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프레시안 : 1952년 악명 높은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발췌 개헌을 통해 정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 흘리고 도처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감수하던 때, 후방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우격다짐 개헌이 이뤄졌다. 그 후 정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 개헌을 찬찬히 되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직선제 개헌안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게 된 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만 되면 자신이 영구 집권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직선제 개헌을 무리하게 발췌 개헌으로 해놓고 두 번째로 치른 1956년 정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그렇게까지 이승만이 당할 것이라고는 이승만 자신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엄청난 부정 선거를 자행하게 되는데, 그게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 직선제 개헌을 추진할 때 이승만이 어떻게 알았겠나.
직선제 개헌은 그 후에도 한국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태를 일으킨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겪으면서 '직선제를 하는 한 장기 집권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그러면서 유신 체제로 가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유신 체제와 그 유신 체제의 서자 격인 전두환 신군부 체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그때 주된 반독재 구호 중 하나가 직선제 개헌이었다. 직선제 개헌이 돼야만 민주주의가 된다고 하면서 1987년 6월항쟁 때는 그게 주된 구호로 등장해 결국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지 않나. 이처럼 직선제 개헌은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참 파란만장한 면을 지니고 있다.
독재와 인권 탄압에 제동을 건 국회와 이승만 정권의 불편한 관계
프레시안 : 개헌 문제를 짚으려면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어떠했나.
서중석 :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부터 독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행정 독재를 한 건 틀림없다. 행정부를 강력하게 발동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은 했다. 그러나 의회와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 의회와 순탄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이승만이 독재하는 데 상당한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헌 국회에서도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이승만이 수세에 많이 몰렸다. 그뿐만 아니라 2대 국회에서도 이승만은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때는 족청계도 완전히 거세된 시점인데, 그러면서 수십 년 동안 대부분 거수기 역할을 하는 국회가 출현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이전의 국회는 그렇지가 않았다. 예컨대 2대 국회는 전쟁 국회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전쟁 기간 동안 국회와 이 대통령 사이에 알력, 대결이 참 많았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전에서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비상 조치령)을 1950년 6월 28일에 만든다. 이것으로 굉장히 엄혹하게 '부역자'를 다스렸다. 중벌을 내렸는데 그것도 단심제로, 더욱이 증거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형태로 처벌하게 했다. 국회의원들은 이게 아주 문제가 많은 나쁜 조치라고 보고 이걸 견제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가령 사형(私刑)금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도 했는데, 법에 의하지 않고 개인들 그러니까 반공 단체 같은 데에서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몰아붙이고 테러를 하는 등의 일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는 이것도 거부했다. 그런 속에서 비상 조치령 때문에 '부역자'들이 너무나 심하게 당하니까 국회에서는 1950년 9월 '부역 행위 특별 처리법'이라는 것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나중에는 이 비상 조치령을 아예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법률을 국회에서 또 통과시킨다. 이것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또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국회하고 대통령은 대립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회가 이승만 정권을 강하게 공박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자 간의 대립이 더 심화된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이 당시 헌법에 있던 대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으면 자신이 선출될 수 없다고 직접 느끼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가 19, 부 143…첫 번째 직선제 개헌안 표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이승만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인가.
서중석 : 부통령 보궐 선거였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비판하고 1951년 5월 부통령직을 내놓지 않나. 그래서 그다음 부통령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대결 국면에서 양쪽 다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승만은 이갑성을 당선시키려 애를 많이 썼고, 반대파에서는 한민당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지만 이 당시에는 이승만과 굉장히 대립하던 김성수를 내세웠다. 그런데 김성수가 당선됐다. 그러면서 김성수가 이승만을 아주 세게 비판했다. 이시영도 사사건건 비판을 많이 했고 김성수는 그보다 더 강하게 비판했으니, 이승만 기준으로 보면 부통령을 두 번 다 '잘못' 만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승만 측에선 신당을 만들어서 국회도 장악하고 다음 대선도 안전하게 치르려 했는데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2년 1월 18일 이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가(可) 19, 부(否) 143, 기권 1이었다. 전 세계 의회 정치에서 대통령이 내놓은 중요한 개헌안 중 이렇게 가가 적게 나오는 게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인데 이렇게까지 적게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국회의원 대다수가 '내각 책임제로 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견제가 암암리에 상당히 들어가 있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지금은 어렵지 않느냐. 우리가 그런 선거 기구를 갖추지 못했다', 이런 주장도 상당히 나왔다. 그것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얼마 후 지방 자치 선거를 하는데 시의원, 도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하고 경기도, 강원도는 제외했다.
