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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후, "우리는 '온도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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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참사 이후, "우리는 '온도의 공동체'입니다"

[들뢰즈 1995+20 ②]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였던 미셸 푸코는 자신의 동료 질 들뢰즈(1925~1995년)를 놓고서 이렇게 얘기했다. 들뢰즈 자신은 정작 이 말을 농담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그의 20주기를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푸코는 아끼는 동료의 작업을 놓고서 놀랍도록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1995년 11월 4일,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말 그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이미 생전에 현대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들뢰즈는 세상을 뜨고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철학을 넘어서 문학 비평, 사회학, 인류학 등 새로운 사유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고 있다.

당장 세계 곳곳에서 들뢰즈의 20주기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마침 프랑스 문화원도 그의 20주기를 기념해 생전에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인터뷰 동영상 <질 들뢰즈의 A to Z> DVD의 한국어판을 펴냈다. 그의 제자 클레르 파르네가 작업한 이 인터뷰 동영상은 그의 삶과 철학에 다가가는 아주 중요한 경로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 최고의 들뢰즈 권위자로 꼽히는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가 오는 4월 28일(화요일)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강연도 연다. 서 교수는 이 강연에서 <질 들뢰즈의 A to Z> 동영상의 중요한 부분을 청중과 함께 보면서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전달할 계획이다.

프랑스 대사관과 프랑스 문화원에서 제안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BK21 플러스 사업팀이 화답하면서 성사된 이번 강연은 대학 안에서 축적된 지식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는 한 본보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미 서동욱 교수 등은 지난 1월과 2월에도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연속 강연을 개최해 매회 350명이 넘는 청중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 냈었다.

<프레시안>은 국내에서 처음 들뢰즈 20주기 행사를 개최하는 서동욱 교수를 만나서 들뢰즈 철학 더 나아가 프랑스 철학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물었다. 마침 인터뷰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진행된 터라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이후에 철학 더 나아가 한국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지로 이어졌다.

지난 4월 10일 강남구 신사동의 민음사 회의실에서 약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전문을 2회에 걸쳐 그대로 싣는다. 인터뷰는 강양구 기자가, 정리는 강양구·이명선 기자가 함께 했다.

(☞관련 기사 : ① 들뢰즈가 묻는다…"목숨 걸고 생각할 준비가 되었나?")

들뢰즈 20주기 기념 강연 '철학자 들뢰즈를 영상으로 만난다!'

일시 : 4월 28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 서강대학교 J관 302호.
강사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

참가비는 없으며, 강연 뒤에는 추첨을 통해 <질 들뢰즈의 A to Z> DVD와 서동욱 교수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펴냄)을 증정합니다.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 ⓒ프레시안(손문상)

지금 한국의 인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프레시안 : 사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프랑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소 기이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 한국의 독서 시장의 상황을 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습니다. 소설도 국내소설은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죠. 비평의 죽음이 얘기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좀 더 얘기를 해보면, 한국 사회처럼 논픽션이 나오지도 않고 또 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사회도 드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논픽션이 외면 받는 상황이니, 당연히 그 작동 방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과학이 주목받을 리 없죠. 사회과학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은 지도 정말로 오래되었죠.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그나마 철학 에세이 같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죠. 혹시 이렇게 철학 에세이 같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현상은 구체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말랑말랑한 에세이로 포장된 추상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퇴행의 징후는 아닐까요? 철학자로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서동욱 : 프랑스 철학뿐만 아니라 동서양 철학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어떤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과연 그게 현실을 외면하는 퇴행의 징후일까요? 혹시 복잡다단하게 얽힌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싶은 통찰력에 대한 목마름의 표현이 아닐까요? 수박 겉 핧기 식이 아니라 세상과 본격적으로 대면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지금의 독서 시장에서 철학을 내세운 책들이 각광을 받는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독자든, 저자든, 출판사든 '당장 무엇인가를 수확하자'는 조바심을 버려야 할 것 같아요. 뭔가 당장의 성과에만 집착하다가는 금방 황폐해질 게 뻔합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상황을 추동한 문제의식이 무엇인가, 그 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죠.

