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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사이에 생선 하나, 생선 햄버거 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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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사이에 생선 하나, 생선 햄버거 맛은…

[온 가족 세계여행기]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한껏 세련된 미래도시 같지만 사람들의 무례함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네덜란드를 출발해서 동유럽의 체코와 헝가리로 가기 위해 다시 독일로 들어간다.

독일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햄버거로도 유명한 함부르크다. 항구 도시인데도 깨끗하고 도심에 있는 커다란 호수는 고즈넉하기 그지 없다. 우리가 가는 날부터 며칠간 계속 비가 추적거리며 내린다. 그래서 더 운치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다소 쌀쌀한 공기까지 더해지자 도시는 차분해 보인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곳인 미니어처 원더랜드(Miniature Wonderland)로 향한다. 아주 세밀하게 하나하나 공을 들여 여러 층에 걸쳐서 미니어처를 만들어 놓았다. 처음 들어간 곳은 독일과 함부르크의 역사관으로 시대별 특징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는데,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우리도 감동적인데, 그들은 오죽하겠는가? 시대적 변천에 따라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사건의 장면과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이런 미니어처를 보며 그 시대적 배경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시대별 상황을 차근차근 제작했다는 짧은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비돼 속상하다.

사람은 어느 날 하늘에서 한순간 뚝 떨어진 존재도 아니고 마술처럼 짠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현재 발을 밟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미래를 대비한다는 면에서도 정말 중요하다. 독일은 1, 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 독재, 그리고 분단과 통일의 과정에서 그들의 과오를 충분히 검토했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여러 번 사과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잘못을 청산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미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들의 이런 역사 인식의 노력을 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친일을 찬양하는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역사까지도 기득권의 이해에 맞게 왜곡하려는 이런 시도들이 독일의 상황과 대비되며 씁쓸함이 남는다.



함부르크의 원 발음은 햄버그이다. 도시 이름과 동급인 최대 명물 햄버거를 안 먹어볼 수는 없다. 미니어처 원더랜드를 가는 길에 항구 옆 자그마한 햄버거 가게에 들렀다. 유명하지도 않고 빵 사이에 비린내 날 것 같은 생선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는 특별히 볼품 있어 보이지 않는 햄버거 가게다. 그런데 먹어보니 정말 맛이 있다. 비린내는커녕 담백한 생선과 고소한 빵의 조화가 일품이다. 생선을 좋아하는 나와 가람이는 햄버거를 하나씩 더 주문해서 먹고도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항구여서일까? 생선 햄버거도 처음 봤지만 햄버거의 도시답게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생선과 빵의 조화로운 맛은 아직도 뇌에 각인되어 한켠에 남아있다. 이 여세를 몰아 함부르크 최고의 명물 햄버거가게인 짐블럭(Jim Block)에 가본다. 푸짐하고 신선한 야채와 여러 가지 종류의 햄버거가 있다. 너무 기대를 한 탓일까? 담백한 생선 햄버거의 신선함 때문이었을까? 맛있긴 했지만 이미 각인된 생선 햄버거 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했다.


▲ 함부르크에서 먹은 생선 햄버거. ⓒ가온가람이 가족

분단과 통일의 상징 베를린

이제 독일의 수도이자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이다. 독일은 1, 2차 세계 대전과 극단적 민족주의 파시즘의 히틀러 독재를 겪었고, 전쟁 후 이념의 차이로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지는 분단을 지나 1989년 장벽을 제거하며 통일이 되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 전쟁, 분단,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정이 우리와 맥을 같이 하기에 독일 통일의 상징인 장벽을 보는 우리의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베를린 장벽.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와 있다. 전쟁 이후 분단이 되고 1961년 장벽이 세워진 후 1989년 장벽이 붕괴되기까지 장벽을 뛰어넘다가 죽어간 사람들, 한 나라의 국민인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가족이 장벽을 사이로 총을 겨누며 서로를 겨냥했던 아픈 시대의 산물.


