거대한 사유 덩어리, 익명의 거대한 정서덩어리로부터 반죽이 쪼개져 나오듯 그렇게 나올 겁니다. 아니면 자아들이란 익명의 휴지 상자로부터 그 때 그 때 뽑혀 나오는 티슈들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죠. 이렇게 보자면 자아는 사유와 정서의 중심에 있지 않고 익명의 삶이 그 때 그 때 사안에 따라 쓰고 버리는 휴지 같은 것일 겁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시는 언제 창작을 하십니까? 집필 시간을 정해 놓고 시를 창작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서동욱 : 불가능하죠. 순간순간의 메모들. 우연성으로부터 탄생한 구절들. 이런 속에서 시가 한 편 한 편 탄생합니다. 비유하자면, 어디서 꽃씨가 날아왔는지 맨땅이 순식간에 잡초 밭으로 변하죠. 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염병이 퍼집니다. 그런 식으로 언어의 씨앗들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새에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게 바로 시입니다.

"시는 혈관에 들어간 약이나 알코올 같은 것"

프레시안 : 문학 독자 가운데도 시 읽기를 즐기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시 읽기의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서동욱 : 특별한 의미요? 시는 의미라기보다는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시의 작용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의 독자로 남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가 필요 없겠죠. 언어는 의미를 실어 나를 수도 있지만, 시처럼 특별한 언어 체험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심지어 유해하더라도 입안에서 알사탕처럼 굴리는 재미, 이것이야말로 시가 줄 수 있는 특별한 언어 체험이죠.

프레시안 : 이 시집의 말미에 있는 시론인 '시'에 이런 구절이 있군요.

"시의 언어는 기능하는 것이지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야구인의 기적과도 같은 플레이가 해석해내야 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채로, 모든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 것과도 같다. 시의 말은 혈관에 들어간 약이나 알코올처럼, 또는 영문 없이 우리를 떨게 하거나 침울하게 하는 동물들의 소리처럼 작용하며 의미하지 않는다." (<곡면의 힘>, 112쪽)

그러니까, 그런 특별한 체험으로 시와 통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 읽기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독자가 되어 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이군요?

서동욱 : 그렇습니다. 그건 체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삶의 모든 영역이 그렇습니다. 등산, 낚시 등등만 해도 그렇죠. 누가 그것의 특별한 의미를 언급하며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프레시안 :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시가 줄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과서가 강요한 시 읽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어,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읽을 때, '풀은 민중이다' 이렇게 도식으로 외우는 식으로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동욱 : 왜 그런 방식의 시에 대한 접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접근은 시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진정한 텍스트를 안에 감추고 있는 예쁘게 장식한 선물 상자처럼 다루는 것은 난센스죠. 이 때 시는 직선으로 가야 할 길을 쓸데없이 에둘러가는 언어의 낭비일 뿐이죠.

그런 점에서 시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예쁜 포장 상자가 아니라, 혈관에 들어간 약이나 알코올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채로 사람을 뒤흔들며 작용할 뿐입니다. 앞에서 시는 의미를 가리켜 보이는 게 아니라 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봐야 한다고 얘기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요.

프레시안 : 그렇다면, <곡면의 힘>이란 시집을 놓고서 이렇게 시인과 얘기를 계속 나눠야 하는지 회의가 듭니다. (웃음)

서동욱 : 정확합니다. 시집 외에는 시에 대한 지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얘기도 할 게 없습니다. (웃음)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인터뷰 뒤에 직접 꼽아주신 시를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한두 가지 주변 질문을 하는 건 허락해 주십시오. 여러 편의 시가 시집으로 묶입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들이 있죠.

서동욱 : 당연히 그런 시들이 있습니다.

프레시안 : 보통 그런 시들 가운데 한 편이 표제작이 되나요?

서동욱 : 그런 경우가 많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는 일이죠. 표제작을 선택하는 것도 시인 나름대로 달라요. 저는 이 시집의 색깔을 대표하는 시가 '곡면의 힘'이라고 생각해서 표제작으로 골랐습니다.

곡면, 무게, 탄력, 생각, 영하, 집중력 등등 자연과 삶 안의 가장 원초적인 힘들을 가시화하는 것이 이번 시집의 작업 가운데 하나였는데, <곡면의 힘>이라는 제목은 그런 탐구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으로 생각되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나름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오는 군요. 제가 이번 <곡면의 힘>을 포함해서 시집 세 권을 펴냈는데, 회고적으로 돌아보니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모든 시집에서, 결코 화자라고도 주인공이라고도 딱히 부를 수는 없는 특정 인물이 시집을 주도하는군요.

첫 시집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에서는 이상과 랭보가, <우주 전쟁 중에 첫사랑>에서는 이하(李賀)와 장국영이, 그리고 <곡면의 힘>에서는 철학자 스피노자가 시집을 주도하는 인물들이더군요. 표제작인 '곡면의 힘'도 스피노자가 주인공이고, 공교롭게도 첫 시('보온')와 끝 시('스피노자')가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이뤄진 시들이네요.