프레시안 : 그런데 인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 철학 빼곤 다른 분야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한 번쯤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문·사·철을 대표했던 문학, 즉 시, 소설, 비평이 예전처럼 대중의 호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장 선생님께서는 시와 비평의 창작자이기도 합니다.

서동욱 : 시, 소설, 비평이 예전처럼 호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죠.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의 경우는 제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좋은 시가 쏟아졌던 시기가 도대체 있었나' 하고 생각할 만큼 수준 높은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좋은 시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과거 '국민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전체가 향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작품은 등장하고 있지 않죠.

어떻게 된 사정일까요?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난도의 공예품으로서 시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는 수준 높은 문학적 성취를 얻은 대신에, 공동체적 보편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죠. 아쉬운 일이지만,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할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길을 찾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시에 불어넣어진 에너지는 아직 정점을 치진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어떤 색깔의 풍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프레시안 :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요? 한국 소설의 성취에 대한 회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서동욱 : 소설의 경우는 전(全) 지구화된 독서 시장이라는 물적 조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외국의 가장 좋은 작품이 실시간으로 국내 독자의 탁자 위에 오르고 있죠. 그러니 한국 소설 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써내는 전 세계 작가와 동일한 시장 안에서 작품을 써야 하는 환경과 맞닥뜨린 셈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을 대표할 뿐 아니라 소설 문학 자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현대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핀천의 경우가 그렇죠. 그는 탁월한 학자와 예술가의 노동력을 모두 지닌 채 그 진지한 탐구력과 인내심을 가동시키며 엄청난 공부와 상상과 대담한 가설을 결합해 작품을 써냅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한 평생 동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핀천의 작품을 우리와 관계없는 외국의 작품이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왜냐하면, 그가 공부하고 연구해온 세계가 곧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독자 입장에서 더 이상 그의 소설은 우리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상관없지만 마음을 끄는 외국의 읽을거리가 아니라, 바로 독자 자신의 인생의 비밀을 푸는 굉장한 열쇠로서 손 안에 쥐어진 셈입니다.

사실상 이제 전 지구적인 모든 독자와 모든 작가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단 하나의 세계, 어느 방향에서나 다 들여다보이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의 맹점 때문에 조개 속 진주처럼 숨었다가 가치가 누적된 채 어느 날 나타나는 문학의 보물이나, 주류의 유통 구조 바깥에서 갑자기 출현할 진귀한 개성을 지금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주 진귀한 우연성, 거의 관념에 불과한 우연성이 되었죠. 출판사의 연출에 의해서나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뭐 얘기하다 보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았군요. 그냥 대답의 환경 정도를 얘기한데 만족할까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시, 소설의 형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평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태는 정말로 유감입니다.

서동욱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비평의 황금시대에 학생 시절을 보낸 저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좀 과장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겠으나,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지성계는 사실 비평계밖에 없었어요.

물론 지성계의 어느 영역이건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반성과 비판에 시달리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외로운 근대 학문으로 태어나, 자의식 속에서 한 정신의 독자적인 역사를 구축했으며, 또 일반인의 실시간적 읽을거리인 시, 소설을 그 역사에 매개시키면서 생명력을 얻었던 영역은 비평뿐이었습니다.

대학 안에서 누적된 지식을 사회 문제와 줄곧 맞대결시키며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고, 작가와 시인이라는 이름하에 새롭게 출현하는 떠돌이 젊은이들의 낯선 발언에 역사적 의미와 독보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을 비평 말고 다른 무엇이 해왔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령 철학의 경우는 어떨까요? 한국 학자들의 철학적 스칼라십이란 정말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또 오늘날도 긍정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개개인을 초월하는 한 정신의 자의식이 구현하는 독자적인 역사를 꾸며내는 일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물론 이것은 마땅히 되어야 할 일을 못 이룬 스캔들이 절대 아니며, 가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개별적인 천재의 출현으로는 해결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사유의 환경입니다. 어쨌든 이런 사태에 대한 자의식이 초조감으로 발현될 때는, 독자적인 사상에 대한 욕구로 심심치 않게 표출되곤 하지요.