프레시안 : 제외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전쟁 지구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지역이 서울, 경기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지역들이 제외될 만큼 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어떻게 전국적인 선거를 일사불란하게 잘 치를 수 있겠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고, 또 이건 경찰이 개입하기가 더 쉬운 것이어서 공무원과 경찰의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국회 속기록을 보면 내각 책임제를 주장한 이유 중 이런 것도 있다. 한 의원이 이렇게 발언한다. "지금 대통령 직선제를 하는 나라는 필리핀 정도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프랑스도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었고, 미국은 간접 선거 형태를 띠고 있어 완전한 직접 선거는 아니지 않나. 그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엔 대통령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전 세계 문명국들이 대개 내각 책임제를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승만 독재를 견제하려면, 그런 대통령이 출현하지 않게 하려면 내각 책임제밖에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많은 국회의원이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이 임시정부 수반이 된다. 그러나 1946년 샤를 드골이 사임하면서 프랑스에는 내각 책임제 형태의 제4공화국이 등장한다. 1958년 알제리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대가 일으킨 쿠데타를 수습하기 위해 샤를 드골이 정계에 복귀한다. 알제리 사태 수습 후 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이 이뤄지며 제4공화국이 막을 내린다.)
우격다짐 개헌을 위해 동원된 관제 민의
프레시안 : 1952년 1월 18일 직선제 개헌안이 엄청난 표차로 부결됐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부결될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될 것까지는 생각을 못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든다. 하여튼 이 대통령은 최측근인 원외 자유당의 양우정을 불렀고, 일본에 가 있던 서북청년회의 문봉제도 귀국하게 했다.
그러면서 임시 수도이던 부산 일원에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이런 게 등장해 국회의원들을 막 협박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민의에 따라라. 국회는 해산하라' 하면서 각지에 백골이 들어 있는 표시가 담긴 데에다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문구를 써넣고 그랬다. 이름도 참 유치해 보이는데, 어쨌든 그런 이상한 단체들을 만들어서 막 협박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멈춘 게 아니라 지방 자치 선거를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서 했다. 4월에는 시읍면의회 선거를 했고, 5월에는 앞에서 말한 세 군데(서울, 경기, 강원)는 제외하고 도의회 의원 선거를 했다. 이건 이 부분을 연구한 사람이면 누구나 쓰는 것인데, 민의를 동원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민의라는 걸 아주 중요시했다. 그 민의라는 것이 자신이 만드는 민의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꼭 민의 형식을 취했다. 그 점에서는 민주주의자인가 보다. 꼭 민의 형식을 밟아 일을 처리하는 형태를 취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국회의원 너희들만 민의를 대변하느냐. 지방 의원들도 다 백성, 국민들이 뽑은 것 아니냐. 이 사람들 의견도 국회의원 너희들 의견과 똑같이 중요하다', 이런 식이었다.
사실 지방 자치제 선거는 소장파들이 크게 역점을 둔 법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그걸 비토(veto)했다. 그러다가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그랬으면 그 법을 실시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지만 이런 일이 상당히 있었다.
프레시안 : 다른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헌법에 참의원을 두라고 돼 있었는데도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원제에서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한다. 1952년 발췌 개헌 후 참의원 조항이 헌법에 명시됐으나 이승만 집권기에는 한 번도 구성되지 않았다. 4월혁명 후 제2공화국 때 참의원이 생겼다가 5.16쿠데타를 계기로 사라진다.) 도대체 이런 정치를 무슨 정치라고 봐야 하느냐. 이것도 나쁜 독재 정치의 하나 아니냐고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 차례 문제가 됐는데, 이 지방 자치 선거도 이뤄지지 않다가 갑자기 전쟁 중에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방 자치 선거는 한 번 하면 그다음에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참 이런 애달프다고 할까, 이상한 과정을 거쳐서 민주주의 제도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54년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정당 공천제가 실시되는데 그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생긴다. 한마디로 독재를 하기 위해 정당 공천제가 생긴다. 그러나 정당 공천제는 정당제에서 진일보한 제도임이 틀림없다. 지방 자치제도 마찬가지다.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안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자신의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걸 실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결국 이승만 독재, 영구 집권 시도에 이용됐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어쨌건 그런 걸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화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버스째 끌려가 국제 공산당으로 몰린 반공 투사들
프레시안 : 한국 민주주의 제도에 담긴 그러한 우여곡절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쨌건 그렇게 당선된 지방 의회 의원들도 백골단 등과 마찬가지로 실력 행사를 하나?
서중석 : 이제 도의원들, 시읍면의원들이 부산으로 쳐들어와서 열심히 데모를 한다. '국회는 해산하라. 너희가 무슨 민의를 대변하냐', 이런 식이었다. 지방 자치 선거가 치러지는 4월에 가면서 정국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한다. 우선 원내 자유당, 이때도 그렇게 불렀는데 그 원내 자유당과 민국당이 중심이 돼서 곽상훈 의원 외 122명(전체 123명)의 연서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123명이라는 건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재적 의원 3분의 2보다 1명이 많은 숫자였다. 그러면 이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국회의원 1명은 권력이 얼마든지 빼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장면이 국무총리에서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장택상이 바로 임명된다.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자마자 이 대통령이 3일 만에 바로 조치를 한 것이다. 장택상은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신라회라는 국회 조직을 갖고 있었다. 20명을 끼고 있었다. 이 20명이 어떤 쪽으로 가느냐,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승만이 장택상을 국무총리에 임명한 것 아니겠나.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은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약간 고쳐서 5월 14일 국회에 제출했다. 두 개의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된 것이다. 그리고 5월 24일 내무부 장관에 이범석을 앉힌다. 이범석은 그전부터 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었는데, 이범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본때를 보여준 게 바로 이 시절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프레시안 :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한 직후 부산 정치 파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서중석 :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에 앉힌 다음 날인 5월 25일 부산 등 지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비상 계엄령이 사실은 상당히 논란이 됐던 것이다. 당연히 육군 참모총장인 이종찬을 비상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일제 때 만주군 중좌를 지냈고 안두희 재판 때 재판장이었던 원용덕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된 건 이종찬이 군대 동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이종찬이 항명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군은 정치에 동원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계엄령 선포에 동의하지 않았고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회신을 전군에 돌렸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것 때문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중립을 주장한 훌륭한 군인이라고 해서 군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으로 오랫동안 꼽히게 된다. 이종찬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 아니냐, 그렇게 보고 있다.
