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개인의 유품은 대부분 스스로 정리한 상태였다. 유가족이 유품 정리를 위해 찾은 집에는 뜯지도 않은 각종 출석요구서만 잔뜩 쌓여 있었다. 1993년 입사한 유성기업 영동공장은 그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됐다. 유서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채증하고 감시하고 고소하고… 회사는 (저희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범죄자야, 너희는 불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빨리 나가라고. 어떤 조합원은 (누군가랑) 싸웠는데 왜 싸웠는지 생각이 안 난답니다. 어떤 조합원은 정신을 차려 보니 옥상 난간이더랍니다. 왜 자신이 난간에 서 있는지 모르겠더랍니다. 자식새끼 생각이 나서 어렵게 난간에서 내려왔답니다. 이런 현장이 열사를 만들었습니다."
유성기업 노동자 홍종인 씨의 말이다. 홍 씨는 지난 3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광호(42) 씨의 동료였다.
한 씨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인근 죽천교에서 목매 숨진 채 발견됐다. 한 씨는 죽기 직전에도 회사로부터 징계위원회 회부 통보를 받았다. 세 번째 징계 통보였다. 그 전까지 한 씨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11차례 고소 당했고, 8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었다.
이런 무분별한 고소·고발은 한 씨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노조에 따르면, 회사가 조합원을 상대로 제기한 민형사상 고소·고발 건수는 무려 1300여 건이었다. 법을 활용한 일종의 '탄압'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상은 변호사는 "고인의 죽음에는 2011년 5월 이래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유성기업의 고소 및 징계 등 법체계를 이용한 노동자 괴롭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씨의 죽음을 계기로 '직장 내 괴롭힘', 이른바 '가학적 노무관리'에 대한 사회적 제제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지 무려 50년을 '자랑'하는 유성기업에서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런 '괴롭힘'이 어떻게 한 개인을, 한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 노동자 43.3% 주요우울장애 '고위험군'…64.5% 사회심리스트레스지수 '고위험군'
한 씨가 목숨을 끊은 지 12일 째를 맞은 29일, 유성기업 사태를 점검하는 토론회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유성기업 노동자 살리기 공동대책위원회'와 장하나 의원실 등이 공동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한 씨를 비롯한 유성기업 노동자의 정신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한 수준임이 확인됐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2012년부터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벌였던 충남노동인권센터에 따르면, 지난 4년 간 유성기업 노동자의 정신건강 고위험군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주요 우울장애 고위험군의 비중이 지난해에는 조사 대상의 43.3%나 차지했다.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주요 우울장애 비율이 6.7%인 것에 비교해도 높은 수치일 뿐 아니라, 지역의 다른 장기투쟁사업장(23.1%)이나 비정규직 해고자들(28.6%)과 비교해도 두 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불행감을 느끼는 정도를 측정하는 사회심리스트레스 지수를 보더라도, 2013년에는 유성기업 노동자의 41.3%가 고위험군이었는데 2015년에는 64.5%가 고위험군으로 나타났다. 충남노동인권센터의 장경희 씨는 "유성 노동자의 10명 중 7명은 지금 행복하지 않으며,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부터 유성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인권운동사랑방의 명숙 상임활동가는 "간부들이나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면서 분노 조절이 잘 안 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왜 집단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까?…유성기업의 '직장 내 괴롭힘' 천태만상
이들은 왜 집단적인 우울에 시달리게 됐을까? 원인은 극단적으로 치달은 노사관계에 있었다. 정리해고 사태 이후의 쌍용차,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괴롭힘'이 논란이 된 KT 등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유성기업의 노사갈등은 무려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5월 18일 회사의 직장폐쇄 조치 이후 양 측의 갈등에 '폭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직장 폐쇄 조치에 항의하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에게 회사는 용역 경비를 동원해 폭행을 일삼았다.