프레시안 : 그야말로 '비평가의 시대'가 있었죠. 가장 빛나는 한국 지성 역시 비평계가 배출했고요.

서동욱 : 우리나라의 지성을 상징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대부분이 바로 비평가였죠. 그런데 지금 더 이상 비평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어쩌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시, 소설과 같은 한국 문학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상이겠죠. 또 비평을 경유해서 새로운 사상내지 외국 이론을 접하던 방식이 더 이상 주도적이지 못하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평이 과거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독자들의 지성적 관심을 매개하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관심이 최근 철학 에세이에 얼마간은 반영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분위기를 잘 키운다면, 새로운 한국적 지성의 출현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죠. 앞에서 독자, 저자, 출판사 모두가 함께 더 나은 방행을 모색해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정말로 과거 비평가의 시대를 넘어선 '철학자의 시대'가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걱정되는 모습은 없나요? 앞에서 제가 먼저 불안감을 토로하긴 했습니다만.

서동욱 : 솔직히 말하면 아주 많죠. (웃음) 당장 앞에서 지적한 대로 피상적인 관심의 충족에 머무를 수 있으니까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라는 암소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등에 역할을 하겠다'고 얘기하고 나섰다가 아테나 시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죽었던 기원전 수백 년 전부터 철학은 우리를 평균적인 일상성 속에 머물지 못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철학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죠. 그러니 철학 책을 읽으며 어려운 개념을 지적으로 향유하고서, 단지 다시 제자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란 궁극적으로는 심리적으로, 지적으로 더 어려운 삶의 과제를 하나 더 만드는 일 같습니다. 사실 우후죽순 생기는 인문 강연을 놓고서도 똑같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프레시안 : 그러고 보니 지성의 죽음, 대학의 죽음이 얘기되는 시대에 정작 인문 강연이 유행하는 것도 독특한 세태입니다.

서동욱 : 맞습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됐는데 밖에서는 왜 인문 강연에 대한 수요가 이렇게 높은지, 이런 역설적인 상황의 원인을 대학 안팎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죠. 가장 큰 원인은 대학 안에서 지식을 유통하는 방식을 평가하는, 현재의 제도가 채택하는 규약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가령 그 규약에 호응하는 천편일률적인 논문 생산 방식은 연구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연구를 표현하는데, 그리고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얻는데, 모두 근본적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듯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논문이 담고 있는 지식이 과연 대학 안팎의 학생과 대중에게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정작 대학 밖에서 인문학을 갈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대학 밖의 인문 강연의 인기로 나타났습니다.

이 상황도 앞으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키워야 합니다. 대학 밖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한 인문학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자 공동체에게 새로운 강연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현상이죠. 지식에 대한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이 열렸다고 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복지를 시민이 사회 안에서 요구하듯이, 지식에 대해서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으로서의 인문 강연, 시민운동으로서의 대중 강연이라는 관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 저로서는 한국의 대학과 그 구성원들이 왜 자꾸 안으로만 쪼그라드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학교 안팎의 울타리를 허물고 대학을 지역 사회의 시민 공동체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잖아요. 당장 서울의 몇몇 대학이 시민과 호흡하는 한국 지성의 요람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까요?

서동욱 : 대학 구성원을 어느 범위로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꺼번에 욕하시면 안 됩니다. (웃음) 대학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모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시도하는 들뢰즈 20주기 기념 강연 역시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시도된 것이죠. 아직은 실험과 모험의 과정입니다만.

