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프레시안 : 1949년 2월, 조봉암은 반년 만에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그 후 어떤 활동을 하나.
서중석 :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난 조봉암이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생겼다. 처음에 한민당은 내각제를 주장하다가 이승만의 강한 요청으로 대통령 책임제로 바꿨는데, 그 후에도 내각제를 몇 번 주장하다가 드디어 1950년 1월 내각제 개헌안을 제시했다. 이 내각제 개헌안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 조봉암이었다. 아주 장문의 연설을 했다.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안은 백지 투표라는 희한한 방식으로 부결됐다. 다시 말해 '누가 반대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라. 그런 의미에서 내각제 개헌안 반대파는 아예 백지 투표를 해버려라',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으니 이런 지시를 내렸을 터인데 이것이 온당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어쨌건 이때도 조봉암이 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보고 있다.
조봉암이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안을 공격한 내용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조봉암이 이승만 쪽을 지키기 위해 내각제를 그렇게 강하게 비판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 자신은 처음부터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 사람이지만, 민국당이 부패한 일당 전제 정치를 획책하기 위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려 하기 때문에 민국당의 내각 책임제 개헌은 절대 반대한다는 논리를 조봉암은 편다. 부패한 일당 전제 정치, 미군정 3년 동안 바로 한민당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한다.
그런데 돌려서 생각하면 이건 이승만 쪽도 그렇게 가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때 조봉암은 한민당·민국당이 "대한민국의 국시로 반공 정책을 세운 걸 기화로 해서 자기 정당 이외의 다른 정당이나 자기 당파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 모두 공산당 혹은 빨갱이라고 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반대파를 제압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국회 내에서는 한민당 이외의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둘러쓸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사실도 우리가 눈으로 보았고 그런 모함에 빠질까 두려워서 일부 사람은 고의로 한민당에 입당"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봉암은 "지금 국민은 살 수가 없다. 먹지 못해 살 수 없고, 압박에 못 견뎌 살 수 없고, 마음이 불안해서 살 수 없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게 한민당·민국당만 비난한 것이겠는가. 사실은 이승만 정부를 그대로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역시 조봉암다운 것이다. 현실에 참여하고 자기 목숨, 정치적 생명은 살리면서 주장할 것은 또 다하는 방식으로 이 사람은 임했다. 이걸 정치적 곡예라고도 볼 수 있는데, 조봉암이 아닌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봉암이 또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조봉암 입장을 가만히 보면 이것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지 않았느냐, 이렇게 볼 수 있다. 조봉암은 그렇게 곡예를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또 강력하게 했다.
조봉암이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려들지 않은 이유
프레시안 : 1949년 5∼6월 국회 프락치 사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김구 암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도 불리는 이러한 격동 상황에서 조봉암이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서중석 : 조봉암 이 사람의 성향으로 봐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 딱 걸릴 만했다. 그런데 그 사건에 걸리지 않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좌익 사건 및 국민보도연맹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상 검사 오제도인데, 조봉암이 오제도에게 한 말에 따르면 1949년 3월에 소장파 의원들이 외군 즉시 철퇴 진언서 연판장에 서명해달라고 조봉암에게 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봉암은 그걸 하지 않았다. 이것 자체에 찬성한다, 반대한다를 떠나서 여기에 서명 날인을 했다가는 죽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그랬을 것이라고 난 본다. 왜냐하면 조봉암을 죽이려는 세력은 많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미국 자료를 보면, 이승만 정권이 반대파 문제를 이 사건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봤다. 정치적 사건으로 본 것이다. 지금 서울시장을 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를 포함해 많은 연구자들이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문을 보면 조봉암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쓰여 있다. "외군 철퇴 주장이 민족 자주성으로 타당해 보여도 공산당 마수에 이용될 수 있어서 반대했다." 상당히 묘한 논리인데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돼 있다. 어쨌건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리지 않고 조봉암은 살아남았다. 그러면서 1950년 5.30선거에 대한국민당으로 나왔지만, 이것은 외피에 지나지 않고 조봉암은 자기 원칙에 따라 정치적 행로를 정했다. 5.30선거 후 신익희가 국회 의장이 되고 조봉암과 장택상이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면서 조봉암이 이제 국회 부의장으로서 명성을 쌓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이 시기 조봉암의 정치 곡예를 살펴보면,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과 함께 '한민당과 그 후신보다는 지금으로선 그래도 이승만이 낫다'고 여긴 측면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몇 년 후 조봉암은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을 포함한 야당 세력이 반이승만 연합을 추진할 때 그 흐름에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서중석 : 그건 조봉암과 관계없이 이뤄진 것이다. 그때 조봉암은 외곽에 있었고, 야권 연합 움직임이 일면서 민국당 내에 두 세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조봉암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세력과 받아들이자는 세력, 이렇게 두 세력이다. 그리고 정치 세력이라는 건 때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다. 조봉암이 정치 곡예를 해서 살아남은 것도 결국은 이승만과 대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프레시안 : 5.30선거 직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러면서 국회도 새로운 상황에 놓인다.