5월 26일 유명한 부산 정치 파동이 본격화된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자기 차로 가면 불안하니까 통근 버스를 탔다. 그 인원은 자료마다 다른데, 옛날엔 50여 명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40여 명으로 많이 나온다. 어쨌건 그 버스를 헌병대에서 견인해서 헌병대로 데려갔다. 거기서 '누구누구 나와라', 이렇게 명단을 불렀다. 임흥순, 서범석 같은 사람들이 바로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된다. 곽상훈까지 10명을 구속하는데, 정말 반공 투사 중의 반공 투사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곽상훈이 얼마나 유명한, 참 극단적인 반공 투사였나. 그런데 이 사람들이 국제 공산당으로 몰려버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1951년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겨냥했던 대남 간첩단 사건보다도 더 있을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건 회기 중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을 보장한 헌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헌법을 유린한 것이었다. 국회 동의도 없이 그냥 잡아가고 출석 부르듯이 명단을 불러서 데려간 것이었다. 이때 원내 자유당의 오위영이라든가 엄상섭, 김영선, 나중에 장면 정권의 최고 핵심 인물이 되는 이런 사람들과 윤길중 등은 꼭꼭 숨어버렸다. 50명 정도의 국회의원들이 부산, 마산 일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숨어 다녔다고 한다. 참 창피한 정치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오제도와 함께 국민보도연맹을 만든 유명한 사상 검사였고 장면이 국무총리를 할 때는 그 비서실장이었던, 그래서 장면 추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선우종원은 얼마 후 일본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종원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에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이상한 성격이 있었다. 이 국제 공산당 사건에 대해서 몇 번에 걸쳐서 담화를 발표한다. 이게 진짜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누가 믿었겠나. 하여튼 신익희 국회의장, 조봉암 국회 부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서 '이럴 수는 없다'고 항의했다. 아울러 미국 신문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사설에서 "전체주의 경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쿠데타로써 그(이승만)의 정권을 영속화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 축출 계획에서 발췌 개헌안까지…부산 정치 파동과 미국
프레시안 : 오늘날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의회 지도자'로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개인적으로 두 차례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동상 명문(銘文)에는 사실과 아주 다른 내용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6.25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셨다"라는 대목이다. (관련 기사 : 국회 심장부에 14년째 '이승만 거짓말 동상') 어쨌건 "진정한 의회주의자"라는 미사여구를 무색하게 하는 모습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많이 보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회의원들이 도망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는 등 해괴한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 부산 정치 파동도 그걸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아울러 반공 투사들이 공산당으로 몰리는 풍경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서중석 : 사태가 이렇게 되니까 국회의원들은 5월 28일 즉각 계엄령 해제를 결의했다. 국회에서 이렇게 결의했으면,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 계엄을 해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1950∼1973년에 있었던 유엔 위원단)에서도 계엄 해제와 구금 중인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초헌법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할까. 그러니까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사임을 한 것이다. 사임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보수 정치가들의 여러 글 가운데 이것보다 더 강한 어투로 비난한 것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아주 강력한 어투로 돼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은 군대, 경찰, 깡패, 청년단, 지방 의회 의원들을 동원해 국회를 계속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다. 그런 속에서 6월 21일 악명 높은 발췌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발췌 개헌안이라는 건 뻔한 것이다. 앞에서 두 개의 개헌안이 상정됐다고 했는데 그 둘을 발췌해서 합쳐 놨다, 이런 뜻이다.
누가 이런 꾀를 냈느냐. 이걸 갖고도 논란이 됐는데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장택상 국무총리다', 오랫동안 이렇게 이야기됐다. 내가 1960∼1970년대에 공부할 때도 대개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허정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회고록을 쓰고 자료를 남기면서 바뀌었다. 제일 정확한 건 허정이다. 왜냐하면 허정은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외국에 나가 있을 때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고 해서 유엔, 미군 쪽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허정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허정은 '사실은 유엔 한국위원단 사무총장 메듀(프랑스인)가 나를 직접 찾아와서 정치 파동 수습책으로 발췌 개헌안을 제시했는데 이 발췌 개헌안은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와 메듀 사무총장이 만든 것이다. 이 방식으로 처리하자는 식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걸 장택상이 국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밝혔다. 장택상도 나중에 회고록에 "그 이면에는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책'이 있었다"고 썼다. 허정 말이 맞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미국 측 반응을 보면 엇박자 느낌이 든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 축출 계획을 미국 측에서 세웠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발췌 개헌안 아이디어와는 결이 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이 당시 이 대통령이 하는 일이 너무 지나치니까 앨런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는 이승만을 축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미군이 한때 쿠데타 계획안을 세워놓기는 했다. 그러나 이때는 전시였기 때문에 실제 주도권은 유엔군 사령관(주한 미군 사령관, 미국 8군 사령관)에게 있었는데,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정치 혼란이 더 악화돼 전쟁 수행에 지장이 생기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회를 압박했다. 당시 '신탁 통치를 실시할지도 모른다. 군정을 미군이 실시할지도 모른다', 이런 소문까지 나돌고 그랬다. 이런 것들은 이승만에 대한 협박이라기보다는 국회에 대한 협박이 아니었나, 국회는 여러 측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월 하순에서 7월로 가는 길목에서 국회는 큰 어려움에 쌓이게 된다. 그러면서 대통령 임기가 언제냐 하는 논쟁이 일어났다.
