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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함께 만든 두 <조선> 기자, 왜 원수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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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함께 만든 두 <조선> 기자, 왜 원수가 됐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5> 조봉암과 진보당,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쟁쟁한 사회주의자로 활약했던 조봉암은 해방 후 극적인 방향 전환을 한다. 그러한 전환을 계기로 조봉암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걸어간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가.

서중석 : 해방 3년기이기도 한 미군정기에 조봉암은 상당히 많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여론 조사 결과 중에는 조봉암을 주요 지도자로 꼽는 게 상당히 나온 것도 있다. 일제 때 조봉암은 감옥소에 가기 전 대단한 활동을 많이 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해방 직후 조봉암은 건준 인천 지부를 조직할 때 지원했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만들어질 때 인천 민전 의장을 맡는다. 인천 민전 의장, 이건 사실 한직인데 그런 직책에 있었다. '거물 조봉암을 연상할 때 이건 너무 안 맞는 것 아니냐', 해방 직후에도 그렇게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점보다도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한 건 1946년 5월 7일 자 주요 일간지들에 실린 조봉암의 글이다. 우파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은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제목은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다. 꽤 긴 글인데 신문 한 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글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조봉암 얘기가 다시 화제가 된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이 사신이 우파 신문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사건은 우선 시점이 아주 중요하다. 1946년 5월 6일경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더 이상 해봤자 소용없다'는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일단 휴회한다', 이 상태가 된 것이다. 휴회를 5월 6일에 결정했는지 8일에 결정했는지는 자료에 안 나오는데, 어쨌건 5월 6일부터 미소공위는 휴회 상태로 들어간다. 그 직후에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이게 나온 것이다.

이때 이것만 나온 게 아니었다. 유명한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폐 사건이 거의 같은 시기에 또 우파 신문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이건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몇 달 동안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5월 9일에는 여운형의 친동생 여운홍이 조선인민당의 문제점을 비난하면서 탈당한 사건이 크게 보도된다. 여운홍은 중앙방송을 통해 탈당 성명서를 9일 발표한다. 형식은 조선인민당 탈당 성명서로 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세 가지 중요한 사건,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정판사 위폐 사건이지만, 이 세 사건에서 공통된 것은 미군정의 조선공산당 죽이기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봉암의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도 미군 방첩대(CIC) 공작으로 발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봉암이 이걸 작성한 건 그 이전인데, 발표된 날짜는 딱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간 직후다. 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의 공산당 죽이기 일환으로 이게 발표됐다는 게 중요하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고 미군정이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조선공산당은 '날조된 사건'이며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발표 후 미군정은 이 사건을 명분 삼아 조선공산당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로는 이 사건의 진위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평가가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 우파 신문들은 조봉암의 사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크게 보도했다. 이미지는 1946년 5월 7일 자 <동아일보> 2면('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는 화면 왼쪽 부분). ⓒ<동아일보> 갈무리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에서 조선공산당을 조목조목 비판

프레시안 :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에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어떤 부분을 비판했나.

서중석 : 조봉암이 조선공산당을 비판한 것이 옳은가 그른가, 이 문제가 논란이 될 텐데 비판의 핵심은 이렇다. 첫째, 조봉암은 인민위원회가 조직과 운영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현재 인민위원회는 비공산 요소가 거의 없어 공산주의자의 정치 구락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비판했다. 인민위원회가 말만 인민위원회지 실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움직이는 공산주의 단체와 다름없게 됐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건 인민위원회의 원래 출범 의도와는 다른 것이라고 조봉암은 지적했다.

두 번째 지적도 이와 비슷하다. 조봉암은 민전에 공산당원이 과도하게 침투해서, 공산당원이 아니면서 좌익을 지지하는 많은 비당(非黨)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부분은 첫 번째와 같은 이야기다. 민전은 모든 진보적 정당, 사회 단체가 들어와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거기에 충실한 원칙으로 운용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공산당원이 좌지우지하는 곳이 된다면 민전에 속한 방대한 대중, 군중이 제대로 폭넓게 활동하는 걸 막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지적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난 본다. 조선공산당이 자신들의 외곽 조직 비슷한 식으로 인민위원회와 민전을 활용하는 측면이 좀 있었다.