서중석 : 2대 국회는 전쟁 국회이기도 하다. 전쟁이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정치는 정치대로 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51년에는 새로운 정당 만들기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일었다. 일부에서는 근대적 정당,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자는 논리를 펴기도 했는데 그건 내각제에 적합한 정당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 정당다운 정당이 있었느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그렇게 셌고 여운형의 조선인민당도 있긴 했지만, 이런 당들은 해방 직후의 상황을 많이 반영한 정당이었다. 남로당도 마찬가지였다. 한민당이 우파 정당으로서 명료하게 지주, 부르주아를 대변하고 친일파 처단을 반대한 당으로 뚜렷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한민당을 근대적 정당으로 보지 않았다. 그 세력들이 뭔가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만든 당 아니냐, 이런 식으로 봤다. 김구, 조소앙의 한독당이 명분은 셌지만, 한독당도 '근대적 정당이 맞냐'는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당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민당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당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당의 본래 지향하고는 차이가 있다', 이런 비판이었다. 그런 분위기였는데, 1951년 여름이 되면 세 갈래로 급속히 당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나온다.
프레시안 : 세 갈래는 각각 어떤 것이었나.
서중석 : 하나는 나중에 원내 자유당으로 불리는 것이다. 5.30선거에서는 전체 210석 중 무소속이 무려 126명이나 당선됐다. '이 사람들을 주요 기반으로 해서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 책임 정치를 구현하자', 당시 국회의원들의 압도적 다수가 이 주장을 했다. 처음에는 당명이 없었으니 신당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원내 자유당이 되는데, 이쪽이 국회의원을 100명 정도나 끼고 있었다.
그다음은 나중에 원외 자유당으로 알려진 정당인데 이 정당은 사실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승만은 8.15 담화를 비롯한 몇 차례의 담화에서 정당에 관한 자신의 입론을 편다. 그때 이승만은 "국민회, 대한부인회, 노총, 농총, 청년회를 가지고 당을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국민이 다 들어가는 게 국민회이고 (기혼) 여성이 다 들어가는 게 부인회이고 노동자가 다 들어가는 게 노총이고 농민이 다 들어가는 게 농총이고 청년이 다 들어가는 게 청년회라면, 사실 원외 자유당으로 나중에 알려지게 되는 이 신당은 국민들을 복합적으로 포용하는 당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은 다 이승만을 총재로 한 이승만 직속 부대라고 할까, 어용 단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부인회는 한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총재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력들도 원외 자유당에 다 들어온 게 아니다. 여기도 파벌이 복잡해서 일부 세력만 들어왔다.
