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의 도시!
강렬한 햇살만큼 눈부시고 자유로운 도시 프라하!"
프라하의 카를교를 걷는다.
작은 다리 위에 사람이 가득하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관광객들. 어떻게든 좋은 각도로 사진을 찍어보려고 '이쪽으로' '거기, 거기 그래!', 가득한 사람들 틈을 지나가다 보면 'Sorry! It's ok! No problem!', 그 외에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언어들이 뒤섞여 물결친다. 이 인파와 함께 호흡하는 거리의 악사들. 캐리커처를 그리는 사람들. 강렬한 태양이 남기고 간 카를교의 석양과 유럽 최대의 야경을 가진 프라하의 밤거리를 즐기기 위해 사람과 소리가 한데 엉켜 그야말로 바글바글 왁자지껄하다.
빈틈없이 채워진 카를교 위에서 유일하게 빈 공간을 만들며 한 쌍의 남녀가 깊고 긴 키스를 한다. 이 온 우주에 마치 그 둘만이 존재하는 듯 그렇게. 어느 다른 행성에서 지구에 막 도착하여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발하는 빛나는 하이라이트와 땅을 밀어내는 막강한 바람처럼 그렇게 수많은 인파를 밀어내고 작은 다리 위에 서서 반짝이는 빛을 만들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는 그 순간, 둘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배경 화면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잠시 얼음으로 만들면서 어느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던 둘의 키스가 끝나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냉동에서 해동된 듯 쉬엄쉬엄 움직여서 공간을 채워나간다.
유통 기한을 가진 인스턴트 사랑이 아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의 품으로 돌진하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오버랩되며 열정과 사랑 그리고 자유로움이 왜 프라하에서 발현되는지가 단 하나의 장면으로 가슴에 들어온다.
이렇게 강렬한 태양만큼 뜨거운 사랑의 현장인 카를교를 지나 프라하의 밤 도시를 배회한다.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인지 자유로움을 만끽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광장에 모인 젊은이들의 국적도 다양하다. 독일 남자, 폴란드 여자, 프랑스 커플. 보헤미안의 도시답게 집시들의 공연이 이어지는가 하면, 위험해 보이는 유리 조각 위를 걸어다니는 마술쇼와 입안 가득 기름을 물고 불을 뿜어내는 불쇼도 환호와 함께 계속된다. 밤이 늦도록 젊은 열기로 가득 찬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강렬한 태양만큼이나 뜨겁고 활기찬 열정의 도시이다.
그러나 이런 열기가 단순한 열정과 자유가 아닌,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일컬어지는 잠깐의 자유만을 허락받았던 아픈 과거 때문에 어쩌면 더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펴냄)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남녀의 사랑을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대비하여 표현한 명작이다. 인간의 자유와 억압에 대해 본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헤치며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무엇이 진정한 존재의 가벼움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되묻는다.
체코 끝자락의 이름 모를 소도시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길.
오스트리아와 국경이 인접한 곳인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큰 호수가 있는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숙소를 잡는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사람들이 호숫가의 여유로움을 즐긴다.
한적한 여유와 체코의 순박함이 좋아서 그곳에서 하루이틀 더 머물다 가기로 한다. 수도 프라하와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시골 동네에는 가게라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쿱(coop)이 전부다. 간판 하나 없이 동네 창고처럼 생긴 가게지만 매장 안의 물건들은 생명 존중의 냄새가 물씬 난다. 물질의 풍요를 뛰어넘어 상품 폭탄처럼 느껴지는 대형마트의 거추장스러움 따윈 전혀 없다. 필요한 물건들이 소박하게 진열장에 다소곳이 놓여있다. 향이 살아 있는 허브잎과 작은 소금 봉지를 샀다. 둘을 섞은 허브 소금은 왠지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듯하다.
그렇게 장을 보고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담이 무너지면 무너진 채로 잡초가 자라면 자라난 채로 그대로 두었다. 단정하지 않지만 자연스러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시골 어린아이의 빨갛게 튼 볼처럼 체코의 속살을 보는 듯한 행복감이 감돈다.
햇살 좋은 호수에서 종일 수영하는 사람들과 서핑하는 사람들, 선탠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캠핑장의 호프에서 만난 웨이터는 인상 좋고 잘생긴 얼굴로 밝게 웃으며 윙크를 보낸다. 더운 날씨 탓에 웃옷도 벗은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나와 애들은 가슴이 콩탕거린다. 우리와 어느덧 친해져서 카드도 치고 사는 얘기도 조금 나눈다. 열심히 일하지만 생활은 여의치 않은 듯 왠지 웃음에 우수가 머문다. 맥주 한두 잔과 주스 한두 잔 마시는 가벼운 손님이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칩과 칵테일까지 상상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술값은 기껏해야 1만5000원 정도인데 술값과 비례하지 않는 서비스는 시골의 인심과 정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다. 우리도 괜한 호기를 부리며 술값에 버금가는 팁을 주고서도 아쉬움이 남아 발걸음을 늦춘다.
물질 문명의 허세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 순박함과 애틋함이 남아있는 체코의 시골마을과 사람들이 너무 좋다. 아직도 우리는 그 웨이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나비슬랍. 이름도 모르는 그 마을 캠핑장에서 아직도 나비슬랍이 일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두브체크에 의해 촉발된 이 개혁의 내용은 재판의 독립, 의회 제도의 확립, 사전 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 제도의 창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등이다. 두브체크는 이런 개혁 조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했는데, 언론·집회·출판 등이 자유화되면서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에 의해 개혁은 저지되고 체코는 다시 예전의 통제와 억압의 상황으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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