서중석 :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직선제 개헌안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게 된 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만 되면 자신이 영구 집권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직선제 개헌을 무리하게 발췌 개헌으로 해놓고 두 번째로 치른 1956년 정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그렇게까지 이승만이 당할 것이라고는 이승만 자신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엄청난 부정 선거를 자행하게 되는데, 그게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 직선제 개헌을 추진할 때 이승만이 어떻게 알았겠나.
직선제 개헌은 그 후에도 한국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태를 일으킨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겪으면서 '직선제를 하는 한 장기 집권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그러면서 유신 체제로 가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유신 체제와 그 유신 체제의 서자 격인 전두환 신군부 체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그때 주된 반독재 구호 중 하나가 직선제 개헌이었다. 직선제 개헌이 돼야만 민주주의가 된다고 하면서 1987년 6월항쟁 때는 그게 주된 구호로 등장해 결국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지 않나. 이처럼 직선제 개헌은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참 파란만장한 면을 지니고 있다.
독재와 인권 탄압에 제동을 건 국회와 이승만 정권의 불편한 관계
프레시안 : 개헌 문제를 짚으려면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어떠했나.
서중석 :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부터 독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행정 독재를 한 건 틀림없다. 행정부를 강력하게 발동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은 했다. 그러나 의회와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 의회와 순탄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이승만이 독재하는 데 상당한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헌 국회에서도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이승만이 수세에 많이 몰렸다. 그뿐만 아니라 2대 국회에서도 이승만은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때는 족청계도 완전히 거세된 시점인데, 그러면서 수십 년 동안 대부분 거수기 역할을 하는 국회가 출현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이전의 국회는 그렇지가 않았다. 예컨대 2대 국회는 전쟁 국회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전쟁 기간 동안 국회와 이 대통령 사이에 알력, 대결이 참 많았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전에서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비상 조치령)을 1950년 6월 28일에 만든다. 이것으로 굉장히 엄혹하게 '부역자'를 다스렸다. 중벌을 내렸는데 그것도 단심제로, 더욱이 증거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형태로 처벌하게 했다. 국회의원들은 이게 아주 문제가 많은 나쁜 조치라고 보고 이걸 견제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가령 사형(私刑)금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도 했는데, 법에 의하지 않고 개인들 그러니까 반공 단체 같은 데에서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몰아붙이고 테러를 하는 등의 일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는 이것도 거부했다. 그런 속에서 비상 조치령 때문에 '부역자'들이 너무나 심하게 당하니까 국회에서는 1950년 9월 '부역 행위 특별 처리법'이라는 것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나중에는 이 비상 조치령을 아예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법률을 국회에서 또 통과시킨다. 이것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또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국회하고 대통령은 대립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회가 이승만 정권을 강하게 공박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자 간의 대립이 더 심화된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이 당시 헌법에 있던 대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으면 자신이 선출될 수 없다고 직접 느끼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가 19, 부 143…첫 번째 직선제 개헌안 표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이승만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인가.
서중석 : 부통령 보궐 선거였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비판하고 1951년 5월 부통령직을 내놓지 않나. 그래서 그다음 부통령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대결 국면에서 양쪽 다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승만은 이갑성을 당선시키려 애를 많이 썼고, 반대파에서는 한민당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지만 이 당시에는 이승만과 굉장히 대립하던 김성수를 내세웠다. 그런데 김성수가 당선됐다. 그러면서 김성수가 이승만을 아주 세게 비판했다. 이시영도 사사건건 비판을 많이 했고 김성수는 그보다 더 강하게 비판했으니, 이승만 기준으로 보면 부통령을 두 번 다 '잘못' 만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승만 측에선 신당을 만들어서 국회도 장악하고 다음 대선도 안전하게 치르려 했는데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2년 1월 18일 이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가(可) 19, 부(否) 143, 기권 1이었다. 전 세계 의회 정치에서 대통령이 내놓은 중요한 개헌안 중 이렇게 가가 적게 나오는 게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인데 이렇게까지 적게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국회의원 대다수가 '내각 책임제로 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견제가 암암리에 상당히 들어가 있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지금은 어렵지 않느냐. 우리가 그런 선거 기구를 갖추지 못했다', 이런 주장도 상당히 나왔다. 그것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얼마 후 지방 자치 선거를 하는데 시의원, 도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하고 경기도, 강원도는 제외했다.
