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국정원)이 또 다시 존재감(?)을 과시하고 나섰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 무능론이 비등해지던 5월 13일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에는 대면보고를 하고 통일부 기자단에는 '북한 내부 특이동향'이라는 11쪽 분량의 자료를 돌렸다. 핵심적인 요지는 북한 군부 2인자로 지칭되던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이 밝힌 내용은 확인된 '정보'라기보다는 휴민트(인적 정보)로부터 들은 '첩보'가 대부분이다. 현영철이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됐다"거나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는 첩보도 있다"는 것 등이다. 국정원은 현영철이 잔인하게 처형된 이유로 김정은의 연설 때 졸았고 수시로 말대꾸를 하다 '불경죄, 불충죄'로 찍혔다고 분석했다.
국정원은 또한 지난 6개월 동안 김정은을 보좌했던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등이 "사라져 버렸다"며 "공포통치의 정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간부들 사이에서도 내심 김정은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까지 내놓았다. 그러자 보수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김정은 악마화'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정원은 왜?
국정원이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한 첩보를 시시콜콜하게 공개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당연히 정치적 의도에 의구심이 쏠리는 이유이다. 국정원의 '첩보' 공개는 시기적으로 주목할 대목들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1주기 당일 날인 4월 16일 남미 순방에 나섰고, 정작 이 시기에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반둥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중일 관계에서 교량 역할을 해야 할 한국의 존재감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뒤이어 아베는 미국을 방문해 융숭한 환대를 받으며 '희망의 미·일 동맹'을 천명했다. 미·일 동맹이 한국을 동아시아 체스판에서 '졸'(卒)로 보지 않는다면 쉽게 납득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국정원도 헛발질을 했다. 4월 29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러시아 전승절 참석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러시아 정부는 김정은이 참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5월 들어 통일부와 외교부는 북한에 다소 유연해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통일부는 6.15 공동행사 논의를 위해 민간단체의 대북접촉을 승인했다. 2009년 이래 처음이었다. 외교부는 '북한과 탐색적 대화'에 나설 의사를 표명하면서 "전제 조건은 없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유연해진 입장 표명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국정원이 현영철 첩보를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김정은을 악마화하는 데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남북관계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현영철 처형설을 최고 존엄 모독으로 간주한 북한 매체들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대남 비방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Again 2013년?
현영철이 고사총으로 처형되었는지, 그 사실 여부를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들도 있다. 5월 14일 북한에서 방영된 기록영화에 현영철을 비롯해 국정원이 숙청됐다고 발표한 마원춘, 변인선의 모습이 일제히 공개된 게 대표적이다. 비록 이 영화는 2년 전에 제작한 것을 재방송한 것이지만, '불경죄, 불충죄로 처형됐다'는 인사들이 버젓이 화면에 등장한 것 자체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또한 북한은 2013년 장성택 처형 때와는 달리 현재까지는 현영철 처형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고 있다. 첩보가 정보가 되려면 이러한 상황들도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해야 하는데, 국정원은 설익은 첩보를 공개하는 무리수를 둔 셈이다.
국정원의 첩보 공개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내부의 극도의 공포정치가 알려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경악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김정은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는 국정원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발언이다.
안 그래도 북한은 박근혜 정부가 흡수통일을 추구하고 있다고 강한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한사코 부인해왔지만, 그렇게 볼 여지가 있는 언행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정원이 현영철 처형설을 공개하고 이를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증표인양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풀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지 또다시 강한 회의감이 드는 이유이다.
기시감이 드는 대목들이 있다.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지자, 국정원을 비롯한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곧 망한다'는 막연한 희망에 사로잡혔다. 돌이켜보면 이 때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흡수통일론'에 사로잡힌 MB 정부는 6자회담 훼방 놓기에 바빴다. 2009년 임태희-김양건 라인이 가동되면서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갔던 3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것도 '북한은 곧 망할 것'이라는 국정원의 정보 보고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착 국정원은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또 있다. 국정원이 존재감을 여지없이 과시한 장성택 숙청설이다. 대선 댓글 공작과 탈북자 간첩 조작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던 국정원은 2013년 12월 초 장성택이 숙청되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이게 사실로 드러나면서 위기의 국정원은 기사회생했고, 남재준 국정원장을 비롯한 고위 당국자들은 북한 체제가 곧 망할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 박근혜 대통령은 연초 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주창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남북관계가 풀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통일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랐던 이유이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안정적이었다. 반면 남북관계는 '통일' 프로세스는 고사하고 '화해협력' 단계조차 회복하지 못했다. 북한이 곧 망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대북정책은 설자리가 없어지는 탓이 컸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상황이 또 다시 조성되고 있다.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북한 엘리트 집단에서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은 북한급변사태론으로 쉽게 이어지곤 한다.
장성택 처형과 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해석은 집권 초기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현영철 처형설, 그리고 이를 대하는 국정원과 청와대를 태도를 보면 이러한 상황이 집권 후반기에도 반복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북한을 악마화하고 북한의 공포를 조장하는 일은 통치의 편리한 도구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자해적인 결과를 잉태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외교의 외딴섬처럼 전락한 한국의 처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남북관계에 있다. 북한과 관계를 단절하고 악마화할수록 북한의 악은 더 커질 수 있다.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어도 이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게 남북관계의 엄연한 현실이다. '조용한' 국정원과 '활기찬' 외교를 보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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