프레시안 : 그 이외에 조봉암은 어떤 부분을 지적했나.

서중석 : 세 번째 지적은 당시 크게 논란이 된 것인데, 조봉암은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 투쟁 방침은 진실로 옳았지만 기술적으로 졸렬했기 때문에 일반 군중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고 지적했다. 이것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공산당은 찬탁 세력이다', 이런 말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나는 책과 논문에서 계속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조선공산당의 3상회의 지지 투쟁은 원칙주의, 근본주의에 너무나 충실했고, 민족 감정 같은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조금 더 신중하게 나아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 면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당시 신탁 통치 부분은 한국인 다수가 '이건 있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신탁 통치까지 포함해서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할 때는 그게 왜 그런 것인지 일반 대중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조선공산당은 그런 작업도 충분히 하지 않았다.

특히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 나중에 동대문운동장이 되고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바뀐 거기서 대규모 군중 집회가 열린다.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큰 집회다. 10만 이상이 모였다고 자료에 나오는데, 이 집회에 참석한 수많은 공산주의 단체 조직원들은 이걸 반탁 대회로 알고 왔다. 그런데 연설하는 것들을 보니 전부 3상회의 결정 지지 연설을 하고 반탁은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서, 자기들이 써가지고 온 슬로건조차 바꿔버리는 식으로 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도 되는 건가?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서울로 올라오던 공산당원들이나 서울에 있던 여러 지파 공산당 쪽을 사전에 설득하면서 '이 집회가 이런 집회다. 그렇게 알고 와라',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집회 장소에 와서야 많은 사람이 이게 3상회의 결정 지지 대회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이런 것은 조선공산당을 지지하는 군중조차 '이거 좀 이상한데', 이런 생각을 안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전을 조직할 때 지방의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중앙 간부 및 지방 간부 연석회의를 여는데, 그 자리에서도 중앙 간부 일부와 지방 간부 특히 경상도 쪽 간부들이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 투쟁 방침과 관련해 당이 잘못한 게 많다', 이런 지적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도 조봉암이 지적을 잘한 것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해서는 안 될 말을 미군 공작에 의해 했다?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

프레시안 : 조봉암이 이러한 비판을 할 무렵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조봉암이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은 당시 조선공산당을 주도하던 재건파가 너무 성급하게 모든 것을 자신들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해나가려 한 데서 비롯한 일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을 진보적 운동에 폭넓게 규합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러한 세 가지 지적과 더불어 조봉암이 한 비판 중에서 조선공산당 간부들한테 제일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당내 인사 문제에서 당이 무원칙하다. 종파적으로 당이 운영되고 있다'며 당 지도부를 공격한 것이었다. 당 지도부 공격, 이게 제일 핵심이 아닐까 싶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조봉암이 소외당하니까 이런 공격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게 된다.

당을 종파적으로 운영한 것이 큰 문제라는 비판은 조봉암만 한 게 아니었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가 발표되고 나서 석 달 후인 1946년 8월 좌익 3당(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이 이끌던 남조선신민당) 합당 문제가 제기되면서 조선공산당 내에서 재건파를 강하게 비난하는 세력들도 이 문제를 들고나온다. 세 당을 합칠 때 여운형을 지지하는 세력과 박헌영을 지지하는 세력, 이 두 개로 쫙 갈리지 않나. 그때 여운형과 연합한 조선공산당 간부들을 대회파라고 부르고 박헌영 쪽을 간부파로 많이 불렀는데, 대회파가 간부파를 비판한 것과 조봉암이 당 운영을 비판한 것은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대회파로 불린 사람들이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이들은 박헌영 일파가 당을 자색주의로 이끌어 당의 발전을 저해하고 당을 분열의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이야기한다. 자색주의는 자기 색깔주의라는 뜻이다. (이 세 당이 통합돼 1946년 11월에 만들어진 것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다.)