프레시안 : 제외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전쟁 지구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지역이 서울, 경기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지역들이 제외될 만큼 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어떻게 전국적인 선거를 일사불란하게 잘 치를 수 있겠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고, 또 이건 경찰이 개입하기가 더 쉬운 것이어서 공무원과 경찰의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국회 속기록을 보면 내각 책임제를 주장한 이유 중 이런 것도 있다. 한 의원이 이렇게 발언한다. "지금 대통령 직선제를 하는 나라는 필리핀 정도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프랑스도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었고, 미국은 간접 선거 형태를 띠고 있어 완전한 직접 선거는 아니지 않나. 그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엔 대통령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전 세계 문명국들이 대개 내각 책임제를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승만 독재를 견제하려면, 그런 대통령이 출현하지 않게 하려면 내각 책임제밖에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많은 국회의원이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이 임시정부 수반이 된다. 그러나 1946년 샤를 드골이 사임하면서 프랑스에는 내각 책임제 형태의 제4공화국이 등장한다. 1958년 알제리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대가 일으킨 쿠데타를 수습하기 위해 샤를 드골이 정계에 복귀한다. 알제리 사태 수습 후 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이 이뤄지며 제4공화국이 막을 내린다.)
우격다짐 개헌을 위해 동원된 관제 민의
프레시안 : 1952년 1월 18일 직선제 개헌안이 엄청난 표차로 부결됐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부결될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될 것까지는 생각을 못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든다. 하여튼 이 대통령은 최측근인 원외 자유당의 양우정을 불렀고, 일본에 가 있던 서북청년회의 문봉제도 귀국하게 했다.
그러면서 임시 수도이던 부산 일원에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이런 게 등장해 국회의원들을 막 협박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민의에 따라라. 국회는 해산하라' 하면서 각지에 백골이 들어 있는 표시가 담긴 데에다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문구를 써넣고 그랬다. 이름도 참 유치해 보이는데, 어쨌든 그런 이상한 단체들을 만들어서 막 협박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멈춘 게 아니라 지방 자치 선거를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서 했다. 4월에는 시읍면의회 선거를 했고, 5월에는 앞에서 말한 세 군데(서울, 경기, 강원)는 제외하고 도의회 의원 선거를 했다. 이건 이 부분을 연구한 사람이면 누구나 쓰는 것인데, 민의를 동원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민의라는 걸 아주 중요시했다. 그 민의라는 것이 자신이 만드는 민의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꼭 민의 형식을 취했다. 그 점에서는 민주주의자인가 보다. 꼭 민의 형식을 밟아 일을 처리하는 형태를 취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국회의원 너희들만 민의를 대변하느냐. 지방 의원들도 다 백성, 국민들이 뽑은 것 아니냐. 이 사람들 의견도 국회의원 너희들 의견과 똑같이 중요하다', 이런 식이었다.
사실 지방 자치제 선거는 소장파들이 크게 역점을 둔 법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그걸 비토(veto)했다. 그러다가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그랬으면 그 법을 실시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지만 이런 일이 상당히 있었다.
프레시안 : 다른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헌법에 참의원을 두라고 돼 있었는데도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원제에서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한다. 1952년 발췌 개헌 후 참의원 조항이 헌법에 명시됐으나 이승만 집권기에는 한 번도 구성되지 않았다. 4월혁명 후 제2공화국 때 참의원이 생겼다가 5.16쿠데타를 계기로 사라진다.) 도대체 이런 정치를 무슨 정치라고 봐야 하느냐. 이것도 나쁜 독재 정치의 하나 아니냐고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 차례 문제가 됐는데, 이 지방 자치 선거도 이뤄지지 않다가 갑자기 전쟁 중에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방 자치 선거는 한 번 하면 그다음에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참 이런 애달프다고 할까, 이상한 과정을 거쳐서 민주주의 제도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54년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정당 공천제가 실시되는데 그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생긴다. 한마디로 독재를 하기 위해 정당 공천제가 생긴다. 그러나 정당 공천제는 정당제에서 진일보한 제도임이 틀림없다. 지방 자치제도 마찬가지다.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안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자신의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걸 실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결국 이승만 독재, 영구 집권 시도에 이용됐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어쨌건 그런 걸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화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버스째 끌려가 국제 공산당으로 몰린 반공 투사들
프레시안 : 한국 민주주의 제도에 담긴 그러한 우여곡절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쨌건 그렇게 당선된 지방 의회 의원들도 백골단 등과 마찬가지로 실력 행사를 하나?