폭력 사태가 지나간 공장에는 온갖 다양한 방법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2012년 복귀했지만, 이미 현장에는 복수노조를 활용한 기업노조가 들어섰고 이들과 금속노조 유성지회 사이의 차별은 눈에 띄게 시행됐다. CCTV와 몰래카메라 등을 통한 현장 감시는 징계와 고소의 대상이 됐다. 징계가 먼저 시작되고 그 결과에 따라 고소를 하기도 하고, 고소를 먼저 하고 그를 근거로 징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의 고소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면, 자리를 비웠다고 다시 새로운 징계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자꾸 싸움을 하면서 마음을 다쳐요. 부글부글 끓고, 막 열 받고 이런 것들이 나중에 증오로 바뀌고 그게 우울증으로 바뀌어버려요. 그게 계속 증오로만 있는 게 아니구요. (…) 당장 고소하면 경찰에 조사 받아야지, 검찰 조사 받아야지, 법정에 불려나가서 증언해야지, 거짓말 탐지기 해야지, 맨날 그러는데 그거 하면 기분이 또 확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또 우울증이 또 와요."
아산공장 노조 간부 A 씨의 말이다.
임금 차별도 횡행했다. 금속노조 조합원은 잔업 특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연히 월급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다. 심지어는 "잔업과 특근을 똑같이 어제 오늘 했는데, 오늘 꺼는 돈을 주고 어제 꺼는 돈을 안 주는" 황당한 일도 반복됐다.
명숙 상임활동가는 "노골적인 관리자의 권한 남용이었다"고 말했다. A 씨는 "경제적으로 월급 차이가 많이 나니까, 어용노조로 넘어가라고 집에서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싸웠는데 넘어가라고 하냐 이거 가지고 싸우다가 이혼해 버리는 부부들이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주변 관계까지 점차 악화…그들은 고립돼 가고 있다"
본인의 우울증 악화와 개선되지 않는 일터의 상황이 본인을 둘러싼 관계의 악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명숙 상임활동가는 "작업장 내에서 기업노조로 넘어간 동료들과 관계가 악화된 것 뿐만 아니라, 가족과 대화도 줄어들고 임금도 줄어드니 생계도 어려워지고 가족 관계도 파괴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족 관계뿐 아니라 다른 관계들도 드러나게 나빠졌다고 당사자들은 느끼고 있었다. 충남노동인권센터의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노조의 투쟁 이후 친지관계는 60.8%가 악화됐다고, 이웃관계는 58%가 나빠졌다고, 동료관계도 64.7%가 악화됐다고 대답했다. 장경희 씨는 "이는 유성 노동자들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 고립돼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노동자 개인의 정신건강과 각종 관계를 파괴하는 이런 직장 내 '괴롭힘'이 '범죄행위'라는 인식은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낯설다. 더욱이 이런 '괴롭힘'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이뤄지는 '가학적 노무관리' 속에 행해질 때, 해당 기업에 어떤 제재가 가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도 없다.
그러나 명숙 상임활동가는 "노조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괴롭힘, 가학적 노무관리는 그 자체로 부당 노동 행위"라며 "더욱이 가해 행위가 권력관계와 고용관계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기업에서 의도적으로 행했다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비판했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서울 시청 앞에서 농성 중이지만 회사는 "…"
한편,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는 고인의 사망 이후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분향소를 만들어 농성을 하는 동시에 회사 측에 세 차례나 특별교섭을 요구했다. 노조의 요구 사항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회사 측의 사과 △노조탄압 중단과 재발방지 약속 및 책임자 처벌 △노조탄압에 따른 정신건강 피해자 심리치료 △유가족 배상 등이다.
하지만 회사 측은 모두 거부하고 있다. 회사는 노조에 보낸 공문에서 "재직 중 직원의 일반적 사망은 내부 규정에 따르고, 별도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유가족과 협의 후 처리할 것이며 노조의 특별교섭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양 측의 입장 차이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한 씨의 장례 일정 역시 미뤄지고 있다. 노조는 회사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은 뒤, 한 씨의 장례절차에 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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