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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착취했나"

[주간 프레시안 뷰]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上>

이번 주와 다음 주 <프레시안 뷰>에서는 미국과 함께 향후 세계 패권을 놓고 겨루고 있는 중국의 군사엘리트는 미국의 위협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건 하나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할까 합니다. 지난 9월 초 2차 대전 전승 7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국가 주석은 병력 30만 명 감축 등 군사개혁 방침을 천명했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문건은 중국 군사개혁의 배경과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찾아낸 것인데요. 중국의 최고위 국방교육기관인 국립 국방대학의 교육주임인 차오량 장군(공군 중장)의 강연문입니다.

그는 대령 시절인 1999년 왕시앙수이 대령과 공저로 펴낸 <무제한 전쟁(Unrestricted War)>란 저서에서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값비싼 첨단무기의 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의 전략을 혼란시키며,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의외의 장소에서 적을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군사전략가입니다. 그는 올 여름 행한 이 강연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위협은 군사적이거나 지정학적인 것이 아니라 금융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즉 미국의 달러 패권으로부터 중국의 안정적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중국 군의 사활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 요체는 중국 주변에서의 위기 발생이 대규모 군사 갈등으로 번져 국제 자본이 중국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중국 주변의 정세 안정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에 따르면 미국은 1971년 달러의 금 태환을 포기한 이후 1973년 모든 석유 거래를 달러로 결제케 함으로써 달러의 국제 통화 지위를 지켰습니다. 나아가 10년의 달러 약세로 세계에 달러를 대거 풀었다가 달러 강세로 전환할 즈음 특정 지역에 위기를 초래해 해당 지역의 달러가 미국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막대한 금융 이익을 챙겼습니다. 차오량 장군은 미국이 (1971년 이후) '10년의 달러 약세, 6년의 달러 강세'라는 달러 가치의 순환을 통해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금융제국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1980년대 중남미의 외채위기,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바로 이러한 미국의 달러 조작에 의한 것이었으며 2012년에는 댜오위다오(센가쿠) 등 중국 주변에서의 지역적 위기를 통해 중국에 몰려든 막대한 국제 자본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다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도 중국 주변의 지역 위기 조장을 통한 중국 내 국제자본의 미국 환류를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차오량 장군은 미국이 향후 10년간은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피할 것이라면서 중국 군 내의 부패 척결을 비롯한 자체 정비, 사이버전쟁 등 새로운 군사 위협에 대한 대비 등을 강조합니다. 미국에 대해서도 대결이 아닌 협력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비트 코인과 같은 새로운 화폐의 등장으로 달러 패권에 의한 금융 이익 창출은 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 강연문은 이탈리아와 중국의 지정학 전문가들이 아시아, 유럽 및 미국 등의 정세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하트랜드(Heartland)>라는 웹사이트에 지난 7월 15일 게재된 것으로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One belt, one road)