이승만으로서는 이 세력들을 중심으로 해서 당을 만들라고 했지만 이게 잘 안될 것 같으니까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을 결국 불렀다. 우파에서 강력한 조직을 갖고 있던 건 이범석이 만든 족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족청이 말로는 100만이라고 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숫자다.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숫자는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실체를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만 족청이 10만 명 정도는 끼고 있었다. 미군정이 족청을 굉장히 지원했다. 자금도 많이 줬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단체보다도 조직적으로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많은 조직원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족청 계열 국회의원으로는 양우정 한 명이 있었다. 다만, 나중에 다른 한 명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는지 당시 신문에 2명으로 나온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원외 자유당이 아니라 나중에 원내 자유당으로 알려진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
프레시안 : 예전에 한국 정치사 관련 자료를 볼 때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자료가 일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서중석 :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을 수십 년간 많은 정치학자가 혼동했다. '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당으로서 두 당이 하나로 합치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책을 쓰고 가르치고 그랬다. 심지어는 이 부분에 대해 좋은 논문이 발표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을 때때로 볼 수 있다.
이 두 당은 굉장히 다르다. 사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것은 원내 자유당 쪽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려고 한 동시에 장면을 대통령 또는 내각 책임제의 총리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과 관련 있다. 그것이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이승만은 이들이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런 걸 절대로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이승만은 내각 책임제를 분명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대통령한테 전권을 줘야지 그게 말이 되느냐,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이 사람은 모든 정치를 자기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도 대통령 중심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 점에서도 원내 자유당과는 같이할 수 없었다.
다만 원내 자유당에는 삼우장파가 들어 있었다. (삼우장이라는 곳에서 모여 삼우장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갑성을 대표로 하는 이 파는 이승만 지지파였다. 그렇지만 이 파도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기 때문에 원내 자유당에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원내 자유당은 사실 이승만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당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워낙 많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을 합쳐라', 이런 이야기는 몇 번 했다. 그러나 원내 자유당 쪽에서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장면 정권이 출범할 때 그 핵심이 되는 사람들이 이때 원내 자유당을 한 사람들이다. 원내 자유당의 핵심 인물이 오위영이었는데, 이 사람은 장면 정권 때도 제일 핵심 인물이라고 하지 않나. 어쨌건 자유당이라는 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점 하나 때문에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서중석 :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난 조봉암이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생겼다. 처음에 한민당은 내각제를 주장하다가 이승만의 강한 요청으로 대통령 책임제로 바꿨는데, 그 후에도 내각제를 몇 번 주장하다가 드디어 1950년 1월 내각제 개헌안을 제시했다. 이 내각제 개헌안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 조봉암이었다. 아주 장문의 연설을 했다.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안은 백지 투표라는 희한한 방식으로 부결됐다. 다시 말해 '누가 반대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라. 그런 의미에서 내각제 개헌안 반대파는 아예 백지 투표를 해버려라',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으니 이런 지시를 내렸을 터인데 이것이 온당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어쨌건 이때도 조봉암이 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보고 있다.
조봉암이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안을 공격한 내용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조봉암이 이승만 쪽을 지키기 위해 내각제를 그렇게 강하게 비판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 자신은 처음부터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 사람이지만, 민국당이 부패한 일당 전제 정치를 획책하기 위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려 하기 때문에 민국당의 내각 책임제 개헌은 절대 반대한다는 논리를 조봉암은 편다. 부패한 일당 전제 정치, 미군정 3년 동안 바로 한민당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한다.
그런데 돌려서 생각하면 이건 이승만 쪽도 그렇게 가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때 조봉암은 한민당·민국당이 "대한민국의 국시로 반공 정책을 세운 걸 기화로 해서 자기 정당 이외의 다른 정당이나 자기 당파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 모두 공산당 혹은 빨갱이라고 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반대파를 제압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국회 내에서는 한민당 이외의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둘러쓸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사실도 우리가 눈으로 보았고 그런 모함에 빠질까 두려워서 일부 사람은 고의로 한민당에 입당"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봉암은 "지금 국민은 살 수가 없다. 먹지 못해 살 수 없고, 압박에 못 견뎌 살 수 없고, 마음이 불안해서 살 수 없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게 한민당·민국당만 비난한 것이겠는가. 사실은 이승만 정부를 그대로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역시 조봉암다운 것이다. 현실에 참여하고 자기 목숨, 정치적 생명은 살리면서 주장할 것은 또 다하는 방식으로 이 사람은 임했다. 이걸 정치적 곡예라고도 볼 수 있는데, 조봉암이 아닌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봉암이 또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조봉암 입장을 가만히 보면 이것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지 않았느냐, 이렇게 볼 수 있다. 조봉암은 그렇게 곡예를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또 강력하게 했다.
