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였던 미셸 푸코는 자신의 동료 질 들뢰즈(1925~1995년)를 놓고서 이렇게 얘기했다. 들뢰즈 자신은 정작 이 말을 농담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그의 20주기를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푸코는 아끼는 동료의 작업을 놓고서 놀랍도록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1995년 11월 4일,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말 그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이미 생전에 현대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들뢰즈는 세상을 뜨고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철학을 넘어서 문학 비평, 사회학, 인류학 등 새로운 사유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고 있다.
당장 세계 곳곳에서 들뢰즈의 20주기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마침 프랑스 문화원도 그의 20주기를 기념해 생전에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인터뷰 동영상 <질 들뢰즈의 A to Z> DVD의 한국어판을 펴냈다. 그의 제자 클레르 파르네가 작업한 이 인터뷰 동영상은 그의 삶과 철학에 다가가는 아주 중요한 경로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 최고의 들뢰즈 권위자로 꼽히는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가 오는 4월 28일(화요일)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강연도 연다. 서 교수는 이 강연에서 <질 들뢰즈의 A to Z> 동영상의 중요한 부분을 청중과 함께 보면서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전달할 계획이다.
프랑스 대사관과 프랑스 문화원에서 제안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BK21 플러스 사업팀이 화답하면서 성사된 이번 강연은 대학 안에서 축적된 지식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는 한 본보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미 서동욱 교수 등은 지난 1월과 2월에도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연속 강연을 개최해 매회 350명이 넘는 청중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 냈었다.
<프레시안>은 국내에서 처음 들뢰즈 20주기 행사를 개최하는 서동욱 교수를 만나서 들뢰즈 철학 더 나아가 프랑스 철학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물었다. 마침 인터뷰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진행된 터라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이후에 철학 더 나아가 한국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지로 이어졌다.
지난 4월 10일 강남구 신사동의 민음사 회의실에서 약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전문을 2회에 걸쳐 그대로 싣는다. 인터뷰는 강양구 기자가, 정리는 강양구·이명선 기자가 함께 했다.
들뢰즈 20주기 기념 강연 '철학자 들뢰즈를 영상으로 만난다!'
일시 : 4월 28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 서강대학교 J관 302호.
강사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
참가비는 없으며, 강연 뒤에는 추첨을 통해 <질 들뢰즈의 A to Z> DVD와 서동욱 교수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펴냄)을 증정합니다.
사후 20년, 다시 들뢰즈가 왔다
프레시안 : 오는 28일에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20주기를 기념하는 강연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듣고서 '아, 벌써 20년이나 지났네!'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죠. 이제 세계 곳곳에서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릴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강연이 그 시작입니다. 이런 강연을 준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서동욱 : 지난해 저도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반비 펴냄) 출간을 계기로 서강대학교 BK21플러스 사업팀이 연속 대중 강연을 기획했어요. 대학에 누적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해 같이 나누자는 취지였죠. 그런데 매회 350여 명 이상의 청중이 참여하는 열띤 반응에 크게 놀랐습니다. 강의실을 계속해서 큰 곳으로 옮겨야 할 정도였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강연에 오신 분 가운데 프랑스 대사관의 수석참사관이자 공관차석인 에티엔 롤랑-피에그(Etienne Rolland-Piègue) 씨가 계셨는데, 나중에 들뢰즈에 관한 강연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어요. 철학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저 또한 들뢰즈 20주기를 맞는 해라 의미 깊은 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에, 프랑스 대사관의 에티엔 롤랑-피에그 씨, 프랑스문화원의 다니엘 까펠리앙(Daniel Kapelian) 씨(뉴미디어 담당), 레티시아 파브로(Laëtitia Favro) 씨(출판 진흥 담당)와 함께 들뢰즈의 삶 그리고 철학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이번 강연을 공동으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랑스 문화원이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해 <질 들뢰즈의 A to Z> 인터뷰 동영상을 국내에서 DVD로 출시하기도 했기에, 겸사겸사 들뢰즈 철학을 회고하기에 좋은 기회가 이렇게 마련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과문한 탓인지 이 인터뷰 동영상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인터뷰더라고요?