왜 일대일로가 중요한가

1. 중국의 주변 환경과 미국의 달러 패권

1) 역사상 최초의 금융제국 탄생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금융전문가 등 경제 문제에 정통한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전략적 관점에서 말하고자 한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동(peg)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44년 7월,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세계 패권과 기축통화의 지위를 물려받기 위해 3개의 국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정치시스템으로는 유엔, 무역시스템으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나중에 WTO가 됨), 그리고 금융 및 재정 시스템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통화체계에서 달러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으로부터 27년이 지나는 동안, 즉 1971년에 이르러 미국의 통화 지배력은 금과의 연동 때문에 그 힘을 상실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시작될 당시, 미국은 달러의 지배력을 보증하기 위해 세계와 약속을 했다. 다른 나라의 통화들을 달러에 연동시킨다면 미국은 달러를 금에 연동시켜 그 화폐 가치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연동시킨다는 말인가? 금 1온스 당 35달러로 달러 가치를 고정시키며, (각국의 중앙은행에 대해) 35달러를 금 1온스와 교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와의 약속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달러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제멋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은 '35달러와 금 1온스의 교환' 약속을 지켜야 했고, 달러를 많이 찍어내 금 가격이 35달러를 넘어가면 그만큼 더 많은 금을 비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에 대해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 당시) 세계 금 비축량의 80%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은 미국의 소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개입해 엄청난 재원을 낭비한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만 투입한 전쟁 비용이 자그마치 8000억 달러에 이른다. 전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미국은 달러-금 태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미국의 약속대로라면 35달러로 금 1온스를 살 수 있어야 했으나 달러의 남발로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금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1971년 8월 미국의 금 보유량은 8800톤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심각한 재정 및 금융위기에 빠졌고,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곤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례로 (1960년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자국이 보유한 달러(22~23억 달러) 모두를 금으로 바꿔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도록 중앙은행에 명령했다. 드골은 미국은 '달러 가치 안정' 약속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금 태환을 요구하자 다른 나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달러를 원치 않소, 금으로 바꿔주시오'라고 미국에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금 태환 약속을 파기했다. 달러와 금의 연동이 끊어진 것이다. 이로써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탄이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앞으로의 국제금융 체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달러를 신뢰했다. 달러는 지난 30년 가까이 국제 결제 및 기축통화로서 이용돼 왔기 때문이었다. 달러의 가치가 (미국 정부의) 보유 금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달러는 한낱 푸른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금으로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달러를 계속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달러를 국제통화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달러 대신 국가 간에 교역되는 재화의 가치 결정과 결제 역할을 할 마땅한 다른 국제통화가 없다는 문제다. 화폐란 가치 측정의 수단인데, 만일 달러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다른 나라의 통화를 신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중국과 러시아가 무역을 할 때 양국이 상대방의 통화인 루블, 또는 위앤을 결제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는 달러를 결제수단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달러는 30년 가까이 이어져온 국제 관행에 따라 국제통화로 쓰이게 됐다. 나아가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미국은 석유 수출 국가(OPEC)들에 대해 향후 모든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전까지 국제 석유 거래에는 여러 통화가 사용되었지만 1973년 10월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OPEC은 국제 석유 거래의 결제에는 오직 달러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동을 폐기한 후에 달러를 가장 핵심적 자원인 석유에 연동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달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석유라는 에너지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라는 점을 미국은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든 에너지가 필요하고, 모든 국가가 석유를 필요로 한다. 즉 (달러와 석유가 연동됨으로써) 누구나 석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모두가 달러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 된 것이다. 달러를 석유 거래 결제에 연동시킨 것은 미국의 매우 영리한 책략이었다. 1971년 달러와 금의 연동이 폐기되고 1973년 달러가 석유 거래에 연동됨으로써 미국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1971년 달러-금의 연동 폐기

많은 경제학자, 금융전문가들은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 또는 소련의 붕괴가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와 금의 연동 폐기다. 그 이후 인류는 금융제국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이 금융제국은 자신의 금융시스템 안에 모든 인류를 가둬놓고 있다. 이른바 달러 패권은 바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이 금융시스템은 40년을 넘기고 있다. 1971년 이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종이 화폐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국제 화폐인 달러가 금 등 귀금속의 보장 없이 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오로지 미국 정부의 신뢰도, 그리고 이 체제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국가와 개인들의 지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미국은 푸른색 종이(지폐)를 찍어냄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물질적 부를 획득하게 됐다. 이런 상황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윤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외환 거래, 금과 은의 거래, 또는 전쟁을 통한 약탈 등이 있다. 그러나 전쟁 비용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러나 그저 지폐에 불과한(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로 사용되는) 달러가 등장함으로써 미국은 아주 수지맞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달러와 금의 연동이 파기됨으로써 미국은 마음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마구 찍어낸 달러가 미국 내에 머물러 있다면 심각한 인플레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반면 달러가 해외로 유출된다면 세계 전체가 미국이 짊어져야 할 인플레의 짐을 나눠 갖는 셈이 된다. 미국의 인플레가 그다지 높지 않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미국 달러의 해외 유출이 국내 인플레를 희석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미국 정부가 (필요 자금 충당을 위해) 달러를 계속 찍어낸다면 달러 가치는 하락할 것이며 이는 미국에 좋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준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러를 찍어내지는 않는다. 사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달러 발행에 관한) 여러 제한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창립 이후 지난 100년간(1913~2013) 연준은 모두 10조 달러를 발행했다.