조봉암이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려들지 않은 이유
프레시안 : 1949년 5∼6월 국회 프락치 사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김구 암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도 불리는 이러한 격동 상황에서 조봉암이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서중석 : 조봉암 이 사람의 성향으로 봐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 딱 걸릴 만했다. 그런데 그 사건에 걸리지 않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좌익 사건 및 국민보도연맹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상 검사 오제도인데, 조봉암이 오제도에게 한 말에 따르면 1949년 3월에 소장파 의원들이 외군 즉시 철퇴 진언서 연판장에 서명해달라고 조봉암에게 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봉암은 그걸 하지 않았다. 이것 자체에 찬성한다, 반대한다를 떠나서 여기에 서명 날인을 했다가는 죽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그랬을 것이라고 난 본다. 왜냐하면 조봉암을 죽이려는 세력은 많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미국 자료를 보면, 이승만 정권이 반대파 문제를 이 사건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봤다. 정치적 사건으로 본 것이다. 지금 서울시장을 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를 포함해 많은 연구자들이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문을 보면 조봉암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쓰여 있다. "외군 철퇴 주장이 민족 자주성으로 타당해 보여도 공산당 마수에 이용될 수 있어서 반대했다." 상당히 묘한 논리인데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돼 있다. 어쨌건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리지 않고 조봉암은 살아남았다. 그러면서 1950년 5.30선거에 대한국민당으로 나왔지만, 이것은 외피에 지나지 않고 조봉암은 자기 원칙에 따라 정치적 행로를 정했다. 5.30선거 후 신익희가 국회 의장이 되고 조봉암과 장택상이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면서 조봉암이 이제 국회 부의장으로서 명성을 쌓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이 시기 조봉암의 정치 곡예를 살펴보면,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과 함께 '한민당과 그 후신보다는 지금으로선 그래도 이승만이 낫다'고 여긴 측면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몇 년 후 조봉암은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을 포함한 야당 세력이 반이승만 연합을 추진할 때 그 흐름에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서중석 : 그건 조봉암과 관계없이 이뤄진 것이다. 그때 조봉암은 외곽에 있었고, 야권 연합 움직임이 일면서 민국당 내에 두 세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조봉암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세력과 받아들이자는 세력, 이렇게 두 세력이다. 그리고 정치 세력이라는 건 때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다. 조봉암이 정치 곡예를 해서 살아남은 것도 결국은 이승만과 대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프레시안 : 5.30선거 직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러면서 국회도 새로운 상황에 놓인다.
서중석 : 2대 국회는 전쟁 국회이기도 하다. 전쟁이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정치는 정치대로 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51년에는 새로운 정당 만들기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일었다. 일부에서는 근대적 정당,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자는 논리를 펴기도 했는데 그건 내각제에 적합한 정당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 정당다운 정당이 있었느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그렇게 셌고 여운형의 조선인민당도 있긴 했지만, 이런 당들은 해방 직후의 상황을 많이 반영한 정당이었다. 남로당도 마찬가지였다. 한민당이 우파 정당으로서 명료하게 지주, 부르주아를 대변하고 친일파 처단을 반대한 당으로 뚜렷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한민당을 근대적 정당으로 보지 않았다. 그 세력들이 뭔가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만든 당 아니냐, 이런 식으로 봤다. 김구, 조소앙의 한독당이 명분은 셌지만, 한독당도 '근대적 정당이 맞냐'는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당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민당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당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당의 본래 지향하고는 차이가 있다', 이런 비판이었다. 그런 분위기였는데, 1951년 여름이 되면 세 갈래로 급속히 당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나온다.
