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중순, 갑작스럽게 아침에 속보로 떴던 하나의 사건이 이렇게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감싸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그저 일상을 잠시 스쳐나가는 단순한 해프닝인 줄 알았던 세월호 침몰 사건은 해를 넘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참사가 되고 말았다. 사고 자체의 충격과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는 사건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누군가는 빨리 사건을 잊어버리라고 주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요구는 세월호 사건을 더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세월호를 호명하고 기억하려 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사건으로 사망한 희생자가 생전에 남긴 영상, 작업물을 전시라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해 알리려고 했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길 원했다. 이 밖에도 만화, 동화 등 각자가 잘 하는 방법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다시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 중 하나에는 ‘영상’이 있다.
세월호에 대한 영상물은 <다이빙벨>이 전부가 아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세월호에 대한 영상물은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와 안해룡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일 것이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다는 말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논란이 되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 사건 그 자체, 그리고 사건에 대한 다양한 갈등과 난맥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였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4월에 벌어진 사건을 9월까지 제작을 완료해야 했기에 너무나도 급하게 작업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었지만 최소한 대다수의 미디어들이 세월호 사건을 잊으려는 와중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긴 했었다. 또한 대다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최근 추세처럼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걸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5만 명에 가까운 누적 관객을 기록한 것은 사람들이 발품을 팔아서라도 세월호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어 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작품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다이빙벨>은 세월호 사건을 영상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한 큰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다이빙벨>만 영상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다이빙벨> 만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영상을 통해 세월호 사건을 기록하고, 다시 상기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 그 축들은 바로 ‘4.16기억저장소’와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영화인모임’(이하 영화인모임)이다.
두 단체는 영상으로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방향은 각자 다르다. 하나는 단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기존에 존재하는 영상을 수집하고, 다른 하나는 세월호에 대한 영상을 직접 만든다. 과연 두 단체의 사람들은 왜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영상을 고르고,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고 있을까. 필자는 이 두 단체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4.16기억저장소 “기록물은 때론 진실을 지킨다.”
안산시 고잔1동에 위치한 삼두상가. 단원고등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곳 상가 2층에는 비록 재정적인 문제로 간판을 세우진 못했어도 ‘4.16기억저장소’의 첫 번째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공간에 처음 들어온 순간 눈에 먼저 보인 것은 한 쪽 벽을 가득하게 메우고 있는 둥근 지관이었다. 빼곡이 쌓여있는 지관들은 기록물을 보관하는 하나의 도구인 동시에 4.16기억저장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제외하면 전체적인 공간의 모습은 ‘기억저장소’라기 보다는 흡사 마을에 하나쯤 있을 법한 사랑방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4.16기억저장소의 김종천 사무국장은 단순히 이 공간이 기억저장소의 사무실로 쓰이는데 그치지 않고 고잔동 주민들의 모임 공간 등 지역 마을공동체 운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의문을 풀어주었다.
계기, 그리고 움직임
김종천 사무국장은 이전부터 영상 운동을 해왔던 사람이다. 4.16기억저장소의 사무국장이자 ‘안산미디어공동체 미디코’의 사무국장인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안산 이곳저곳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많은 발품을 팔아왔다. 2012년, 안산 반월공단에 위치한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가공할만한 용역들의 폭력으로 대응한 사측과 이를 방관한 경찰의 태도로 많은 공분을 샀던 ‘SJM 사태’도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사건 중 하나였다.