이와 비교하여 일부 사람들은 중국 중앙은행을 (통화 발행량이 너무 많다고) 비난한다. 왜 그런가? 중국 중앙은행은 1954년 신화폐(렌민비: 人民幣)를 발행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120조 위앤을 발행했다. 미 달러와의 환율 6.2를 적용하면 약 20조 달러가 된다. 이처럼 발행 액수가 많다고 해서 중국이 미친 듯이 화폐를 남발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말)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은 엄청난 액수의 달러를 벌어들였고 또한 많은 금액의 달러가 직접 투자의 형태로 중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환 통제를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달러가 원래 형태로 중국에서 유통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달러나 다른 외환을 보유하는 대신 그 가치에 상응하는 렌민비를 발행한다. 물론 외국인 직접투자는 그들이 중국에서 돈을 번 후 자유롭게 국외로 반출할 수 있다. 또한 중국으로서는 외국에서 자원, 에너지, 상품, 기술들을 수입하기 위해 외환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상당액의 달러는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렌민비는 중국 국내에 남는다. 국내에 유입되는 외환 액수에 해당되는 렌민비를 그냥 없애버릴 수는 없다. 중국 내에서 유통되도록 남겨놓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렌민비의 규모가 달러보다 커지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지난 30년간 중국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 중앙은행은 최근 수년간 아마도 20조 위앤 이상을 발행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대부분은 중국 내에 머물러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렌민비의 국제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2) 달러 가치의 순환과 세계경제와의 관계

미국이 인플레를 겪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달러를 전 세계적으로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도 달러를 무한정 발행할 수 없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러 발행을 조절해야 한다. 달러 발행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달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 경우 미국은 어떻게 달러를 확보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있다.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해 외국에 나가 있는 달러를 미국으로 다시 끌어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달러가 부채 형태로 미국으로 되돌아올 때, 미국은 새로운 수법을 동원한다. 한쪽에서는 달러를 찍어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달러를 빌리는 것이다. 돈을 찍어내도 돈을 벌고 돈을 빌려도 돈을 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제조업 등) 실물경제보다 금융을 통해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고된 땀을 흘려가며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업이나 가공업을 하려 하겠는가? 1971년 8월 15일 이후 미국은 점차 실물경제를 포기하고 가상경제(virtual economy)로 옮겨갔다. 오늘날 미국 GDP는 연간 18조 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실물경제 몫은 5조 달러가(27.7%) 채 안 되며 나머지는 가상경제에서 창출된 것이다. 미국은 채권 발행을 통해 해외의 달러를 미국으로, 더 정확하게는 다음 3개의 자금시장으로 불러온다. 선물시장, 채권시장, 주식시장이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국 달러는 달러를 버는 황금알이 된다. 미국과 해외를 순환하면서 이윤을 남기며 이를 통해 미국은 금융제국이 된 것이다. 미국은 세계 금융시스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영 제국의 몰락 이후 식민지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 금융제국이 된 이후 달러를 은폐된 '식민지적' 팽창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달러를 통해 각국 경제를 통제하며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자신의 금융 '식민지'로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에는 중국을 비롯해 주권을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있다. 이들 국가들은 주권과 함께 독자적 헌법과 정부를 가지고 있지만 달러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부는 달러로 표시되며, 이렇게 달러로 표시된 물질적 부가 외환 거래를 통해 미국을 드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미국 달러의 금융 식민지

지난 40여 년간 달러 가치의 변동을 통해 이러한 실상을 명확히 볼 수 있다. 1971년 8월 15일 달러-금 연동이 폐기됨으로써 금의 족쇄에서 벗어난 미국은 마음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달러 유통량은 늘어났고 자연히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1971년 이후 특히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이는 미국이 달러를 많이 발행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10년 가까이 지속됐다. 달러 가치의 하락이 세계 경제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달러의 공급이 늘어났고 이는 유동자본의 증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유동자본의 대부분은 미국 내에 머물지 않고 대부분 외국으로 나갔다. (1970년대에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대규모 자본이 라틴아메리카로 갔다. 이에 따라 중남미는 투자가 늘어났고 번영을 누렸다.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붐은 이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다.