서동욱 : 철학자 사이에서는 유명한 인터뷰 동영상입니다.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서 세계 곳곳에서 출시가 되었죠. 들뢰즈 철학을 공부하는 연구자, 학생이라면 꼭 거쳐야 할 필수 코스죠.
사실 특별한 인터뷰 동영상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항상 방송 출연을 거부해 온 터라서 그에 대한 공식적인 영상 기록은 많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제자 클레르 파르네가 영상 인터뷰를 제안했고, 웬일인지 들뢰즈가 이 인터뷰 작업에는 응했습니다. 물론 죽고 나서 공개하는 걸 전제로요.
그래서 여덟 시간 분량의 인터뷰 동영상이 세상에 탄생했죠. 실제로 이 인터뷰는 1995년 11월 4일, 그가 타계하고 나서 공개가 되었습니다. 제가 1996년에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벵 대학에 도착했는데, 유럽의 공영 예술 채널 아르떼(Arte) TV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방영하고 있더군요. 당시 들뢰즈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철학자의 모습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레시안 : 아까 이 인터뷰가 들뢰즈의 철학에 접근하는 굉장히 중요한 경로라고 얘기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일단 형식이 굉장히 독특하더군요.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던져진 화두에 들뢰즈가 응답하는 방식이니까요. A의 동물(Animal)부터 Z의 지그재그(Zigzag)까지요.
서동욱 : 그런데 들뢰즈가 단지 던져진 화두에 답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순서를 무시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기 철학과 삶 전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들뢰즈 철학의 다양한 모습 거의 전부와 들뢰즈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 대부분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에 모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우리는 심지어 들뢰즈가 좋아하는 음식(상당히 특이한 편인데, 무엇인지는 DVD에서 직접 확인하셔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고, 그가 좋아하는 비외른 보리 같은 테니스 선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분석하는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들뢰즈는 '테니스의 프롤레타리아화'에 대해서도 이론을 만들지요. 요컨대, 철학자 스스로 자기 철학의 전모와 삶의 기록을 남긴 기록적 가치가 굉장히 높은 것이죠.
프레시안 : 들뢰즈의 달변도 굉장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의 철학이 담긴 글은 정작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서동욱 : 그렇죠.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Anti Oedipus)>(김재인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유명한 책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대학 사회에서는 강의 잘하는 교수로 유명했어요. 오죽하면 들뢰즈가 이렇게 회고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강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또 대중의 호응도 컸습니다.
"강의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준비도 많이 했고. 그 때문에 은퇴할 때는 더 이상 준비를 안 해도 돼서 기쁘기도 했다."
당연히 들뢰즈는 중요한 내용을 말로 잘 전달했어요. 이런 점이 이 인터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놀랍도록 쉬운 표현과 명료한 설명 방식을 통해서 복잡한 들뢰즈의 철학을 그 스스로 잘 정리해 주고 있죠.
프레시안 : 사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잖아요. 그의 철학에서 문학 비평이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들뢰즈는 글보다 말로써 대중에게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다가갔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서동욱 : 맞아요. 들뢰즈도 다큐멘터리의 한 인터뷰에서 "글은 깨끗하고 말은 더럽다"고 언급하죠. 왜냐하면, 말은 듣는 사람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유혹(seduction)'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꼭 전달해야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귀를 열도록 유혹에도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죠. 정작 들뢰즈는 그런 유혹하기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아요.
프레시안 : 설명을 듣고 보니 굉장히 의미 있는 인터뷰가 그의 20주기를 기념해서 우리 문화계에 소개된 것이군요.
서동욱 : 20세기의 영상 기술 덕분에 성취된 일이죠.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만약 영상 기술이란 조건만 마련되어 있었다면, 플라톤도 들뢰즈와 똑같은 작업을 시도했을 것 같아요. 사실 플라톤의 <대화>가 곧 그 당시의 인터뷰 동영상이거든요.
