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 직전 국가정보원에서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을 해킹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입해 이를 국내 감시용으로 사용했단다. 이 의혹은 참여연대와 민변이 통신비밀보호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의 전·현직 국가정보원장을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국가정보원 직원 일동의 성명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대다수는 국정원이 실제로 이 해킹 프로그램을 국내 도청에 사용했으리라 믿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운운하면서 생겼던 정치 파동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그보다 더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보호하라고 만든 정보기관이 국민을 감시했다면 이는 가장 본질적인 배신이 아닌가. 2015년 한국은 여전히 배신의 정치로 뜨겁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까지 배신이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일까.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몰상식적이며 민주주의 사회를 역행하는 일들이 너무도 자주, 또 너무도 태연이 벌어지고, 또 그렇게 소비되고 해소된다. 그런 일이 미처 해결되기도 전에 반복된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그 배신을 응징하지 않으니 배신은 되풀이되고 증폭된다. 이제는 모두들 무뎌진 것 같다. 나서서 항의하고 싸우기에도 지친듯하다. 아예 '유체이탈화법'과 몸짓으로 송두리째 무시해버리니 싸워야할 사람이 너무도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말도 안 되게 행동하니 말해야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야할 지를 모르게 된다. 어떻게 맞서야 할까. 흔하게 정치 혐오로 빠지거나 정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삶의 껍질로 파고드는 것은 이들이 원하는 가장 좋은 결과이다. 그들이 원하는 데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이럴 때 일수록 말하고, 분석하고, 항의하고 참여해야한다. 정치는 결코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구체적 삶과 관심사가 걸린 가장 원초적이고 삶에 가장 밀접히 연결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그들에게 맡겨버리면 우리 삶은 배제되고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바보가 될 것이다. 그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치 풍자나 쏟아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것은 정확히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다.
김지운 감독의 2005년 작 <달콤한 인생>은 두목의 젊은 애인을 감시하던 부하가 배신했다고 느낀 두목의 제거 명령에 맞서는 조폭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죽을 위험에 처해진 이병헌이 두목에게 대항하는 그런 영화지만 복수와 배신이란 관점에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두목에게 총을 겨누면서 이병헌이 절규하듯이 묻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몇 년을 몸바쳐 충성했지만 사소한 실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두목에게 "말 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일까? 두목은 왜 그랬을까?
대통령은 유신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 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고 했단다. 뼈 속 깊이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단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런 개인사로 이 사태를 설명하고 용납하려 한다. 도대체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그런 설명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가장 공적인 영역이 지극히 개인적 욕구의 차원으로 환원된다. 그는 심지어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했단다. 전형적인 조폭 양아치 영화가 되풀이 된다. 오히려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야할 것은 이런 양아치 정치가 아닌가. 유승민은 "대통령께 거듭 죄송하다"고, "저희에게 마음을 풀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 사죄했단다. 누가 뽑아줬는데 누구에게 사죄하나? 그래도 복수는 계속 된다. 결국 그는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나는 정말 유승민이 대통령을 배신했는지, 아니면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과잉표출된 것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건 그들끼리의 이야기일 뿐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며, 일상의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우리들이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과 불의한 현실, 부패하고 사익에 물든 현실과 이를 증폭시키는 정치가 몇 백배 더 중요하다.
배신이란 말 그대로 신의를 저버린다는 뜻이다. 정치에서 배신이란 정치적 신의를 져버린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배신은 민주주의 본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배신을 말하는 대통령은 누구를 배신하고 있는가. 그야말로 가장 심각하게 국민 전체를 배신하지 않았는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권리와 의사를 선출된 이들을 통해 재현하는 정치체제이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 선거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조차도 주어진 범위 내에서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위임된 권력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을 선출했던 국민의 의사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이며 공적인 배신이다.
자신을 선출해달라고 약속하는 것이 선거 공약이며, 이 공약은 지켜도 좋고 아니면 말고 해도 좋은 그런 헛 약속이 아니다. 공약을 배반하는 행위는 가장 본질적인 배반이다. 이는 조폭영화에서 보듯이 총질이나 하면서 끝날 일이 아니라 자신의 선출 자체를 뒤집는 행위이기에 그 자리를 물러나야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가 과거의 군주제와 다른 이유는 그 자리를 물러난다고 해서 총질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과 그 약속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들은 선출되지 못하며, 선출되었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배신이며, 그때 그가 해야 할 일은 물러나는 일 뿐이다. 그게 민주주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지원했는데 내 뜻을 져버렸다는 따위의 문제는 사적으로 따질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에게 약속한 신의를 져버리는 행위는 그런 개인들 사이의 문제와는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경제민주화도 뒤엎고, 사대강, 반값 등록금, 전시작전 통제권 전환 약속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약을 모두 뒤엎었다. 이보다 더 큰 배신이 어디 있나?
그는 이 배신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당선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한다고, 그러니,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심판하자. 공적인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그들을 심판하자. 그래도 '묻지마 지지'를 하는 30%는 빼고, 시민들은 나서서 배신을 심판해야 한다. 조폭들은 배신을 총으로 응징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총이 아니라 정치 참여로 심판할 뿐이다. 배신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또 배신한다. 아니 더 크게 배신할 것이다. 그래도 배신자를 지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신을 부추기는 일이다. 대통령은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이라 강조했다.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끝내야 한다"고도 했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은 옳게 실행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배반하는 행위는 우리가 심판해야한다. 한 번의 선거만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적 참여를 통해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해야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된다. 자신이 노예인지 알지 못하는 노예, 배신당한지도 모르고 묻지 않고 지지하는 노예. 민주주의와 생활 정치는 우리의 행동과 판단, 참여를 통해서만 지켜진다. 그런 참여 없이 한탄만 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우리들의 의무를 져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배신은 배신을 낳는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정치를 되찾아야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노예가 아닌 계몽된 시민으로 거듭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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