달러 홍수의 시대는 약 10년간 지속됐다. 1979년 미국은 달러의 수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달러 가치가 낮다는 것은 미국이 달러 저수지의 수문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수문을 닫는다는 것은 달러 유동성이 감소되는 것을 뜻한다. 1979년 달러 가치가 상승했고 외국으로의 달러 유출도 줄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는 많은 금액의 달러를 받아들여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달러 수문이 닫히면서 갑자기 투자가 줄어들었고, 유동성이 고갈됐으며, 경제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곤경이 시작되자 각 나라들은 탈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보자. 당시 아르헨티나는 1인당 국민소득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있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는 가장 먼저 침체에 빠졌다. 경기 침체의 해결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였고 갈티에리 대통령은 경제에는 문외한이었다. 군인인 갈티에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해법은 오직 하나, 전쟁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본토에서 600km 떨어진 말비나스제도(영국명 포클랜드 제도)를 영국으로부터 탈환하려 했다. 갈티에리는 지난 100년간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해온 말비나스가 아르헨티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남미의 국가다. 따라서 미국의 뒷마당에서 전쟁을 하려면 우선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갈티에리의 측근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의중을 떠보았다. 레이건은 말비나스를 탈환하려는 갈티에리의 계획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양자 간 문제이며 미국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 우리는 중립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갈티에리는 이를 미국의 묵인으로 받아들였고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켜(1982년 4월 2일) 손쉽게 포클랜드를 되찾았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국민들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대처 당시 영국 총리가 반발했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레이건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중립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아르헨티나의 행동은 침략에 해당된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영국 편을 든 것이다. 이후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항공포함을 파견해 포클랜드제도를 회복했다.

그동안 달러 가치는 상승하기 시작했고, 국제 자본은 미국의 소망대로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투자자들은 즉각 결론을 내렸다. 라틴아메리카에 지역적 위기가 발생했고 따라서 이 지역의 투자 환경이 악화되고 있다고. 하나 둘, 투자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투자금을 회수해 갔다. 그 순간 미 연준은 미국 금리의 인상을 발표했다. 미국 금리의 인상이 발표되자 라틴아메리카에서 회수된 투자금이 갈 곳은 뻔해졌다. 미국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폐허가 됐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철수한 자본은 거의 모두가 미국의 3대 자본시장(채권, 선물, 주식)으로 향했고 미국은 (1971년) 달러-금 연동 폐기 이후 최초의 호황을 맞았다. 달러 환율은 60포인트, 그 다음에는 한번에 120포인트가 올라 100% 이상 상승했다. 미국의 3대 자본시장은 돌아온 달러를 그냥 갖고만 있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로 몰려가 경제위기로 헐값이 돼버린 고급 자산들을 대거 사들였다. 이렇게 해서 라틴아메리카 경제를 다시 한 번 약탈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달러 강세가 일으킨 상황이다.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났다면 우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종의 의도된 결과, 정형화된 사례임에 분명하다. 첫 번째 달러 가치의 순환 사이클-10년의 달러 약세와 6년의 달러 강세-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금융위기의 절정기 이후 1986년부터 달러 가치는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금융위기(1990년)와 유럽의 통화위기(1992년)가 있었지만 달러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약 10년이 지난 후인 1997년 달러가 다시 강세로 돌아섰다. 이번에도 달러 강세는 6년간 지속됐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달러 가치의 하락과 상승이 동일한 패턴을 보인 것이다. 10년의 약세, 6년의 강세, 그리고 다시 10년의 약세, 6년의 강세.