반간부파는 명성 면에서는 다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강진, 서중석, 김철수, 이정윤, 김근, 문갑송 등이었는데 감옥소에도 많이 간 사람들이고 당시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저명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그런 비난을 같이했는데, 그러면서 조선공산당 정치국 위원이던 강진이 '다시 당의 열성 동지들에게'라는 글을 발표한다.

프레시안 : 강진의 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이 글에서 강진은 당이 어떻게 운영됐는가를 지적하며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치국 위원이었으니까 가장 잘 알지 않았겠나. 강진은 1945년 9월에 당을 재건한 후 당권파가 아닌 동지들은 당무로부터 완전히 고립돼 있었고 당권파는 중요한 당무를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다. 중앙위원회에 모든 걸 보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각종 레벨에서 온 제안이나 평가 등을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지 않고 당권파가 자기 그룹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 재정을 이들이 장악했고 지방에 자기 그룹 사람을 보냈는데 특히 박헌영, 그리고 이주하가 들어가 있던 서기국은 완전히 그들의 장중(掌中)에 들어가 정치국과 조직국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고 강진은 주장했다.

당 운영이 이처럼 잘못된 것이 결국 대회파와 간부파의 대결로 나타나면서 조선공산당 활동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조성하게 되는데, 조봉암은 그런 것들을 대회파보다 먼저 지적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에서 조봉암이 지적한 건 '해서는 안 될 말을 미군 공작에 의해서 했다', 이런 건 아니고 공산당 노선의 문제점을 자신의 관점에서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 계급 독재도, 자본 계급 전제도 반대하며 확실하게 방향 전환

프레시안 :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가 언론에 공개된 데 이어 그다음 달(1946년 6월)에는 공산당 및 공산당이 지도하는 모든 운동을 부인하는 조봉암 명의의 성명서가 발표된다. 조봉암은 왜 이때 이러한 방향 전환을 한 것인가.

이와 관련해, 박헌영 쪽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점도 적잖게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보인 모습에 대한 실망감과 비판 의식이 더 큰 원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해방 이전부터 자신이 관여한 여러 운동에 대한 일정한 반성이 방향 전환의 밑바탕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것이었다면, 미군이 조봉암의 편지를 공개해 좌익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지 않았더라도 박헌영 지도부의 조선공산당 노선에서 조봉암이 벗어났을 가능성은 이미 충분히 있었다(물론 그 시기와 방식은 달랐겠지만)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중석 : 조봉암이 방향 전환을 확실히 하는 것이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이 문서가 발표된 때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건 철저하게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쓴 문서다. 이 문서를 작성한 건 5월 7일보다 훨씬 전인데, 그때만 해도 조봉암은 분명한 공산주의자였다. (1946년 3월 중순 인천 지구 미군 방첩대가 민전 인천 지부를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으로부터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초고를 압수했다. 그것이 그해 5월 7일 자 신문에 공개된 것이다.)

조봉암은 이 서신이 발표된 지 8일 후인 5월 15일 인천 민전 의장에서 사임한다. 6월 23일 민전 주최로 미소공위를 촉진하는 인천 시민 대회가 열렸는데 여운형, 이강국, 김원봉 같은 거물들이 여기서 연설하고 그랬다. 바로 그날 좌익, 주로 공산당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뿌리는데 '여기부터 분명히 조봉암은 공산당 노선과 결별했다', 이렇게들 많이 보고 있다.

사실 이날 배포된 성명서도 미군 CIC 공작 아니냐고 보고 있다. 1946년 6월 조봉암은 미군 CIC에 잡혀갔다가 이 대회 전날(22일) 석방되는데, 그 직후 성명서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명서를 보면 상당히 친미적인 언사가 들어가 있다.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잘 평가해주는 것이었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 성명서는 공작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성명서에서 어떻게 공산당을 비난했느냐.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 제목도 그렇게 돼 있는데 조봉암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자유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어느 한 계급이나 한 정당의 독재, 전제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일당 독재가 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조선 민족은 공산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공산당 집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조봉암은 공산당이 소련에만 의존하고 미국의 이상을 반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에 노동 계급의 독재나 자본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명시하는데, 이건 여운형도 항상 강력하게 주장했고 조봉암이 그 후 정치 활동에서 평생 주장하게 되는 내용이다.

