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은 '남 탓 정치'의 전형으로 기록될 법하다. 차라리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자기를 건 화법이 나을 뻔했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마음이 상하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느냐만, 그래도 이번에는 본인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해 국민들이 '번역기'를 돌릴 수고를 덜어준 점은 높이 살 만하다.
6월 30일, 황교안 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2030년 국가 온실 기체(온실 가스) 감축 목표가 발표됐다. 6월 11일에 발표한 4개의 감축 목표 시나리오에는 없는 새로운 시나리오가 등장해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실상을 확인하니 '배신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초 시나리오(BAU 대비, 즉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미래 배출 전망치 대비) 1안은 -14.7%, 2안은 -19.2%, 3안은 -25.7%, 4안은 -31.3%로 밝히고 민관 합동 검토반, 공청회, 국회 토론회를 거쳤다. 누군가 8일 만에 사회적 공론화가 가능했는가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오죽했으면 양수길 전 녹색성장위원장이 9월말까지 미뤄서라도 감축 목표를 재산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을까.
네 시나리오 모두 잘못된 혹은 의도된 숫자 놀음으로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미래에는 더 많이 배출될 것이라 전제(또는 소망)하고 거기서 얼마만큼 줄일지 '사지선다'로 제시했다. 그래야 더 많이 감축하는 착시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목표 감축량이 커질수록 그 만큼 핵발전소를 더 많이 짓겠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을 달았다.
최대 31.3%를 줄여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시행령으로,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행정입법으로 정한 2020년 30% 감축을 스스로 어기는 것인데, 그야말로 악수를 둔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스코어'는?
정부가 유엔에 제출한 국가별 자발적 감축 기여(INDC, 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는 -37%로 낙찰되었다. 최고의 시나리오로도 국내외 비판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오는 9월 유엔 총회에 맞춰 열리는 기후 정상 회의와 11월의 G20에서 정상 외교를 펼치기엔 너무도 초라한 카드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또 하나의 꼼수가 창조되었다. 기존 3안 -25.7%에 -11.3%를 더했다. 국제탄소시장(IMM)이라는 감축 수단을 활용하겠다는 융합 정신이 발휘된 것이다. 해외에서 탄소 감축 프로그램을 돌려 한국의 감축량으로 인정받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올해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온실 기체 배출권 거래제를 떠올리면 된다. 국경을 넘어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에서 감축 사업을 하고 그 감축량을 우리 것에 포함시키는 청정 개발 체제(CDM)라는 기법을 통하면 된다. 물론 신기후 체제의 IMM을 어떻게 설계하고 적용할지는 논쟁거리다. 한마디로 아직까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 그렇다면 정부가 내세우는 다른 나라들의 사례는 거짓일까. 물론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제출된 국가별 자발적 감축 기여(INDCs)를 살펴보면, 허위, 과장 광고에 가깝다.
IMM을 활용한다고 사례로 든 스위스, 캐나다, 모로코, 리히텐슈타인은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정도이지 기정사실화해서 목표치에 넣지 않았다(참고로 스위스는 의회에서 최종 목표치를 승인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이 나라들도 불확실한, 그것도 자기 나라에서 직접 감축하지 않고 배출권(credit) 거래를 통해 감축량을 상쇄(offset)하겠다는 의도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정확한 목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주요 국가들이 채택하는 기준년도 대비 절대 감축량 방식이 아니라, 한국처럼 BAU 방식을 고집하는 멕시코는 "무조건부"로 2030년 BAU 대비 25% 감축안을 제출했다. IMM 등 다른 방법이 가능하다면, 40%까지 목표를 높일 수 있다는 "조건부" 목표치를 별도로 던졌다. 한국도 멕시코만큼 솔직해지려면, INDC에 무조건부 2030년 BAU 대비 25.7% 감축, 조건부 37% 감축이라 표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IMM의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몇몇 사례를 엉뚱하게 해석해서 37%를 베팅하는 것은 '뻥카'다. 전부 인정한다 해도 상향 조정이 아니라 하향 조정인 셈이다. 사실상 정부의 기존 감축 목표에서 후퇴한 것이고, "한국의 국제적 책임"과 "기후 변화 대응 리더십"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마저도 달성이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사회적 약자나 기후 변화 취약계층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대기업들이다. 정부가 특별히 신경 써서 산업 부문의 감축률만 시나리오 2에 맞췄다고 고백했음에도 엄살을 피운다. 산업 부문이 BAU의 12% 수준에 불과하다면, 가정 등 나머지 부문에서 더 감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12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앞두고 종교적 책무를 다하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을 발표했다. 생태 위기와 기후 변화를 다룬 이번 회칙에는 종교적 입장과 상관없이 누구나 되새길 만한 내용이 담겨 있어 화제다.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공동선으로서의 기후(Climate as a common good)"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기후 정의 관점과 일치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교황 회칙 '6장 다가섬과 행동의 길' 가운데 'Ⅰ. 국제 사회의 환경 대화"는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이라는 기후 변화의 수사학을 넘어선다. 온실 기체 배출권 거래제가 전 세계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투기를 조장하고,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결국 몇몇 나라와 몇몇 부문의 과잉 소비를 유지하는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70~171항).
산업계의 부담을 최소화하겠다고 온실 기체 배출권 거래제 법과 제도를 개선(?)하려는 정부는 과연 누구를 섬기는 걸까. 자기를 배신한 정치인의 퇴출을 국민에게 떠넘긴 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온실 기체 감축 목표나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건 불가능할까. 이제라도 정치인과 관료와 전문가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대로 따져볼 때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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