서중석 : 이제 도의원들, 시읍면의원들이 부산으로 쳐들어와서 열심히 데모를 한다. '국회는 해산하라. 너희가 무슨 민의를 대변하냐', 이런 식이었다. 지방 자치 선거가 치러지는 4월에 가면서 정국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한다. 우선 원내 자유당, 이때도 그렇게 불렀는데 그 원내 자유당과 민국당이 중심이 돼서 곽상훈 의원 외 122명(전체 123명)의 연서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123명이라는 건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재적 의원 3분의 2보다 1명이 많은 숫자였다. 그러면 이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국회의원 1명은 권력이 얼마든지 빼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장면이 국무총리에서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장택상이 바로 임명된다.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자마자 이 대통령이 3일 만에 바로 조치를 한 것이다. 장택상은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신라회라는 국회 조직을 갖고 있었다. 20명을 끼고 있었다. 이 20명이 어떤 쪽으로 가느냐,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승만이 장택상을 국무총리에 임명한 것 아니겠나.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은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약간 고쳐서 5월 14일 국회에 제출했다. 두 개의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된 것이다. 그리고 5월 24일 내무부 장관에 이범석을 앉힌다. 이범석은 그전부터 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었는데, 이범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본때를 보여준 게 바로 이 시절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프레시안 :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한 직후 부산 정치 파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서중석 :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에 앉힌 다음 날인 5월 25일 부산 등 지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비상 계엄령이 사실은 상당히 논란이 됐던 것이다. 당연히 육군 참모총장인 이종찬을 비상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일제 때 만주군 중좌를 지냈고 안두희 재판 때 재판장이었던 원용덕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된 건 이종찬이 군대 동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이종찬이 항명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군은 정치에 동원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계엄령 선포에 동의하지 않았고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회신을 전군에 돌렸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것 때문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중립을 주장한 훌륭한 군인이라고 해서 군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으로 오랫동안 꼽히게 된다. 이종찬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 아니냐, 그렇게 보고 있다.
5월 26일 유명한 부산 정치 파동이 본격화된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자기 차로 가면 불안하니까 통근 버스를 탔다. 그 인원은 자료마다 다른데, 옛날엔 50여 명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40여 명으로 많이 나온다. 어쨌건 그 버스를 헌병대에서 견인해서 헌병대로 데려갔다. 거기서 '누구누구 나와라', 이렇게 명단을 불렀다. 임흥순, 서범석 같은 사람들이 바로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된다. 곽상훈까지 10명을 구속하는데, 정말 반공 투사 중의 반공 투사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곽상훈이 얼마나 유명한, 참 극단적인 반공 투사였나. 그런데 이 사람들이 국제 공산당으로 몰려버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1951년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겨냥했던 대남 간첩단 사건보다도 더 있을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건 회기 중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을 보장한 헌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헌법을 유린한 것이었다. 국회 동의도 없이 그냥 잡아가고 출석 부르듯이 명단을 불러서 데려간 것이었다. 이때 원내 자유당의 오위영이라든가 엄상섭, 김영선, 나중에 장면 정권의 최고 핵심 인물이 되는 이런 사람들과 윤길중 등은 꼭꼭 숨어버렸다. 50명 정도의 국회의원들이 부산, 마산 일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숨어 다녔다고 한다. 참 창피한 정치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오제도와 함께 국민보도연맹을 만든 유명한 사상 검사였고 장면이 국무총리를 할 때는 그 비서실장이었던, 그래서 장면 추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선우종원은 얼마 후 일본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종원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에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이상한 성격이 있었다. 이 국제 공산당 사건에 대해서 몇 번에 걸쳐서 담화를 발표한다. 이게 진짜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누가 믿었겠나. 하여튼 신익희 국회의장, 조봉암 국회 부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서 '이럴 수는 없다'고 항의했다. 아울러 미국 신문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사설에서 "전체주의 경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쿠데타로써 그(이승만)의 정권을 영속화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 축출 계획에서 발췌 개헌안까지…부산 정치 파동과 미국
서중석 : 사태가 이렇게 되니까 국회의원들은 5월 28일 즉각 계엄령 해제를 결의했다. 국회에서 이렇게 결의했으면,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 계엄을 해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1950∼1973년에 있었던 유엔 위원단)에서도 계엄 해제와 구금 중인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초헌법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할까. 그러니까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사임을 한 것이다. 사임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보수 정치가들의 여러 글 가운데 이것보다 더 강한 어투로 비난한 것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아주 강력한 어투로 돼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은 군대, 경찰, 깡패, 청년단, 지방 의회 의원들을 동원해 국회를 계속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다. 그런 속에서 6월 21일 악명 높은 발췌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발췌 개헌안이라는 건 뻔한 것이다. 앞에서 두 개의 개헌안이 상정됐다고 했는데 그 둘을 발췌해서 합쳐 놨다, 이런 뜻이다.