그냥 철학을 추상적으로 남겨 놓은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육체를 가진 사람의 말을 통해서 철학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으니까요. 플라톤의 편지 가운데, 그의 <대화>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듯한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요.
"이것들에 관한 플라톤의 저작도 전혀 없으며 없을 것이고, 현재 이야기되는 것들은 아름답고 젊어진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것입니다." (<편지들>(플라톤 지음, 강철웅 외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소크라테스의 생생한 육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플라톤의 목적이었다면, 이미 플라톤은 오늘날의 영상 기술이 없었을 뿐이지 내심 인터뷰 동영상과 같은 작업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이 인터뷰 동영상은 플라톤과 같은 그런 철학적 의도를 당대의 기술과 결합해 실제로 구현했다는 철학적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프레시안 : 마침 들뢰즈 20주기라서 새삼 떠올려 본 것이긴 합니다만, 장폴 사르트르-미셸 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프랑스 철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게 대충 따져 봐도 60여 년 정도 됩니다. 1990년대에는 프랑스 철학 열풍이라고 불릴 법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요즘은 프랑스 철학 열기 자체는 식은 것도 같고요.
프랑스 철학이 한국의 인문학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이런 질문에 답해볼 정도로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서동욱 : 해방 훨씬 전까지 지평을 넓혀보면 60여 년 이상이죠. 프랑스 철학은 전후의 사르트르 열풍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간 우리 지성계와 오랜 시간 동반자 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지난 세기, 지금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우리 지성계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외국 학문을 수동적으로 수입하는 것을 자의식을 가지고 극복하는 것이죠. 그러니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과 같은 과제 자체는 분명히 맞고, 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외국 학문은 우리가 새롭게 생각할 힘을 얻도록 자극하는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사실 들뢰즈 자신이 이런 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죠. 들뢰즈의 철학은 선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게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따져보면 바뤼흐 스피노자(네덜란드)나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같은 외국 학문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들뢰즈는 외국 문학인 영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죠. 허먼 멜빌이나 윌리엄 포크너 같은 미국 작가로부터 자기 사상의 영감을 이끌어내지요.
물론 유럽 지식인끼리의 교류와 동서양의 교류라는 건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는 외국 학문을 파트너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60년이 넘도록 오랜 시간 독서를 통해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프랑스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죠.
프레시안 : 잠시 딴죽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사유의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과연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사유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자는 대중도 이름을 알 정도로 스타로 군림했죠. 하지만 그들의 사유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서 새로운 사유를 생성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는지는 의문입니다.
서동욱 : 아까 질문 가운데 귀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철학 열기 자체는 식은 것도 같다"는 언급이었죠. 오히려 그렇게 열기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사라진 것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인 징후가 아닐까요? 더 이상 프랑스 철학이 깜짝쇼처럼 등장했다 금세 사라지는 수입품이 아니라는 뜻이죠.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의 책은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프랑스 철학이 관심을 끄는 외국 상품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본래 도구라는 것은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늘 곁에 있는 것이잖아요. 프랑스 철학이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주위에 있는 무엇이라도 도구로 삼아 손에 들고 휘둘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면한 절실한 문제가 우리 주변의 학문을 필연적인 도구로 만드는 것이지, 그 태생이나 기원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프랑스 철학이라는 이 도구로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을지는 저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의 과제지만요.
프레시안 :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의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연속 강연이 매번 수백 명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을 그 증거로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프랑스 철학이 지금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서동욱 : 프랑스 철학이 우리 사유의 파트너로서 가장 공헌한 바가 무엇일까요? '정치·사회 문제에 철학이 늘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준 것이죠. 정치·사회·경제·문화 같은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하나의 고도로 사변적인 영역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늘 우리 삶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는 철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 것이죠.
이런 프랑스 철학의 핵심이 우리 삶의 조건을 비판적·반성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관습적·인습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가속도를 붙게 한 것이 프랑스 철학이었죠. 들뢰즈의 철학도 그 가운데 하나고요.