▲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방향 전환을 한 조봉암은 노동 계급 독재도, 자본 계급 전제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조봉암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러한 생각을 견지했다. 사진은 2011년 7월 15일에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 및 업적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 모습. ⓒ연합뉴스


해방 이전부터 조봉암에게 따라붙은 비판들

프레시안 : 박헌영이 이끈 경성콤그룹 쪽에서 해방 이전부터 조봉암을 비판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그렇게 비판한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조봉암하고 박헌영은 해방 후 극적으로 갈라서면서 구설에 더 많이 오르게 되지만, 오래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조봉암이 공산주의자로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에서 맹활약할 때에도 그렇고, 신흥청년동맹에서도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다. 두 사람은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로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들이 다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떤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두 사람이 별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조봉암이 여러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 혹은 비난을 받게 되고, 그러면서 해방 후 조봉암이 아주 찬밥 신세가 돼버리는 걸 볼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로 나오는 게 몇 가지 있다.

우선 첫째는 여성 관계를 거론한다.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사회주의자들에겐 유명한 애인들이 있었다. 박헌영에겐 주세죽이라고 서양인처럼 매끄럽게 생긴 여성이 있지 않았나. 주세죽은 우리나라 초기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에 들어가는 사람이고 집안도 잘사는 편이었는데, 공산주의자가 돼서 박헌영과 살고 나중에는 김단야와도 사는 사람이다. 임원근은 허정숙과 애인 관계였다. 허정숙은 임원근 말고 다른 동지들하고도 나중에 깊은 관계를 맺는다. 서울청년회계의 대표 격인 김사국은 박원희라는 여성 사회주의자와 부부 관계를 맺었다. 김단야는 고명자와 애인 관계였다.

조봉암은 김조이와 1924년에 결혼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 결혼이 정식 결혼인지는 알 수 없다. 김조이는 1925년 조봉암의 노력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는데, 그다음부터는 조봉암과 헤어져서 활동하게 된다. 나중에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1934년에 체포돼 3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징역형을 모두 합하면 5∼6년형을 그 후에 받다가 1942년에 와서 인천에 있던 조봉암과 재결합한다.

그런데 조봉암한테는 애인이 있었다. 김이옥이라고 강화도의 부유한 집 딸이었다. 이 사람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이게 경기여고 전신인데 그 학교에 다녔다. 1910년대는 전국에 '여고보'(여자고등보통학교)가 거의 없던 때인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고 이어서 이화여전에 다녔으니 여자로서 최고로 좋은 데를 다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부잣집 딸이고 미인이었던 이 사람은 조봉암과 나이 차이는 꽤 났지만 교회에 다닐 때 애인 관계가 됐다고 한다. 조봉암이 3.1운동으로 감옥소에 갔을 때 옥바라지를 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됐는데, 집에서는 절대로 용납을 안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걸리던 병인 결핵에 김이옥도 걸린다. 폐결핵에 걸린 김이옥은 상해로 와서 조봉암과 재회했다. 그때는 김조이가 없을 때였으니 두 사람은 같이 살았다. 그렇게 해서 상해에서 난 딸이라는 뜻을 지닌 호정 씨(조호정)가 태어나게 된다. 그 후 조봉암이 다시 체포되고 감옥소에 들어갔을 때 김이옥 이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조봉암은 1942년에 김조이와 재결합했는데, 김조이와는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헤어지게 된다. 김조이는 납북됐다고 하는데, 하여튼 전쟁 발발 직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런데 바로 이 여성 문제, 즉 김이옥과 같이 사는 문제가 '동지 김조이가 있는데 그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구설에 오른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건 허정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완고한 생각을 갖는 게 사회주의자다운 것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남녀 관계 이외에 조봉암이 비판받은 사안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조봉암에게 붙은 또 다른 비난은 공금을 유용했다는 것이다. 1927년에 조봉암은 범태평양노동조합 1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태로'라고 불린 유명한 대회인데 이때 공금을 같이 간 동지들의 생활비, 여비 같은 것으로 썼다고 돼 있다. 어떻게 공금을 유용할 수 있느냐고 해서, 이것으로도 계속 비난을 받았다. 이것 말고도 강탈 사건이 있었는데, 조봉암이 했다는 게 아니라 조봉암 밑에 있던 사람이 저질렀다는 것으로 이건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 하여튼 이런 문제들 때문에 조봉암이 해방 후 재건파 쪽으로부터 특히 비난을 많이 받게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박헌영과 조봉암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 핵심 문제는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헤게모니 문제 같은 건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1925∼1927년 활동으로 보면 조봉암은 한국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유명한 공산주의자 중 한 명 아니었나. 그런 사람을 어떻게 나중에 쓸 것인가 하는 건 쉽지 않은 문제이긴 했다. 양측이 헤게모니 싸움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헤게모니 문제보다 더 컸던 건 두 사람의 경험과 연관된 노선 문제가 아니었나, 난 그런 생각을 한다.