지역 위기 조장, 달러의 미국 환류, 금융 이익 획득

1986년 이후 달러는 두 번째로 약세로 돌아섰다. 이후 10년 동안 달러는 홍수처럼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번에 달러의 홍수가 밀려간 곳은 아시아였다. 1980년대에 가장 유행했던 말이 무엇인가? "아시아의 4마리 용" "아시아의 기러기 대열(일본 경제의 선도 하에 동아시아 경제가 발전했다는 뜻)" 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시아의 번영이 부지런하고 똑똑한 노동자, 그리고 탁월한 사업가적 기질 덕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대대적 투자가 가능할 만큼 충분한 달러가 아시아 국가들에 유입됐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경제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미국은 이제 그 과실을 수확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1997년까지 만 10년 동안 달러 가치는 약세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달러 공급을 줄임으로써 달러 약세를 강세로 전환시켰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 기업들, 그리고 산업들은 심각한 유동성 부족을 겪었고, 일부는 파산했으며 아시아에 경제 및 금융 위기의 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주전자 속의 물은 9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1도만 더 올리면 물은 끓을 터였다. 그 1도를 위해서 (포클랜드전쟁과 같은) 지역적 위기가 필요했다. 반드시 전쟁일 필요는 없었다, 전쟁이 지역적 위기를 촉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목표는 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을 철수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전쟁 없이도 지역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소로스와 같은 금융투기꾼, 그가 운영하는 퀀텀 펀드, 전 세계의 수 백 개 헤지 펀드들이 마치 굶주린 늑대 떼처럼 아시아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태국의 바트화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트 위기가 시작된지 약 1주일 만에 위기의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남쪽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덮치더니 다음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 타이완, 홍콩, 일본, 한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위기가 퍼져나갔다. 동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물은 끓기 시작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아시아의 투자 환경이 악화됐다고 결론 내리고 아시아로부터 자본을 빼내갔다. 기회를 잡은 미 연준은 금리 인상의 나팔을 불었다. 아시아에서 철수한 국제 자본은 다시 미국의 3대 자금시장으로 물려들었고 미국 경제는 두 번째 대호황을 누리게 됐다. 충분한 자금을 끌어 모은 미국은, 이전에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로 돌아와 헐값이 돼버린 고급 자산들을 대거 사들였다. 이것으로 아시아 경제는 재기의 힘을 잃어버린 채 완전히 무너졌다. 오로지 중국만이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탓이다.

3) 다음은 중국 차례

이후 6년간의 강세 끝에 2002년부터 달러는 약세로 돌아섰다. 이전의 패턴을 정확히 반복한 것이다. 미국은 10년이 지난 2012년부터 달러 강세로의 전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한 것이었다. 지역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2010년의 천안함 침몰, 이후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와 황유안(스카보로) 등 중국 인근 해역에서의 중국-일본, 중국-필리핀 간의 영토분쟁이 그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이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아주 재수 없게도 2008년 국내에서의 불장난으로(주택담보 불량 금융대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달러 강세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필리핀, 중국-일본 간의 영토 분쟁이 달러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도대체 3번째 달러 약세가 끝나가는 시점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야말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사안이다.

만일 우리가 1971년 달러-금의 연동 폐기 이후 달러 가치의 변화에 일정한 순환 패턴이 있었고, 미국이 이 패턴을 이용해 다른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면서 막대한 금융 이윤을 얻어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차례는 중국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 그런가? 중국은 매력적인 국제 투자처로 중국 경제에 낙관적 전망을 가진 국제 투자자들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법칙의 관점에 보자면, 중국은 국가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다. 현재 중국의 경제 규모는 라틴아메리카 경제 전체보다도 크며 동아시아 경제의 절반에 해당된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엄청난 자금이 중국에 몰려들어 중국 경제는 눈부신 속도로 성장하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볼 때, 미국이 중국을 3번째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상과 같은 평가가 정확한 것이라고 한다면, 2012년 이후 중-일 간의 댜오위다오 영토분쟁, 중국-필리핀 간의 황유안 영토분쟁, 그리고 지난해 '981 광구'를 둘러싼 중국-베트남 영토 분쟁과 이후 홍콩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인근 지역에서 분쟁과 소요가 잇따라 발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순전히 우연일까? 지난해 5월 나는 국립국방대학의 정치주임인 류야조우 장군을 모시고 홍콩을 연구차 방문한 바 있다. 당시 이미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달아오르고 있었고 5월말에는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월말, 시위는 시작되지 않았다. 6월말, 7월말, 8월말에도 시작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달아오르고 있었던 민주화 시위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다른 사안과의 일정표를 비교해보자. 미 연준의 양적 완화(QE) 종료 시점이 그것이다. 지난해 초, 미국은 양적 완화 종료를 예고했다. 그러나 4월, 5월, 6월, 7월, 8월이 지나도록 미국은 양적 완화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다. 미국이 양적 완화를 종료하지 않았다는 것은 달러를 더 많이 발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는 달러가 강세로 돌아설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홍콩의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댜오위다오, 황유안, 981 광구, 그리고 홍콩 민주화시위 등 4개 사안은 하나 하나가 폭발적 사안들이다. 이중 하나라도 위기로 발전한다면 동아시아의 지역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고, 중국을 둘러싼 지역의 투자 환경은 악화된다. 그렇게 된다면 달러 패권에 의한 금융 수입 모델의 기본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켰을 것이다.