예를 들어, 들뢰즈의 주저 <안티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게 하는 '순혈적인 권위' 같은 것을 반성해보고, 교정하는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우리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미시 권력이니까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면, 진보적인 사람이나 보수적인 사람을 막론하고 사적인 공간에서 의식 없이 자행해 왔던 폭력, 예를 들어 가부장적 폭력, 남성 우월주의 같은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혹은 그 성찰에 가속도를 붙인 것이 바로 이런 들뢰즈의 철학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철학을 통해서 이런 미시 권력의 작동 방식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요.
다른 맥락입니다만, 예술 작품 특히 문학 작품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놓고서도 아주 유용한 도구를 제공해 준 것이 사르트르부터 들뢰즈까지의 프랑스 철학이었습니다. 우리 문학이 시간을 때우는 읽을거리, 엔터테인먼트로 주저 않지 않고 늘 사회를 향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온 것도, 한 축에서 보자면 프랑스 철학적 정신을 지닌 비평 작업에 문학이 호응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프랑스 철학과 한국 문학은 동반자적 협업 관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들뢰즈, 철학사를 전복한 철학자
프레시안 : 이제 좀 더 초점을 들뢰즈의 철학에 맞춰 보죠. 그의 철학이 철학사에서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서동욱 : 들뢰즈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벗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 먼저 철학사의 보편적인 사유 방식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봐야겠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서구 기독교에도 뿌리 박혀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초월'의 영역이죠. 다른 하나는 헤겔에서 볼 수 있듯이 주체가 스스로를 극복해야 할 장애로 여기고 뛰어넘게 하는 '부정'의 힘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 초월성과 부정성이 들뢰즈에게는 전무합니다.
프레시안 : 사실 그 두 가지는 긴밀히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부정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초월'의 영역, 이런 식으로요.
서동욱 : 맞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사유 방식은 플라톤에서 헤겔, 또 오늘날까지 철학사를 풍요롭게 해주었죠. 그러다 보니 이런 초월성과 부정성을 포기하면 철학자로서는 자칫 사유의 입지가 좁아지는 어려운 국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들뢰즈는 이 둘을 포기하고 남은 '내재성'만으로도 정말로 빼어나고 풍요로운 새로운 사유의 터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프레시안 : 내재성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서동욱 : 내재성은 '부가적인 차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어져 있는 것 자체에 대한 긍정을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인 것'에 대비되는 '현세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고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철학사에서는 현세적인 것을 초월적인 것보다 부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이것은 따져 보면 주어진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살고 있는 삶 대신에 저편에 있는 다른 삶을 위해서 사는 것이죠.
들뢰즈는 바로 이런 초월적인 혹은 부가적인 차원을 철학에서 없애버렸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조건에 충실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할 길을 열었죠. 이렇게 초월성과 부정성이라는 오랜 서양 철학의 유산과 결별한 점이야말로 들뢰즈 철학의 철학사적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서 아주 다양한 성취를 보여줍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나 마르셀 프루스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등 우리 곁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예술 작품에 대한 그의 독특한 철학적 주석은 그의 내재성의 철학이 빛나는 부분입니다.
가령 카프카 같은 경우는, 아버지의 존재가 짙게 드리워진 탓에 '초월적인 법'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유혹을 아주 많이 불러일으키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소수자 문제를 제기하며 카프카를 대담하게 내재성의 관점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내재적 영역 안에서 기존의 코드를 깨트리고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자기를 둘러싼 문화의 어느 자리에도 안착하지 못한 카프카의 소수 언어가 해냈다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앞에서 들뢰즈가 연구했던 과거의 철학자 이야기, 가령 스피노자와 니체 이야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들뢰즈는 철학사 속의 철학자들을 많이 연구했던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의 철학사 연구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서동욱 : 바로 그 대목이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입니다. 들뢰즈는 사람들이 덮어뒀던 과거의 철학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피노자와 니체였죠.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서 철학사에서 잊힌 의미 있는 철학자를 다시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됐죠. 그 덕에 철학의 사유는 더욱더 풍요로워졌고요.