누가 이런 꾀를 냈느냐. 이걸 갖고도 논란이 됐는데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장택상 국무총리다', 오랫동안 이렇게 이야기됐다. 내가 1960∼1970년대에 공부할 때도 대개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허정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회고록을 쓰고 자료를 남기면서 바뀌었다. 제일 정확한 건 허정이다. 왜냐하면 허정은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외국에 나가 있을 때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고 해서 유엔, 미군 쪽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허정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허정은 '사실은 유엔 한국위원단 사무총장 메듀(프랑스인)가 나를 직접 찾아와서 정치 파동 수습책으로 발췌 개헌안을 제시했는데 이 발췌 개헌안은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와 메듀 사무총장이 만든 것이다. 이 방식으로 처리하자는 식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걸 장택상이 국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밝혔다. 장택상도 나중에 회고록에 "그 이면에는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책'이 있었다"고 썼다. 허정 말이 맞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미국 측 반응을 보면 엇박자 느낌이 든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 축출 계획을 미국 측에서 세웠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발췌 개헌안 아이디어와는 결이 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이 당시 이 대통령이 하는 일이 너무 지나치니까 앨런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는 이승만을 축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미군이 한때 쿠데타 계획안을 세워놓기는 했다. 그러나 이때는 전시였기 때문에 실제 주도권은 유엔군 사령관(주한 미군 사령관, 미국 8군 사령관)에게 있었는데,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정치 혼란이 더 악화돼 전쟁 수행에 지장이 생기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회를 압박했다. 당시 '신탁 통치를 실시할지도 모른다. 군정을 미군이 실시할지도 모른다', 이런 소문까지 나돌고 그랬다. 이런 것들은 이승만에 대한 협박이라기보다는 국회에 대한 협박이 아니었나, 국회는 여러 측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월 하순에서 7월로 가는 길목에서 국회는 큰 어려움에 쌓이게 된다. 그러면서 대통령 임기가 언제냐 하는 논쟁이 일어났다.
의사당에 감금된 국회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국무총리
프레시안 : 임기 논쟁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서중석 :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게 8월 15일인데, 개헌안을 언제 통과시키느냐에 따라서 새 대통령은 8월 15일 이후에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국가 권력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서 '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된 1948년 7월 20일 이때부터 대통령이 활동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게 기산일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많은 의원들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취임 선서를 한, 그래서 국가 원수가 된 1948년 7월 24일이 기산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문제가 심각했다. 날짜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이걸 해결한 것도 미국 대사 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는 1948년 8월 15일을 기산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현실적 이유에 몰리고 있었다. 도대체가 7월 24일로 한다고 할 경우 대통령을 그때까지 뽑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8월 15일이라고 하더라도, 빨리 뭔가 이뤄지지 않으면 권력 공백이 나타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6월 말에 '민중 대표들이 강청하니까 더 이상 국회 해산을 미룰 수 없다. 해야겠다'고 발표했고 국회 내부에서는 이갑성 의원 등이 '국회 해산하자. 자폭하자', 이렇게 주장했다. 그런 속에서 7월 1일 장택상 총리가 국회의원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프레시안 : 장택상 총리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국회의원 40∼50명이 쫓기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표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법에는 개헌선이 재적 의원의 3분의 2로 돼 있고 따라서 123명이 찬성해야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도망을 다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걸 채울 수 있었겠나. 그리고 국제 공산당 사건으로 형무소에 가 있는 국회의원들도 있지 않았나. 그쪽도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너희들, 이제 들어와라' 하면서 경찰을 풀어서 피신 의원들을 강제 등원시키게 된다.
7월 2일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했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공격을 받거나 체포를 당할까 두려워 회석(會席)에 나오기를 꺼리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은 (대한)민국을 경찰국가라고 날인을 찍는 분자들이 창조하고 전파시키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어서 "헌병이나 국립 경찰로서는 여하한 경우라도 구체적인 죄목 없이 국회의원이나 일반 시민을 체포, 구금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7월 3일 국제 공산당 음모 사건으로 잡힌 국회의원들이 39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고 나서 국회 안에서 원외 자유당의 남송학 국회의원 이 사람이 출입증을 일일이 내줬다. 이 사람이 준 출입증이 없으면 국회의원들이 국회 의사당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들어온 사람은 꽉 잡아놔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감금된 의원들은 꼭 수재민 수용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 당시 장택상 총리도 화장실에 가려다가 뺨 맞고 의사당 안으로 쫓겨 와서 국회의원들하고 오후 6시까지 감금됐다고 김동성 국회 부의장이 쓴 글에 나온다. 참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헌법 어긴 발췌 개헌안, 기립 표결로 통과
프레시안 : 어이없는 실상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는 데 조봉암이 협조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의장단한테 문제가 제기됐다.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킬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신익희가 '이건 통과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조봉암이 찬성했고 김동성 이 사람도 거기에 따라간 것으로 돼 있다. 그래서 조봉암이 발췌 개헌안 통과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익희 전기를 보면 국회의장실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때 유엔 한국위원단의 한 임원이 '이대로 계속 간다면 유엔에서는 신탁 통치안을 제기할 테니까 빨리 결말을 내달라',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봉암이 장택상한테 "신탁 통치보다는 어쨌든 이 박사 치하가 낫지 않겠소"라고 하면서 수습하자고 했다고 돼 있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건 이런 과정을 거쳐 7월 4일 드디어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다. 그런데 이때 기립 표결을 하게 했다.