"달러 가치가 상승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위기가 발생한다. 위기 발생으로 투자 환경이 악화되면 그 지역의 대규모 투자가 그곳을 떠나 미국으로 몰려든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불운하게도 이번에는 중국을 상대로 해야 했다. 중국인들은 태극권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주변 지역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결과는 미국이 원했던 상황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물의 온도를 99도까지는 올렸지만 마지막 1도를 올리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물은 아직 끓어오르지 않고 있다.

▲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한 학생. 최루가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 몸을 비닐로 감쌌다. ⓒAP=연합뉴스

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물이 끓지 않는다면 미 연준은 금리를 인상할 수 없다. 아마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금융 이윤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미국은 홍콩의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을 은밀히 지원하는 한편 다른 지역에서 위기를 조장하는 공작을 시작했다. 어느 곳인가? 우크라이나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만나는 곳, 우크라이나다.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통치했던 우크라이나는 그 자체로는 썩 좋은 먹잇감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국에 순종하지 않는 야누코비치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관계 강화를 막을 수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유럽의 투자 환경이 나빠질 터였다(그리하여 유럽을 떠난 자본은 미국으로 올 터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은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는 외견상 시민들의 자발적 '색깔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미국은 자신은 물론 지구 상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성과를 얻어냈다.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합병해 버린 것이다. 푸틴의 크림 합병은 미국의 당초 계획에 없었던 것이지만 미국은 이 기회를 낚아챘다. 유럽연합은 물론 일본에 압력을 가해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유럽 경제도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됐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1조 달러 유럽에서 이탈

미국은 왜 이런 일들을 해야만 했을까? 대체로 사람들은 (국제 문제를) 자본의 관점보다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의 대유럽, 대미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는 유럽의 투자 환경을 악화시켜 대규모 자본 이탈을 초래했다. 통계에 따르면 1조 달러 이상이 유럽을 떠났다고 한다. 미국의 양면 전략(동아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지역 위기 조장)이 성공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 머물고 있는 국제 자본을 미국으로 끌어올 수는 없었지만 유럽의 국제 자본을 끌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극적인 상황 변화로 유럽의 국제 자본을 이탈시키는 데까지, 즉 1단계는 성공했지만 2단계는 미국의 소망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통계에 따르면, 유럽을 탈출한 국제 자본이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 투자자들이 아직 미국의 경기 회복 전망을 낙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최근 들어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긴 하지만 중국 경제에 더 큰 희망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이상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지다. 두 번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상하이와 홍콩 주식시장의 연계 계획을 발표했다. 두 주식시장의 연계를 통해 국제 투자자들의 중국 투자를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과거 서방 자본은 감히 중국 주식시장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강력한 외환 통제로 자금 회수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국제 자본이 중국에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제 투자자들은 중국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를 꺼렸다. 그러나 상하이와 홍콩의 주식시장이 연계됨으로써 홍콩을 통해 상하이 주식시장에 투자해 돈을 번 다음에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됐다.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이 시작된 지난 해 9월 이후 홍콩에 몰려든 국제 자본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한 지역 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홍콩에 몰려 있는 국제 자본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 이윤으로 먹고 사는 미국

미국 경제가 국제 자본의 흐름에 그토록 크게 의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971년 8월 15일 달러-금의 연동 폐기 이후 미국 경제가 실물 생산, 그리고 실물 경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저부가가치의 제조업 등 실물경제를 쓰레기산업, 또는 사양산업이라고 부르며 이들 제조업 등을 개발도상국, 특히 중국으로 이전시켜 왔다. 나아가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이른바 첨단산업 부문을 빼놓고는 일자리의 70%를 금융 및 금융서비스 부문으로 옮겼다. 이제 미국은 제조업 등 산업 부문이 공동화됐으며 국제 투자자들에게 큰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실물경제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미국은 경제의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바로 가상경제다. 가상경제는 3개의 시장을(선물, 채권, 주식) 갖고 있다. 국제 금융 자본이 이 3개의 시장에 머물러 있는 한 미국은 이윤을 창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창출된 막대한 이윤으로 세계를 상대로 바가지 씌우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또는 이를 '미국적 생활방식'이라 부를 수 있겠다. 미국인의 일상적 생존과 미국 경제의 유지를 위해 미국은 대규모 자본의 미국 회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본의 미국 회귀를 막는 모든 것들은 미국의 적이다. 우리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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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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