조봉암과 박헌영이 갈라선 기본 요인은 경험과 연관된 노선 문제였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서중석 : 무슨 이야기냐 하면 조봉암은 좌우 합작, 민족 연합 또는 민족 협동 같은 걸 주장하면서 민족 유일당 운동에서도 적극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활동한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반제동맹 같은 전선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조봉암은 주로 그런 좌우 합작, 민족 협동, 전선체 활동을 많이 했다. 조봉암이 그런 활동을 하던 시기에 '코민테른이나 소련공산당은 극좌 노선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조봉암이 그런 노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그 노선에 따라 움직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박헌영은 이와 달랐다. 1925년 신의주 사건으로 체포돼 감옥소에 들어간 박헌영은 미친 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 1927년 말 감옥소에서 나오지 않나. 그 후 소련으로 탈출해 1929년 국제레닌학교에 들어간다. 그러고는 조봉암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것과 달리 박헌영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다.

(체포된 후 심한 고문을 당한 박헌영은 재판 과정에서 정신이상자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박헌영의 연극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박헌영 측은 박헌영의 그러한 상태를 근거로 몇 차례 병보석을 신청했다. 처음엔 기각됐으나 1927년 11월 박헌영은 결국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훗날 소설 <상록수>를 쓰는 작가이자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던 심훈은 이때 고문으로 망가진 친구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쓰기도 한다. 감옥에서 나온 후 요양하던 박헌영은 이듬해 만삭이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은밀히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한다. 그 후 주세죽은 모스크바로 향하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딸 비비안나를 낳는다. 박헌영·주세죽 부부의 탈출 소식은 당시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다.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이 이 탈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 모스크바 시절 박헌영-주세죽 부부와 딸 비비안나.


이즈음 열린 제6회 코민테른 대회(1928년 7∼8월)에서 극좌 노선이 채택된다. 스탈린이 트로츠키파를 축출하고 소련공산당을 장악하는데, 그와 함께 코민테른 노선이 뚜렷하게 극좌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해 12월 코민테른에서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노선과 임무를 밝힌 '12월 테제'를 작성하는데, 계급 노선에 아주 충실하도록 한 것이었다.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이나 연합은 있을 수 없다. 민족주의의 문제점과 비혁명적·기회주의적 성격을 폭로·공격하고 단호히 지적하라. 혁명적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펴서 공산당의 혁명적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박헌영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게 12월 테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1932년에 상해로 와서 <꼼무니스트>라는 유명한 소책자를 내고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한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은 거의 다 12월 테제에 따라 이뤄진다. 그전에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 해체 지시를 하고, 12월 테제에서 '혁명적 공산당으로 조선공산당을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는 지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2월 테제에 담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원칙에 따라 당 재건 운동을 편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박헌영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펴는 세력은 거의 다 12월 테제에 입각해서 했다고 볼 수 있다. 박헌영은 그런 활동을 하던 중 1933년 상해에서 체포된다.