그런데 네덜란드는 스피노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시의 환경이죠. 물론 시 속의 이 인물들은 모두 역사적 인물들은 아닐 터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갑자기 저 스스로에 대한 낯선 독자가 되어 뭔가를 배우게 되는 체험 역시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좋은 작품만 쓴다고 위대한 시인은 아니다"

프레시안 : 오늘 인터뷰의 맥락에서 보면, 준비한 마지막 질문도 눈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독자에게 읽기를 권하는 시인을 몇 명 추천 받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서동욱 : 솔직히 추천하고픈 좋은 시인이 너무 많아서 선뜻 내키지는 않습니다. (웃음) 하지만 기왕에 질문을 준비해 왔으니 대답은 해보겠습니다. 가령 접근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 고통스럽게 하는 것의 가치 때문에 파울 첼란 같은 시인의 작품은 꼭 체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작품만을 쓴다고 위대한 시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자니 문예 내적인 척도상의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지 아리송해지는군요.) 위대한 시인은 인간의 역사가 새로 출현하고 요동치는 국면을 대변하고 그 국면을 이름 짓습니다. 그런 시인은 문명의 수원지(水源池)와도 같습니다. 호메로스는 물론이고, 근대에 와서는 프리드리히 횔덜린, 샤를 보들레르 등이 그런 시인의 이름으로 걸맞겠죠.

첼란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독일어로 시를 썼으나 프란츠 카프카처럼 독일어의 변방에서 태어났고(당시 루마니아 령 체르노비츠),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유대인으로서 부모를 나치의 수용소에서 잃은 사람이었죠.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었고 최후의 선택은 센 강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과 문학은 언어적으로, 민족적으로 동질성을 추구하는 집단의 그것과 거리가 멀며, 오늘날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또는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체의 시를 멀리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사람들 곁에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시를 찾자면 넓게는 한시, 그리고 좁히자면 두보 같은 시인의 시라고 생각됩니다. 두보의 시야말로 예술적 성취와 민중의 삶 안에서의 체험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중첩되어 있는 걸작이죠. 편 편마다, 그 피곤하고 변변치 못한 인생이 겨우 뜬 눈으로 바라본 고달픈 인간의 삶이 괴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나라는 많은 역사서를 가지고 있지만, 두보가 아니었다면 그 시대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정확히 해볼 엄두도 못낸 여자와 아아의 삶, 무꽁다리처럼 잘려나간 목숨들의 여한은 대체 어디에 기록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두보의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옥죄는 통념이나 지배자들이 내세우는 가치에서 풀려나 그의 시 속에서 울려 퍼지는 고통 받는 인간의 정서가 꾸민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 <곡면의 힘>(서동욱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젊은 시절에 벽에 작품을 사인펜으로 써놓고 읽고 또 읽은 시인이 중국 시인 이하입니다. 그 독특하고 파격적인 분위기, 음울한 정서 등은 굉장히 매력적이죠. 제 두 번째 시집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에서 장국영과 함께 시집의 이끌어가는 인물이기도 했지요.

이하는 27세에 요절한 당나라 시인인데, 모함을 받아 제대로 된 벼슬도 하지 못하고 주류 사회의 주변을 떠돈, 문화의 예외적인 틈새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중국의 벽에 생긴 저 예외적인 틈새를 통해 드려다 보면 탐미와 귀신의 기운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게 어느 날 벽을 무너뜨리고 동양의 정갈하게 정리된 주류적 질서와 가치 위로 오물처럼 덮친다면! 이하의 시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즐겁게 해보게 되죠.

프레시안 : 우리 시대 한국 시인은 어떻습니까?

서동욱 :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 시인들은 매우 큰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 같고, 젊은 시인 몇 명만 언급하겠습니다.

김경주 시인의 작품이 많은 성취를 담고 있죠. 개인적으로 김경주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으면, 시뿐 아니라 한국 문화계에 보다 큰 활력이 생길 것 같아요. 김상혁의 시집도 눈여겨 볼만하고, 황인찬 역시 새로운 개성의 영역을 열고 있는 시인으로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최근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황유원 시인의 작품도 즐겁게 읽었죠.

프레시안 : 저도 안 읽어본 시인의 작품이 많은데, 꼭 찾아서 시 읽기의 즐거움을 체험해 볼 생각입니다. 이번 시집 출간을 계기로 <프레시안> 지면에서 특별한 연재를 준비 중이시죠.

서동욱 : 예, 일종의 미니 문학 개론을 짧게 연재해볼까 합니다. 아까 시 또 넓게는 문학이 독자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어떻게 발휘해야 할지 모색해야 한다고 얘기했었죠? 그래서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하는 진실, 구원, 사회성과 정치성을 둘러싸고 제 생각을 <프레시안> 독자와 먼저 공유해볼 생각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서 저 자신도 변모해볼 기회로 삼고요.

프레시안 : 네, 저도 열심히 읽고 의견도 드리겠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함께 읽기 : 서동욱 시인의 <곡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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