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따위란 없다. 오직 남자와 여자인 개인이 있을 뿐이다." "대안 따위는 없다."
대처가 내뱉은 이런 말은 '신자유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념으로 포장되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현실 사회주의가 참담한 민낯을 드러내며 속절없이 무너지면서(1989~1991년) 신자유주의에 더욱더 힘이 실렸죠. 덕분에 우리는 국가-기업-개인할 것 없이 뿌리째 신자유주의형으로 바뀌길 강요당했습니다.
그 끔찍한 결과가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긴 1997년 외환 위기입니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를 강타한 위기를 '제대로' 신자유주의에 투항하지 못한 후진국의 통과의례로 규정하며 비웃었던 제1세계(미국, 유럽 등)는 딱 10년 뒤(2008년)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글로벌 금융 위기'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은 이렇게 세계가 결딴날 위기에 처했는데도 정작 신자유주의의 힘은 약해질 줄 모른다는 것이죠. 이 땅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지도자는 여전히 대처를 추종하고, 그들을 욕하는 수많은 사람마저도 "대안 따위는 없다"고 되뇌며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도생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2015년 세밑에 나온 <섬을 탈출하는 방법>(조형근·김종배 지음, 반비 펴냄)은 바로 이런 답답한 상황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보려는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대안은 "있다"고 답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안은 "아주 많다"고요.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는 현실 사회주의,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 스웨덴 복지 국가 들처럼 인류가 실험해본 대안도 있고 사회적 경제, 기본 소득처럼 실험 중인 것도 있습니다. '참여 계획 경제'처럼 거친 구상만 있는 대안도 있습니다. 조형근 박사(한림대학교 연구교수)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면서 하나씩 그 대안을 점검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대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두 마디로 쉽게 평가하는 스웨덴 복지 국가의 역사 속에는 굶주림과 헐벗음에 지친 스웨덴 인민의 고통과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진보-보수 정치인의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현실에 뿌리내린 좀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려는 끝없는 시행착오와 고군분투가 있었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좀 더 치열해져야 할지 모릅니다. 2016년의 대한민국을 탈출하는 방법을 더 늦기 전에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죠. <프레시안>이 반비 출판사와 함께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먼저 읽은 이들의 독후감을 싣는 이유입니다. '복지 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 세 번째 독후감을 썼습니다.
책을 펴니 담긴 내용의 범위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1부는 지난 100여 년간 인류가 만들어낸 대표적 경제 체제들을 살펴본다. 지금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고찰, 좌우파 협력이 돋보이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 그리고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에 생명을 부여한 스웨덴 복지 국가까지.
조형근 교수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이윤 중심 시장 경제를 넘어서려는 인류의 다양한 시도들의 핵심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대담을 이끌어가는 김종배 시사평론가의 적절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도 책의 서술을 탄탄하게 해준다. 좋은 콤비다. 독자가 이 지점에서 '무엇을 묻고 싶을지'를 어쩌면 이리 잘 알 수 있을까. 이 책이 무겁고 거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단추를 하나씩 채워가듯이 흥미롭게 읽히는 까닭이다.
2부는 조형근 교수가 제시하는 대안들을 다룬다. 인간의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이 활약하는, 그래서 이윤보다 협력과 연대가 주축을 이루는 경제 모델이 소개된다. 아마도 10년 전이라면 우리에게 생소했겠지만,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어느새 주목받고 있는 시도들이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이크로크레디트 등 시장 이윤 논리를 넘고 싶은 사람들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영역이다.
책이 소개하는 기본 소득 역시 우리나라 녹색당이 당론으로 삼고 있으니 아직 발언권은 약하지만 씨앗은 자라는 중이다(한국에서 기본 소득이 적절한 대안인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 경제 시도들이 '작은 실험'이라는 지적을 의식한 듯, 책은 기존 사회주의의 계획 경제 원리에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참여를 결합한 '참여 계획 경제'라는 상상의 대안 모델을 마지막 장에 배치한다. 책은 2부에서도 앞으로 우리가 시도하고 상상할 수 있는 대안들을 망라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1부와 2부로 구성된 책 한 권을 읽으면 지난 100여년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또 어떤 모색을 벌일지를 전망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주요 경제 체제를 이해하고 현재를 넘어서려는 꿈을 가진 시민들에게 입문 교양서로서 제격의 책이다.
그러면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통해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전해 받았는가? 책은 대안 모델을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애초 제목에서 내가 느꼈던 우려대로이다. '탈출'은 섬을 벗어나는 데 방점이 찍힌, 긴급하고 임시적인 단어로 여겨진다. 독자로서 내가 기대한 건 섬을 탈출해서 정착할 안전한 땅에 대한 그림이다. 이 책은 탈출을 위한 시도를 소개할지언정 '이것이 그 땅이다'라고 확언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나의 판단이 가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경제 체제들이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미래의 대안은 '형성'되는 것 아닌가? 저자들이 거듭 강조하듯이 인간이 이기적이면서 또 이타적인 존재라면, 대안은 이타적 속성이 더욱 발휘되도록 하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책이 기존 경제 체제를 평가하고 미래의 대안 모델을 다룰 때마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정치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면에서 저자들은 분명 자신의 대답을 내놓고 있다. 협동과 연대의 경제는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어떤 경제 민주주의를 선보일지, 이타심이 발현되는 조건을 어떻게 구현할지에 따라 향후 사회적 기업도, 협동조합도, 심지어 참여 계획 경제도 다양한 모양을 띨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주체이다. 이윤 동기에만 종속되지 않기에 협동과 연대의 경험을 쌓는 무수한 실험, 시행착오를 거듭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지금 여기서' 어떻게 섬을 탈출하고, 어디에 정착할지를 시도하고 있다. 책이 다루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이 바로 그 역사적 실험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 절실한 건 경제적 총량의 확대보다는 경제를 운영하는 주체들의 진취적 참여이다. 대안 모델의 성패가 상호 호혜적 가치를 공유하고 이를 북돋는 참여 민주주의에 달려 있는 셈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시장 만능주의에 지치고 새로운 대안을 열망한다. 그만큼 조금씩 '함께 사는 경제 체제'가 뿌리내려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인류의 다양한 실험을 이해하는 입문서이면서 향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안내하는 실천서로서 꿈과 용기를 전해준다. 힘내자. 미래는 우리의 지치지 않는 발걸음을 기다리며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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