프레시안 :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아니고 헌법을 바꾸는 중요한 일을 기립 표결에 부쳤다는 것도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중석 : 신익희는 이건 중요한 안건이기 때문에 비밀 투표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기립 표결을 해서 재적 의원 183명 가운데 166명이 참석해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됐다. 기권 3표가 누구 것인지는 지금까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발췌 개헌안이라는 악명 높은 개헌안이 통과된다. 이게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헌안인데 의도가 정말 나빴던 것도 큰 문제였고 그 수순을 밟는 데에서도 헌법, 법률을 유린하고 폭력을 동원해 통과시켰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발췌 개헌안은 두 가지 점에서 헌법을 어겼고 문제가 있다고들 지적하고 있다. 우선 30일 이상 헌법안을 공고한 후 국회 표결에 부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발췌 개헌안은 6월 21일에 제출돼 7월 4일에 표결했다. 30일 이상 공고하지 않았다. 헌법에 있는 공고 기간을 어긴 것이다. 그다음에 기립 표결도 문제다. 헌법 개정안 같은 중요한 것을 어떻게 기립 표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프레시안 : 임기 논쟁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서중석 :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게 8월 15일인데, 개헌안을 언제 통과시키느냐에 따라서 새 대통령은 8월 15일 이후에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국가 권력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서 '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된 1948년 7월 20일 이때부터 대통령이 활동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게 기산일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많은 의원들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취임 선서를 한, 그래서 국가 원수가 된 1948년 7월 24일이 기산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문제가 심각했다. 날짜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이걸 해결한 것도 미국 대사 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는 1948년 8월 15일을 기산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현실적 이유에 몰리고 있었다. 도대체가 7월 24일로 한다고 할 경우 대통령을 그때까지 뽑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8월 15일이라고 하더라도, 빨리 뭔가 이뤄지지 않으면 권력 공백이 나타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6월 말에 '민중 대표들이 강청하니까 더 이상 국회 해산을 미룰 수 없다. 해야겠다'고 발표했고 국회 내부에서는 이갑성 의원 등이 '국회 해산하자. 자폭하자', 이렇게 주장했다. 그런 속에서 7월 1일 장택상 총리가 국회의원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프레시안 : 장택상 총리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국회의원 40∼50명이 쫓기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표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법에는 개헌선이 재적 의원의 3분의 2로 돼 있고 따라서 123명이 찬성해야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도망을 다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걸 채울 수 있었겠나. 그리고 국제 공산당 사건으로 형무소에 가 있는 국회의원들도 있지 않았나. 그쪽도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너희들, 이제 들어와라' 하면서 경찰을 풀어서 피신 의원들을 강제 등원시키게 된다.
7월 2일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했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공격을 받거나 체포를 당할까 두려워 회석(會席)에 나오기를 꺼리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은 (대한)민국을 경찰국가라고 날인을 찍는 분자들이 창조하고 전파시키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어서 "헌병이나 국립 경찰로서는 여하한 경우라도 구체적인 죄목 없이 국회의원이나 일반 시민을 체포, 구금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7월 3일 국제 공산당 음모 사건으로 잡힌 국회의원들이 39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고 나서 국회 안에서 원외 자유당의 남송학 국회의원 이 사람이 출입증을 일일이 내줬다. 이 사람이 준 출입증이 없으면 국회의원들이 국회 의사당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들어온 사람은 꽉 잡아놔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감금된 의원들은 꼭 수재민 수용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 당시 장택상 총리도 화장실에 가려다가 뺨 맞고 의사당 안으로 쫓겨 와서 국회의원들하고 오후 6시까지 감금됐다고 김동성 국회 부의장이 쓴 글에 나온다. 참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헌법 어긴 발췌 개헌안, 기립 표결로 통과
서중석 :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의장단한테 문제가 제기됐다.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킬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신익희가 '이건 통과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조봉암이 찬성했고 김동성 이 사람도 거기에 따라간 것으로 돼 있다. 그래서 조봉암이 발췌 개헌안 통과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익희 전기를 보면 국회의장실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때 유엔 한국위원단의 한 임원이 '이대로 계속 간다면 유엔에서는 신탁 통치안을 제기할 테니까 빨리 결말을 내달라',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봉암이 장택상한테 "신탁 통치보다는 어쨌든 이 박사 치하가 낫지 않겠소"라고 하면서 수습하자고 했다고 돼 있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건 이런 과정을 거쳐 7월 4일 드디어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다. 그런데 이때 기립 표결을 하게 했다.
프레시안 :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아니고 헌법을 바꾸는 중요한 일을 기립 표결에 부쳤다는 것도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중석 : 신익희는 이건 중요한 안건이기 때문에 비밀 투표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기립 표결을 해서 재적 의원 183명 가운데 166명이 참석해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됐다. 기권 3표가 누구 것인지는 지금까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발췌 개헌안이라는 악명 높은 개헌안이 통과된다. 이게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헌안인데 의도가 정말 나빴던 것도 큰 문제였고 그 수순을 밟는 데에서도 헌법, 법률을 유린하고 폭력을 동원해 통과시켰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발췌 개헌안은 두 가지 점에서 헌법을 어겼고 문제가 있다고들 지적하고 있다. 우선 30일 이상 헌법안을 공고한 후 국회 표결에 부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발췌 개헌안은 6월 21일에 제출돼 7월 4일에 표결했다. 30일 이상 공고하지 않았다. 헌법에 있는 공고 기간을 어긴 것이다. 그다음에 기립 표결도 문제다. 헌법 개정안 같은 중요한 것을 어떻게 기립 표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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