프레시안 : 세 갈래는 각각 어떤 것이었나.
서중석 : 하나는 나중에 원내 자유당으로 불리는 것이다. 5.30선거에서는 전체 210석 중 무소속이 무려 126명이나 당선됐다. '이 사람들을 주요 기반으로 해서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 책임 정치를 구현하자', 당시 국회의원들의 압도적 다수가 이 주장을 했다. 처음에는 당명이 없었으니 신당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원내 자유당이 되는데, 이쪽이 국회의원을 100명 정도나 끼고 있었다.
그다음은 나중에 원외 자유당으로 알려진 정당인데 이 정당은 사실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승만은 8.15 담화를 비롯한 몇 차례의 담화에서 정당에 관한 자신의 입론을 편다. 그때 이승만은 "국민회, 대한부인회, 노총, 농총, 청년회를 가지고 당을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국민이 다 들어가는 게 국민회이고 (기혼) 여성이 다 들어가는 게 부인회이고 노동자가 다 들어가는 게 노총이고 농민이 다 들어가는 게 농총이고 청년이 다 들어가는 게 청년회라면, 사실 원외 자유당으로 나중에 알려지게 되는 이 신당은 국민들을 복합적으로 포용하는 당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은 다 이승만을 총재로 한 이승만 직속 부대라고 할까, 어용 단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부인회는 한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총재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력들도 원외 자유당에 다 들어온 게 아니다. 여기도 파벌이 복잡해서 일부 세력만 들어왔다.
이승만으로서는 이 세력들을 중심으로 해서 당을 만들라고 했지만 이게 잘 안될 것 같으니까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을 결국 불렀다. 우파에서 강력한 조직을 갖고 있던 건 이범석이 만든 족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족청이 말로는 100만이라고 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숫자다.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숫자는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실체를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만 족청이 10만 명 정도는 끼고 있었다. 미군정이 족청을 굉장히 지원했다. 자금도 많이 줬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단체보다도 조직적으로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많은 조직원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족청 계열 국회의원으로는 양우정 한 명이 있었다. 다만, 나중에 다른 한 명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는지 당시 신문에 2명으로 나온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원외 자유당이 아니라 나중에 원내 자유당으로 알려진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
프레시안 : 예전에 한국 정치사 관련 자료를 볼 때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자료가 일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서중석 :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을 수십 년간 많은 정치학자가 혼동했다. '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당으로서 두 당이 하나로 합치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책을 쓰고 가르치고 그랬다. 심지어는 이 부분에 대해 좋은 논문이 발표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을 때때로 볼 수 있다.
이 두 당은 굉장히 다르다. 사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것은 원내 자유당 쪽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려고 한 동시에 장면을 대통령 또는 내각 책임제의 총리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과 관련 있다. 그것이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이승만은 이들이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런 걸 절대로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이승만은 내각 책임제를 분명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대통령한테 전권을 줘야지 그게 말이 되느냐,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이 사람은 모든 정치를 자기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도 대통령 중심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 점에서도 원내 자유당과는 같이할 수 없었다.
다만 원내 자유당에는 삼우장파가 들어 있었다. (삼우장이라는 곳에서 모여 삼우장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갑성을 대표로 하는 이 파는 이승만 지지파였다. 그렇지만 이 파도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기 때문에 원내 자유당에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원내 자유당은 사실 이승만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당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워낙 많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을 합쳐라', 이런 이야기는 몇 번 했다. 그러나 원내 자유당 쪽에서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장면 정권이 출범할 때 그 핵심이 되는 사람들이 이때 원내 자유당을 한 사람들이다. 원내 자유당의 핵심 인물이 오위영이었는데, 이 사람은 장면 정권 때도 제일 핵심 인물이라고 하지 않나. 어쨌건 자유당이라는 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점 하나 때문에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당을 추진한 조봉암
프레시안 :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세 번째 흐름은 어떤 것이었나.
