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지나 벨기에로 향한다. 유럽연합(EU)은 하나의 통화를 사용하는 경제공동체이지만, 각 국가별 문화와 삶의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를 떠나 벨기에 영토로 들어오자마자 도로가 확 다르다. 고속도로가 군데군데 심하게 파여서 타이어 펑크나는거 아닌가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왜 이렇게 고속도로 관리를 안하지?' 주유하러 국경에서 가까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본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체구도 작고 행색도 초라하다. '프랑스와 너무 다른데….'
오후 4시쯤 브뤼셀에 도착했다. 이렇게 일찍 도착하면 숙소를 잡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내에서 가까운 캠핑장을 검색해서 찾아간다. 내비게이션의 정보가 잘못된 건지 캠핑장이 없다. 다른 곳을 검색해서 또 찾아간다. 이 곳은 캠핑장이 폐쇄돼 있다. 안쪽에 사람이 있는 듯 해서 들어가서 물어보니, 일반인은 캠핑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10km 남짓 떨어진 옆 동네를 가르쳐준다. 묻고 물어서 그곳을 찾아갔다.
리셉션 데스크가 있는데 사람이 없다. 한참 기다려도 열릴 기미가 안 보인다. 캠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길래 이야기했다. '우린 전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 연락을 좀 해달라.' 전화 통화에서 잠시 후에 오겠다던 사람이 오질 않는다. 고즈넉한 풍경과 한가로이 떠다니는 오리와 거위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캠핑장 근처를 둘러본다. 여기저기 모바일 홈처럼 생긴 캐빈(오두막)이 여러 개 있는데, 빨래의 상태나 캠핑장비의 상태가 장기 투숙하는 사람들 같다. 하루씩 머무는 여행객 같아보이진 않는다. 오기로 한 시간을 한참 넘겨도 사람은 오지 않고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잘 수 없을 듯하다.
아무래도 브뤼셀 근처에서 캠핑장을 찾아서 숙소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브뤼셀 시내로 이동해서 중저가 호텔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중저가 숙소인 '이비스' 등을 검색해서 찾아가본다. 아뿔싸, 빈 방이 없단다. 주말도 아니고 유명관광지도 아닌데 말이다. 거기서 가보라며 호텔 하나를 가르쳐줬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호텔이다. 우리는 가족 룸을 원한다고 했더니, 가족 룸은 없고 방 2개를 사용해야 한단다. 우린 아이들이 어려서 방 1개면 된다며 다소 읍소하는 분위기로 사정을 했다. 근엄하게 생긴 호텔 지배인이 말했다. "마담! 이것은 법입니다. (Madam, It's the law!)"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법이라는데 어쩌겠는가? 돌아서 나오는데 속상한 마음과 울컥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그럴싸한 호텔이라 방값도 비싼데 2개나 얻어야 한다니 말이다. 돈도 돈이지만, 가족 룸이 없다면 근처 가족 룸이 있는 다른 곳을 안내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근엄한 자세로 아랫사람 내려다보듯 하며 4명이라서 방 2개를 잡아야 한다는 원칙만 얘기할 뿐 다른 정보를 알아봐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법이라는데,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까지 싹 사라졌다.
다른 도시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숙소잡고 여유롭게 저녁을 보내야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어이가 없었다. 벌써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휴대폰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만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내비게이션으로 정보를 찾아 숙소를 정하는 것도 사실상 실패한 셈이다. 막막했다. 브뤼셀 수도로 들어올 때 고속도로 상에서 본 기억이 나는 도시 근처의 숙소가 생각났다. "거기라도 가보자. 설마 그곳도 없겠어? 안되면 방을 2개 잡아야지"하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족 룸은 없고, 방을 2개라도 잡겠다고 말하자 잠시만 기다리라며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더니, 우리에게 메모장 하나를 건네준다. 그곳에 가면 가족 룸이 있다고. 친절한 아저씨의 메모를 들고 찾아간 곳은 술집과 함께 운영하는 자그마한 리조트였고, 적당한 가격의 가족 룸이 있었고 방에 들어가니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캠핑장을 찾기 위해 브뤼셀 근교를 한참 헤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유럽 어디에서도 이렇게 캠핑장이 없는 도시를 본적이 없다. 어느 곳이나 도심 안은 아니라도 도심 근교에 크고 작은 캠핑장이 많았었다. 벨기에처럼 검색해서 찾아가는 곳마다 캠핑장이 폐쇄되거나 없어진 나라는 없었다. 사람들이 캠핑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반면에 브뤼셀 수도에는 수많은 호텔들이 있다.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곳이라서 그렇겠지만, 그 많은 숙소가 하나같이 상당히 비싸다. 우리 같은 장기여행자가 머무르기에는 턱없이 비싸다. 왜 그럴까?