그렇게 계속 지역에서 영상 운동을 하던 중 작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희생자의 대부분은 그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지역인 안산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당장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세월호 사건은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었고, 이전까지 해오던 작업과는 달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인 김진열 씨, 홍영의 국민대 역사학과 교수, 그리고 한국기록학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만나 ‘안산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비단 안산에서만 있지는 않았다. 서울, 그리고 진도 팽목항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기록 저장 운동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 지역에 위치한 단체들간의 교류가 생겨났다. 그렇게 계속 연락을 주고 받던 어느 날 명지대 문헌정보학과의 김익한 교수가 시민단체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본격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저장, 기록하는 운동을 할 것을 제안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 개의 단체가 ‘4.16기억저장소’의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8월, 고잔1동의 삼두상가에 첫 번째 장소를 만들고 이를 가족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기록 수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왜 4.16기억저장소는 유가족들의 이불을 모으고 있는가
기억저장소가 모으는 기록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다양한 영상물과 인쇄된 자료들이지만 그들이 모으는 기록의 유형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기억저장소가 현재 중점적으로 모으는 자료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304명의 세월호 탑승객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개인 기억에 대한 것들이다. 또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덮고 있던 이불들과 같은 물건들도 수집하고 있다. 누군가는 왜 이불을 모아야 하냐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기억저장소는 어떤 이유에서 이불을 수집하기로 했을까.
김 사무국장은 그 이불이 단순한 이불이 절대 아니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에게 이불은 4월 16일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야만의 시간을 보냈던,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이 젖어있는 이불입니다.” 기억저장소는 유가족들의 세월과 아픈 기억이 담긴 이불을 모아 추후 전시를 통해 먼 훗날 누군가가 그 이불을 보고 해석함으로써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황과 심정을 이해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외에도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기록물이라면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을 예정임을 밝혔다. 이들은 2015년 1월 초순까지 약 1000박스에 달하는 오프라인 기록물, 그리고 4테라바이트에 달하는 온라인 기록물을 수집했다. 이렇게 모은 자료들은 올해 3월에 개관할 예정인 두 번째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전시될 계획이다. 또한 이후 추모공원과 같은 애도의 공간이 생기면 현재의 임시적 보존 체계를 넘어 장기적인 보존 체계로 시스템을 전환할 예정이다.
기록을 지키는 운동, 운동을 지키는 기록
김종천 사무국장에게, 그리고 4.16기록저장소에 있어 자료를 모으고 기억을 저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김 사무국장은 얼마 전에 있던 논란을 언급했다. 2학년 학생들의 대부분이 사망, 실종하는 바람에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은 분향소 밖의 또 다른 거대한 추모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연말이 되고, 1학년들이 2학년이 될 준비를 하게 되면서 공간에 대한 문제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학부모는 추모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2학년 교실을 모두 말끔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해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에 단원고 유가족은 물론 생존, 실종 학생의 부모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특히 실종, 사망 학생의 가족들은 아직 합동영결식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원통함을 드러냈다며 김 사무국장은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금 현재도 단원고 2학년 교실에는 사망, 실종 학생을 기억하는 다양한 물품들이 계속 남아있는 상황이다.
김 사무국장은 이러한 논쟁이 굉장히 잔인스럽고 야만적인 논란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 말했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어둡거나 침울하다는 이유로 빠르게 기억을 치우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적 정서를 버틸 수 있는 것도 결국 그들이 지우고 싶어 했던 기록에서 나왔다고도 밝혔다. 단원고 2학년 교실에는 유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사망, 실종 학생을 기억하는 글들을 남겼고 그러한 글들이 2학년 교실을 지키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물이 진실을 밝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었다. 김종천 사무국장의 생각대로 세월호에 대한 기록물을 수집하는 것이 오랫동안 살아남아 이후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세월호 영화인모임 “영상은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든다”
한편 안산에서 4.16기억저장소가 첫 번째 공간을 열 때 즈음, 광화문의 세월호 농성장에서는 일군의 영화인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릴레이로 동조단식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이들의 1인 시위와 캠페인 활동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3개월간 진행된 동조단식이 끝나는 날인 10월 31일, 광화문 농성장에는 ‘세월호 추모영상제’라는 이름의 시민들과 영화인들이 만든 세월호를 다룬 다양한 방식의 영상들이 한 자리에서 상영되는 행사가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던 조직은 바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영화인모임’이었다. 이준익, 정지영 등 유명한 영화인들이 대거 참여했던 이 단체는 어떻게 출범할 수 있었을까. 영화인모임의 위원이자 발기인이기도 한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을 만나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모임 과정