프레시안 : 지금 우리가 아는 스피노자와 니체는 들뢰즈 시대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다르죠?
서동욱 : 정확한 지적입니다. 만약 철학사에서 과거의 철학책을 다시 읽게 한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를 꼽자면,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 철학사를 다시 쓴 사람이 있다면 마르틴 하이데거와 들뢰즈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철학의 기원부터 플라톤까지를 자기 관점에서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 근세까지를 자기 철학에 이르는 과정으로 정리한 헤겔.
기왕 철학사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욕심을 내보죠. 오늘날의 시점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들뢰즈를 읽고 또 읽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 중에서 들뢰즈만큼 철학의 중요한 영역과 주제를 버리지 않고 자기 철학 안에서 계승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존재론'을 들 수 있죠.
프레시안 :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같은 질문 말이죠.
서동욱 :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현대 철학은 많은 경우 바로 그런 질문과 연결되는 존재론을 더 이상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을 새롭게 구축하기보다는 오히려 회의를 갖고 해체하는 작업이 더 눈길을 끌었죠. 그런데 들뢰즈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틀 짓고 또 삶의 근간을 이룬 서구의 유산인 이 존재론과 같은 전통적 영역을 버리지 않고 쇄신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존재론 외에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철학의 기본 주제가 있습니다. '지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얻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지식의 문제(인식론),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즉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실천 철학,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미학의 문제 등.
들뢰즈는 바로 이런 고전적인 철학의 영역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사유 속으로 끌어들여 하나로 엮어낸 철학을 내놓았어요. 즉, 들뢰즈는 세계 전체를 전면적으로 자기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데 성공한 드문 철학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거장'이라는 칭호가 부여될 수 있는 철학자라 할 수 있겠죠.
서동욱 : 그런 어려운 질문은 반칙입니다. (웃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지식-존재-실천의 영역에서 하나씩만 꼽겠습니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기호', 존재의 영역에서는 '차이', 실천의 영역에서는 새롭게 쇄신된 '욕망'…바로 이 세 가지가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한 번 더 반칙을 하자면 지금 독자를 위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시면 어떨까요? (웃음)
서동욱 : 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가봅시다.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바로 이 기호의 의미를 이렇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알려주죠. 가령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서 절실하게 필연적으로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애인의 거짓말입니다.
애인의 거짓말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당혹감, 배신감, 궁금함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 이면의 진실을 찾고자 나서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지식은 좋은 것이다. 참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참된 것을 한 번 찾아보자' 이런 식으로 미리 준비된 마음가짐에 따라서 진실을 찾는 게 아닙니다. 마치 애인의 거짓말처럼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밖으로부터 강요받고서야 진실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과정 자체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부딪쳐 나가는 몸과 마음을 닦는 도야(陶冶)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들뢰즈는 기호 개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결코 삶과 떨어진 것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셈입니다.
프레시안 : 다음은 차이죠?
서동욱 : 이 개념에서 특히 들뢰즈의 반(反) 플라톤주의가 두드러집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플라톤은 현세를 초월한 이데아를 상정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동일성을 가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데아를 상징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름 즉 차이야말로 오히려 세상의 존재를 설명하는 근본 개념이라고 주장했죠.
이런 차이에 대한 강조는 곧바로 들뢰즈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인 욕망과 연결이 됩니다. 이 개념은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피력되고 있는 이론입니다. 이 욕망 역시 초월성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어떤 근본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채워 넣으려는 갈망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전형적인 플라톤 식 사고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초월적이고 모범적인 것을 상정하고 현재를 결핍된 상태로 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는 욕망이 사실은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생산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엔 이런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의 삶을 살도록 하는 추동력이고 더 나아가, 사람들 간의 관계 또 세상을 바꿔가는 힘이죠. (계속)
(☞관련 기사 : ② 참사 이후, "우리는 '온도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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