이제는 철거되어 100여m의 장벽만이 야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1961년 설치 당시 무려 길이 155km, 높이 약 4m, 넓이 약 10~20m였음을 생각해보면 이념의 차이가 그 시대에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장벽사이로 난 작은 구멍으로 반대편을 바라본다. 잠시 그 시대로 이동하여 그들의 감정을 느껴본다. 구멍을 통해 매일 매일 감시를 했던 감시병들의 초조함! 장벽을 탈출하려는 사람을 쐈던 병사들의 트라우마! 그들의 총에 맞아 죽어갔던 무고한 민간인들! 그들의 아픔이 한꺼번에 가슴 속으로 밀려오며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장벽 앞 기념관에 들러본다. 기념관에서는 분단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영상을 상영한다. 단지 15분짜리 영상에도 불구하고 장벽에서의 뜨거운 감정이 결합되며 나와 남편은 한참을 울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 국가의 국민만이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었을까? 아직도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영상 속의 사람들은 마치 우리의 부모이고 우리의 친구인 듯이 그렇게 가슴이 쓰려왔고, 마침내 감정을 폭발시켜버렸다.

독일의 통일 이후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가 되어있는 남북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희생 이후에도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자유가 박탈되고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이데올로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권력층에 의해 누명을 쓰거나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지금도 북한에 대해서는 절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고, 종북 또는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면 100가지 논리가 매몰되는 사회.

장벽을 깨고 통일을 이루며 전 세계인들에게 냉전의 종식을 알렸던 독일과 아직도 분단의 벽을 허물기는커녕 갈수록 서로에게 불신만 키워가는 한반도의 상황이 대비되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 ⓒ가온가람이 가족

베를린 필하모니에 다녀오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에서 문화공연 관람을 빼놓을 수 없다. 여행지를 지나가며 그곳 사람들과 호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나 공연은 교육의 목적에서도 마땅히 들러줘야 한다. 사실 교육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문화와 시대적 배경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비싼 입장료로 우리를 고민하게도 하고 또 때로는 일부만을 개관하여 우리를 아쉽게도 했다.

베를린 필하모니! 그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공연 한번 보려면 상당한 입장료를 지출해야 하는데, 장기여행을 하는 우리로서는 엄두가 안날 가격일 것이 뻔했다. 그래도 찾아보긴 해야 할 것 아닌가? 인터넷을 뒤지며 약간의 정보를 수집했다. 공연마다 차이는 있지만, 필하모니 연주회는 1인당 4~50 유로 정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연 시작 임박해서 약 한 시간 전에는 8유로(약 1만2000원정도)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니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우린 필하모니 가족공연을 관람했다. 가족공연인 만큼 각종 퍼포먼스까지 결합하여 관현악 연주임에도 즐거움을 주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연주곡에 대해 아이들이 직접 짧게 설명하기도 하고, 동화책을 읽어주며 그 상황을 음악으로 들려주기도 하고, 연주의 내용을 서커스 형태의 행위로도 보여준다. 물론 가슴속까지 울림을 주는 관현악의 연주는 기본이고 말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아이들과 자주 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보면 너무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설명도 거의 없이 연주만 듣다보면,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면 어른들도 졸기 일쑤고, 아이들은 이내 자장가가 되어 잠이 들곤 한다.

근데 세계 최고의 베를린 필하모니의 격에 비춰 봐도 엄숙하기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데, 실제 공연은 너무 즐겁고 아이와 어른들을 함께 아우르는 퍼포먼스를 하는가 하면, 공연 중간 쉬는 시간에는 연주가들이 아이들에게 악기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소리를 들려준다. 본 공연뿐만아니라 사이 시간까지 알뜰하게 배려하는 그들의 태도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아이들에게 감성적 자산을 남겨 주는 일에 꾸밈과 상업적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공연을 월요일 빼고 매일 테마를 바꿔서 공연하고 있다.


▲ 베를린 필하모니. ⓒ가온가람이 가족

잠시 옆길로 빠져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독일에서 작은 차이를 느꼈다.
맨 먼저 숙소 예치금이다. 우선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별이 달린 호텔이 아니라 주로 작은 여관급 호텔이나 캠핑장이었음을 염두에 두자. 우리는 캠핑 장비를 구입하고도 4~5월에는 너무 추워서 거의 텐트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캠핑장에 있는 모바일 홈이라는 주방과 욕실이 갖춰진 비교적 시설 좋은 곳에서 머물렀다. 이런 곳은 어디서나 시설을 잘 사용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일정 금액을 받아두었다가 아무 일이 없으면 돌려주는 데포짓(Deposit)이라는 예치금을 받는다. 프랑스는 거의 모든 곳에서 데포짓을 받았고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 우리가 거쳐 온 나라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치금을 받았고 숙박료는 언제나 선불이었다. 그런데 독일은 단 한곳에서도 데포짓을 요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숙박료도 항상 후불로 계산한다.