세월호 이후, 철학은 가능한가?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지금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문득 들뢰즈라면 세월호의 비극에 어떻게 응답할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동욱 : 글쎄요. 이런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너무도 명확한 것이라 굳이 들뢰즈나 다른 지성을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나 스스로 응답하는 법을 알고 있는 문제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세월호 참사는 그냥 흘러가 버리지 않는 사건이죠. 얼마 전에 나온 <세계의문학> 2014년 겨울호(제154호)에 이에 관한 철학 에세이('온도의 공동체')를 하나 쓰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에세이를 쓰면서 고민했던 내용을 공유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세월호 비극을 증언하는 수많은 영상과 메시지를 접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어머니의 호소를 담은 영상이 인상 깊었지요.

"조금이라도 과거에 당신에게 베풀었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은 '따뜻함'에, 온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시인 69인이 참여한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 펴냄) 시집에도 온도에 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엄마, 여긴 추워요." (강은교)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김선우)

세월호 비극과 관련된 이런 '온도'와 관련된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것이겠죠. 주장을 담은 명제를 통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입장은 이차적입니다. 우리가 그런 정치적 입장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추동력 즉, 공동체의 힘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그것이 바로 '온도'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그런 온도를 공동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사건 가운데 사건이었죠.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비극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 이전에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같은 온도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져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의미 있는 통찰을 앞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에서 들뢰즈가 회고하기도 합니다만, 그는 들뢰즈의 고등학교 철학 선생님이기도 했죠. 들뢰즈는 그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었지만, 아주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기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합니다.)

"역사가와 철학자는 계급이나 민족의 객관적 정의(definition)를 찾는다. 계급은 총소득액이나 생산 라인 직위에 기반을 두는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들의 어느 것도 한 개인이 어떤 민족이나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계급, 계층, 세대 등을 정의하는 '객관적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이런 객관적 정의가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 수 있죠. 실제로 어떤 사건의 국면에서는 이런 객관적 정의는 사실상 전혀 무용하죠. 당장 메를로퐁티는 날카롭게 그 예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혁명에는 혁명적 계급과 합류하는 특권층들이 있고, 특권층에 기여하는 억압받는 층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과학적·객관적·규약적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정의되는 '계급'이나 '입장'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극적인 방식으로 알려줬죠. 한마디로 '온도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개의 알갱이가 아니라 그런 원초적 공동체에 속하며 또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프레시안 : 말씀을 듣고 보니 개인적 경험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한국에 없었어요. 물론 밖에서 마음 아파하며 이 믿지 못할 뉴스를 보기는 했죠.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주기를 맞는 상황에서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동료 기자들이 비극의 희생양이 된 아이들을 기억하는 기록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을 읽을 때마다 마음의 벽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참사가 일어났던 시공간에 같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방금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온도의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서동욱 : 방금 언급한 '콤플렉스'라는 단어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것의 정체는 그 자리에 마땅히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데 대한 느낌 아닐까요?

그런데 바로 그런 콤플렉스야말로 애초부터 그 온도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정확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콤플렉스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죠. 사실 지금 세월호를 추모하는 많은 시민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 말씀을 들으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을 계기로 그런 온도의 공동체를 새삼 체험한 것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의미로 각인이 될까요?

서동욱 : 사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엇인가 의미를 얻어내는 것조차 미안하고 괴로운 것이 세월호 참사이지요. 의미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건 죽은 자들과 맞바꾼 모종의 등가물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한없이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죽은 이들은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하는데, 왜 삶을 소유한 우리는 삶에다가 덤으로 의미나 교훈 같은 것을 죽은 이들에게서 또 빼앗아 가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야할 자가 살아있기에 뭔가 깨달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체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구체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을 세월호 비극을 경험하고 추모함으로써 알게 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을 집단으로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철학은 가능할까요?

서동욱 : 사유란 못 견딜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지요.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못 견디게 하는 부름 때문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얼마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저 거대한 고통 앞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그 시간표를 짜는 얕은 머리를 어떻게 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 정도는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세월호 앞에서 사유가 움직인다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때문에 움직인다고.

프레시안 :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당분간 계속해서 곱씹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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