그러니까 박헌영은 좋게 말하면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의 정통 노선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극좌 노선, 나중에 계급 대 계급 노선으로 불리는 제6회 대회의 노선에 따랐던 것이다. 그와 달리 조봉암은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있었고 좌우 합작, 민족 협동, 전선체 활동을 많이 했다. 그런 점에서도 두 사람은 같이 일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조봉암은 거물 아니었나. 다른 사람 같으면 박헌영한테 고개 숙이고 들어가면 되는데 조봉암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것도 있고,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의 성격이 판이했다. 조봉암은 나중에 대중적 정치가로서 대단한 면모를 과시하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중적 활동에 적합한 대중 정치가의 면모가 뚜렷했다. 조봉암이 비난당한 몇 가지 이유를 앞에서 말했는데, 엄격한 공산당 규율에 과연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면이 조봉암에겐 있었다. 그에 비해 박헌영은 원칙주의자로서, 즉 철저한 원칙과 그 노선에 따라 조직 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개성, 성격, 활동 방법 같은 데서 상당히 큰 차이가 났던 것이 1930년 전후의 활동 차이와 함께 결국 두 사람이 크게 갈라설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요인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보인다.

극우 성향 장택상이 조봉암 목숨 구하려 동분서주한 이유

ⓒ오월의봄
프레시안 :
조봉암이 극적으로 박헌영과 갈라서며 방향 전환을 했지만, 한민당 등에는 이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서중석 : 나중에 선거 때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이나 민주당이 조봉암을 계속 색깔로 몰아붙이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병옥, 김준연 같은 한민당, 민국당, 민주당의 간부들은 '조봉암은 전향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건 과연 적절한 이야기인가? 그것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예컨대 나중에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장택상이 구명 운동을 많이 한다. 장택상이 극우에 가까운 사람인 걸 생각하면 이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면 장택상은 왜 그랬느냐. 장택상은 조봉암한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뭐냐 하면,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같이 국회 부의장을 하고 있었는데 조봉암이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을 하고 챙기면서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김조이하고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장택상이 보기에 '아, 북쪽에서 쳐들어왔는데 북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면 조봉암이 그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장택상은 '전쟁을 맞이했을 때 그냥 도망가지 않고 조봉암처럼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사람은 없다. 난 거기서 조봉암이 정말 큰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조봉암은 훌륭한 사람이다', 이걸 많이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구명 운동을 편다. 이런 장택상의 예를 많이 든다.

사람들이 또 하나 예로 많이 드는 것이 한국전쟁이 났을 때 북한 쪽에서 제일 먼저 조봉암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조봉암하고 북한은 사이가 나빴다는 것을 많이 예로 든다. 그런 것은 박헌영 연설에도 나온다. 박헌영과 조봉암은 참 악연인 것 같은데, 예컨대 전쟁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1950년 1월에 박헌영이 발표한 '남조선 현 정세와 애국적 정당, 사회 단체들의 임무'라는 글을 보면 비판 대상의 제일 앞에 조봉암이 들어 있다. 조봉암, 별 성(星) 자 쓰는 김성숙, 조동호, 장건상 등을 "인민과 조국과 민주 진영을 버리고 미제와 그 주구 역도 편에 넘어가서 인민의 대열을 분열, 파괴하는 미 제국주의의 유급 간첩"이라고 규정했다. 김성숙 이 양반도 북한을 아주 비판한 사람이고, 조동호 이 사람은 저명한 공산주의자였지만 여운형과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사실 1948년 정부의 첫 번째 농림부 장관으로 참여한 후 활동한 걸 쭉 보면 조봉암은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긴 글에서건 짧은 글에서건 계속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여러 차례의 선거 운동에서 한 연설이나 정강, 정책 등을 통해서도 그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조봉암은 탁월한 대중 정치가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도 공산당하고 맞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진보당 간사장을 맡게 되는 윤길중하고 같이 말술로 무지하게 퍼마셨다고 하는데 하여튼 개성이라고 할까, 그런 면에서도 공산당의 조직적 생활에는 안 맞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조봉암은 여성 관계도 상당히 있지 않았나. 그런저런 걸로 볼 때 개인 성향에서도 공산주의와 안 맞는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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