이런 독일인의 자세는 예치금을 꼭 확보하고 항상 확인하고 나서야 체크아웃해주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아주 작은 차이인데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사람을 믿어주는 좋은 느낌이 들며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드레스덴 편은 독일의 여러 도시 중에서 전쟁의 폐해와 어려움을 딛고 아름다운 도시로 재건하는 등 가장 인상 깊었던 도시로 기억하고 있는 가온이의 글이다.)

통곡의 역사를 아름다운 도시로 빚어낸 드레스덴

독일의 고전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는 이곳, 시골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 마을.
숙소에 풀과 꽃이 가득한 정원도 있어 소박하지만 기쁜 기분이 들었다.

그 숙소의 주인분은 노부부신데 친절하신 분들 같았다.

첫날 밤에는 가람이가 열이 많이나서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병원에 한번 가봐야하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독일의 전통 조식이라며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에 우리 가족은 행복감을 느끼며 식사했다. 그러나 가람이는 그마저도 편히 먹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 독일의 전통적인 아침 식사. ⓒ가온가람이 가족

이런 불쌍한 가람이를 주인 할머니가 도와주셨다.
가람이의 상태를 말하며 근처 병원의 위치를 물었는데, 옥상 텃밭에서 뜯은 풀을 끓인 물에 담궈서 따뜻한 차를 만들어 주셨다. 그 차를 마시고 가람이의 상태는 조금 호전이 되었다.
주인 할머니께 정말 감사했고, 풀잎으로 차를 만들어 주신 그 모습이 참 정겨워 보였다.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차 덕분에 그 다음 날 우리는 드레스덴을 구경 할 수 있었다.


▲ 독일 시골 할머니의 친절함을 느끼게 해준 차. ⓒ가온가람이 가족

나는 드레스덴이 그저 독일의 작은 도시인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엘베 강변의 플로렌스라고도 불리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또 작센 왕조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의 도시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즈음 승기를 다 잡은 연합군(특히 영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던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도시였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승기를 확실히 잡은 시점에서 군수 시설이 거의 없는 드레스덴에 이른바 전략폭격이라는 이름으로 공군의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도심부가 파괴되고, 2만5천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비록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불가피한 공격이 필요 없는 곳에 승기를 다 잡은 시점에서 한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폭격이 가해진 이 사건은 세계 최대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기록되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고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격의 경우 군수시설이나 군인이 밀집된 곳에만 폭격을 가하는 암묵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지금 드레스덴의 모습은 전혀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무너져 내린 건물의 돌들을 보관해 두었다가 도시를 재건할 때 하나둘씩 내놓아 지금의 드레스덴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드레스덴의 아픈 역사를 들었을 때는 안타깝고, 연합군의 잔인함에 화가 날 뿐이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보관해 놓은 돌로 도시를 다시 재건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다.
독일인들이 참 독하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센왕조의 기록을 담은 길고 거대한 벽화거리를 지나간다. 과거 종이나 흙벽에 그림으로 벽화를 그리던 방식을 탈피해서 그때 시절에 가장 견고한 소재로 알려진 타일을 이용해서 벽화를 만들어서인지 연합군의 무자비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보존되어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주요 관광장소 구경을 끝내고 난 후 우리는 한인마트에 들렀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음식들을 나와 가람이는 마치 놀이공원에라도 온 듯 신이 나서 구경했다.
외국에서 라면은 쉽게 구할 수 없어, 귀하고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비상식품으로 들고 다니며 아껴먹었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 돌아와 한두달은 집에 라면이 많이 있는데도 아껴가며 먹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예전에는 몸에 나쁘다고 자주 먹지 않게 했던 엄마도 라면을 아껴서먹고 있는 모습이 정말 우습고 재밌었다.

이렇게 드레스덴은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마음 속 깊이 남는 무언가가 드레스덴의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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