이런 의문은 처음 브뤼셀로 들어올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도 브뤼셀로 들어가는데 외곽이 슬럼가처럼 볼품없다. '수도가 왜이래' 하며…. 그런데 수도 근교의 옆 도시로 가면 모두 전원주택이고 정원도 잘 정돈되어 있다. '벨기에, 참 이상하다. 수도는 볼품없는데, 근교 소도시는 너무나 단정하다. 겉모습은 허술해도 속이 알찬 그런 면모?' 이렇게 갸우뚱하며 시내 구경을 나갔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는데 거지들이 곳곳에 앉아있다. 그것도 애들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아픈 아이들을 앞에 앉혀놓고 구걸을 하거나 아이들을 보내서 구걸을 한다. 우리가 지나가는데 6살쯤 되어 보이는 아랍계 아이가 돈을 달라고 구걸한다. 50센트를 줬더니 계속 쫓아오며 더 달라고 보채는데, 얼굴에 제법 똘똘함이 묻어있다. 한편으론 영악스럽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만 하다.
이런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왕궁과 시청 건물이 있다. 우리도 이 건물 저 건물 사진도 찍으며 배회하는데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시청 견학을 온 듯하다. 선생님의 인솔을 받으며 유치원 원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다. 인솔자가 시청 건물 구석구석을 역사적 사건과 결합하여 설명하고 몇 가지 질문도 한다. 병아리같은 아이들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또박또박 답변한다.
왠지 어색하다. 아까 올라오는 길에서 구걸을 하던 어린애와 시청 견학을 하는 아이들. 같은 나이인데도 한 아이는 구걸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역사를 배운다. 왜 한 사회의 같은 일원이, 그것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들마저도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있을까.
벨기에는 세계 상위권에 속하는 소득 수준을 기록한다. 충분히 아이들 교육은 잘 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상당한 빈부 격차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자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과 이민자나 잠시 체류하는 이방인들에게 적용되는 혜택이 같아보이진 않는다. 특히, 벨기에에 많이 살고 있는 아랍인과 흑인들에게는 말이다.
벨기에, 진짜 오묘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벨기에는 역사적으로 때론 네덜란드에 속해있었고, 한때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주변 강대국들에게 지배를 받아서인지 언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이렇게 지배를 받았던 벨기에가 반대로 자신들이 침략전쟁을 통해 획득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즉, 그들은 아프리카의 콩고와 르완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수탈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역사 또한 가지고 있었다. '고무테러'를 통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을 마구자비로 학살해서 콩고 국민의 거의 절반이 이때 학살되었다고 한다. 르완다에는 종족간의 내전을 조장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내전으로 피해를 입은바 있다.
그래서 일까. 벨기에는 유럽연합이 있는 사실상 유럽의 수도라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3개 강대국에 눌려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웅크려서 겁먹은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의 옹색함이 존재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 수탈의 역사와 함께 여전히 그들보다 약한 아랍계 이민자나 흑인들인 저소득층에게까지 복지 혜택을 골고루 적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강대국답게 자유로움이 있고, 독일은 게르만 민족다운 우람함과 친절함이 있고, 네덜란드는 선진국다운 세련됨이 있는데, 벨기에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가온가람이 가족 세계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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