서중석 : 이 두 개의 신당 조직 작업 말고 또 하나는 조봉암 쪽에서 나왔다. 조봉암도 신당을 만들려고 했다. 사실은 이승만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자기 당을 만들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봉암도 1949년에 한때 족청과 연합해 당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족청 상당수가 '조봉암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깨졌다.
조봉암은 대중 정치뿐만 아니라 정당 정치, 의회 정치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조봉암은 1951년 6월, 농림부 장관 때 비서였던 이영근을 책임자로 한 신당 사무국을 출범시켰다. 이 신당 작업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가 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혁신 정당 중에는 농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당이 전혀 없었다. 그건 진보당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진보당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고, 1960년 4월혁명 이후 생긴 혁신 정당들은 그런 노력조차 별로 하지 않았다. 진보 정당은 농민과 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조봉암이 신당을 조직할 때는 그 노력을 상당히 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나.
서중석 : 일제 때 전국적으로 농회라는 큰 조직이 있지 않았나. 이게 해방 후에도 존속하다가 1951년 5월에 해산하는데, 해산 후 농회 조직을 바탕으로 1951년 10월에 농민회의가 소집됐다.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농민회의 창립 회의에 남한 180개 군 대표, 340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의장으로 조봉암이 선출됐다.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 시절 각지를 다니면서 농민들과 만나고 농업 정책을 논의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그런 것이 큰 기반이 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회의 창립 회의에서 조봉암이 의장이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친일파의 요람이라고 불리던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만든 <사찰 요람>을 보면 노동계 간부도 많이 포섭한 것으로 돼 있다. 대한노총의 여러 간부 명단이 쭉 나온다. 이처럼 노동자 쪽도 부분적으로는 신당 쪽에 조직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노동계의 주력은 이승만을 절대 지지하는 대한노총이라는 어용 조직으로 돼 있었으니까, 신당 쪽의 조직 작업에 한계가 뚜렷하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일부 노조 간부를 포섭한 것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아울러 조봉암은 원내 의원들한테 인기가 좋았는데, 의원 70여 명을 신당 조직에 포섭하려 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전부 현실에서는 될 수가 없었다.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탄압한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어떤 이유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우선 조봉암이 농민회의를 기반으로 하려 하자, 이승만 정권이 가만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노동계 간부들도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원들도 쉽사리 합류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 조봉암, 정치인 조봉암은 좋아했고 국회 부의장으로서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했지만 '조봉암과 손잡았다가는 같이 나가떨어질 수 있다. 조봉암 뒤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저명한 정치가들 중 몇 사람은 조봉암을 대단한 인물로 봤으면서도 결코 이 신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1951년 12월 초에 신당 준비 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을 체포했고, 잇따라 50여 명을 연행해 9명을 기소했다. 이게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이름도 좀 이상한데 어쨌건 이걸 육군 특무대에서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조봉암이 포섭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었다. 우선 사상 정보 관계 경찰 책임자인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이 들어가 있었다. 정보수사과장은 아주 요직이다. 교육 훈련 책임자인 치안국 교육과장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이 조봉암과 관계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다 중경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찰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경력의 소유자였다. 어쨌건 이 사람들은 간첩으로 몰렸다.
또 당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던 인물이자 보도연맹 전국 간사장이라는 중요 직책을 맡았던 김종원, 이 사람도 간첩으로 내몰렸다. 이 사람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로 남로당 서울시당 간부였다가 전향해서 남로당 서울시당을 파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홍민표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사람은 남로당이 70퍼센트라는 큰 비중을 두고 관리했다던 서울시당을 파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경찰에 채용돼 경감으로 올라간 사람인데,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됐다. 이 사람들한테는 사형, 무기 징역, 5년 내지 10년 징역형이라는 중형이 구형은 됐지만 전부 다 무죄 판결을 받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조봉암의 첫 번째 중요한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 정권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조봉암이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이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조봉암의 활동을 놔둘 리가 만무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프레시안 :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세 번째 흐름은 어떤 것이었나.
서중석 : 이 두 개의 신당 조직 작업 말고 또 하나는 조봉암 쪽에서 나왔다. 조봉암도 신당을 만들려고 했다. 사실은 이승만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자기 당을 만들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봉암도 1949년에 한때 족청과 연합해 당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족청 상당수가 '조봉암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깨졌다.
조봉암은 대중 정치뿐만 아니라 정당 정치, 의회 정치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조봉암은 1951년 6월, 농림부 장관 때 비서였던 이영근을 책임자로 한 신당 사무국을 출범시켰다. 이 신당 작업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가 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혁신 정당 중에는 농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당이 전혀 없었다. 그건 진보당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진보당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고, 1960년 4월혁명 이후 생긴 혁신 정당들은 그런 노력조차 별로 하지 않았다. 진보 정당은 농민과 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조봉암이 신당을 조직할 때는 그 노력을 상당히 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나.
서중석 : 일제 때 전국적으로 농회라는 큰 조직이 있지 않았나. 이게 해방 후에도 존속하다가 1951년 5월에 해산하는데, 해산 후 농회 조직을 바탕으로 1951년 10월에 농민회의가 소집됐다.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농민회의 창립 회의에 남한 180개 군 대표, 340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의장으로 조봉암이 선출됐다.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 시절 각지를 다니면서 농민들과 만나고 농업 정책을 논의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그런 것이 큰 기반이 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회의 창립 회의에서 조봉암이 의장이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친일파의 요람이라고 불리던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만든 <사찰 요람>을 보면 노동계 간부도 많이 포섭한 것으로 돼 있다. 대한노총의 여러 간부 명단이 쭉 나온다. 이처럼 노동자 쪽도 부분적으로는 신당 쪽에 조직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노동계의 주력은 이승만을 절대 지지하는 대한노총이라는 어용 조직으로 돼 있었으니까, 신당 쪽의 조직 작업에 한계가 뚜렷하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일부 노조 간부를 포섭한 것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아울러 조봉암은 원내 의원들한테 인기가 좋았는데, 의원 70여 명을 신당 조직에 포섭하려 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전부 현실에서는 될 수가 없었다.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탄압한 이승만 정권
서중석 : 우선 조봉암이 농민회의를 기반으로 하려 하자, 이승만 정권이 가만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노동계 간부들도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원들도 쉽사리 합류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 조봉암, 정치인 조봉암은 좋아했고 국회 부의장으로서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했지만 '조봉암과 손잡았다가는 같이 나가떨어질 수 있다. 조봉암 뒤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저명한 정치가들 중 몇 사람은 조봉암을 대단한 인물로 봤으면서도 결코 이 신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신당 추진 조직을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1951년 12월 초에 신당 준비 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을 체포했고, 잇따라 50여 명을 연행해 9명을 기소했다. 이게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이름도 좀 이상한데 어쨌건 이걸 육군 특무대에서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조봉암이 포섭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었다. 우선 사상 정보 관계 경찰 책임자인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이 들어가 있었다. 정보수사과장은 아주 요직이다. 교육 훈련 책임자인 치안국 교육과장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이 조봉암과 관계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다 중경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찰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경력의 소유자였다. 어쨌건 이 사람들은 간첩으로 몰렸다.
또 당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던 인물이자 보도연맹 전국 간사장이라는 중요 직책을 맡았던 김종원, 이 사람도 간첩으로 내몰렸다. 이 사람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로 남로당 서울시당 간부였다가 전향해서 남로당 서울시당을 파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홍민표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사람은 남로당이 70퍼센트라는 큰 비중을 두고 관리했다던 서울시당을 파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경찰에 채용돼 경감으로 올라간 사람인데,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됐다. 이 사람들한테는 사형, 무기 징역, 5년 내지 10년 징역형이라는 중형이 구형은 됐지만 전부 다 무죄 판결을 받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조봉암의 첫 번째 중요한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 정권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조봉암이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이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조봉암의 활동을 놔둘 리가 만무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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