그는 영화인들이 모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스크린쿼터감시단’을 비롯하여 90년대부터 게속 스크린쿼터 운동을 해왔던 양기환 이사장도 2008년 이후 대거 지원금이 삭감되며 혼자서 스크린쿼터문화연대를 지켜올 수밖에 없는 등 몇 년 전부터 영화인들의 사회 운동은 큰 제약을 받아왔다. 그들의 사회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사회적인 압박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호 사건이 한창 화두가 되는 상황에서도 영화인들에게서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양기환 이사장은 자신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장기 단식 농성에 돌입하고, 가수 김장훈 씨도 단식에 참여하던 순간이었다. 그 때 한 명의 영화배우가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냐고 절절히 호소를 했었다. 통화를 마친 이후 그는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감독들에게 전화를 돌려 사람들을 모아 기자회견문을 만들고 동조단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난관을 해결해야 했다. 선뜻 동조단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일단 없었고, 무엇보다 기자회견장에 나오는 것도 조심스러워 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력이 결실을 보인 덕분일까. 계속 연락을 하며 단식과 기자회견을 참여를 권유하자 점점 많은 영화인들이 뜻을 모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영화인들은 처음으로 세월호 참사를 말하고 기억하기 위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영화인들,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영화인들은 단식, 기자회견을 넘어 영화인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월호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 때 전 <씨네21> 편집장이자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정숙 씨가 영상제를 꾸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수소문 한 결과 <씨네21>, 외환은행 노동조합의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영상제 준비가 착착 이루어졌다. 공모를 통해 시민들에게 세월호에 대한 작품을 받고, 동시에 한국영화감독조합 등에 제안서를 보내 뜻이 있는 감독들의 작품들을 받았다. 그렇게 10월 31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추모영상제가 작지만 알찬 막을 올리게 되었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만든 작품들이었기에 작품들의 품질은 일정치 않고 들쭉날쭉했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빛나는 작품들이 있었다. 김은택의 <유리창>은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물 속에 빠진 학생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 박동국의 다큐멘터리 <2반의 빠삐용들>은 추모 행진에 참여한 단원고 2학년 2반의 부모님들을 다루면서 그들이 왜 행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포도나무를 베어라>, <터치> 등으로 종교를 영화적 문법과 독특하게 결합한 작품을 계속 작업해왔던 민병훈은 <생명의 노래>라는 인상적인 단편을 만들었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아무런 말이 없이 서로에게 씨앗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이 단편은 어두운 순간에서도 어떻게 희망이 싹을 틀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양기환 위원은 너무 급하게 작품을 받은 것에 아직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정국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문제로 치닫고 있었기에 급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달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친숙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것, 바로 ‘영상’
현재도 영화인모임은 계속 활동 중에 있고, 영화인들의 단편 프로젝트는 작년 말 원주인권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모지은 감독의 <Stay Strong>까지 총 7명의 감독이 참여해 7개의 단편이 나온 상황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월호 추모영상제 이후에 영화인모임은 그 이전만큼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양기환 위원은 현재 영화인모임의 상황이 잠시 ‘침체기’에 있지만, 아직 많은 영화인들이 세월호에 대한 뜻을 가지는 만큼 결코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 희망적인 자세를 내비추었다.
그렇다면 양기환 위원을 비롯해 영화인모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영상으로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양 위원은 영상으로 활동하는 것에는 단순히 영화인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이 영상이라는 것을 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사건이 터진 이후 세월호에 관련된 다양한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불합리와 답답한 광경들을 목격했다. 그는 시민들이 현장에서 고착되고 억압당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든 생각은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와 놓인 처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지점에서 영상이라는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활자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영상이 더 친숙해지게 되었고, 다시 자신이 만들거나 다른 사람이 만든 영상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차원에서 영화인들이 시민들과 함께 영상을 통해 세월호를 기억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외에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416TV’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인 세월호 관련 영상 소식들을 전달하는 인터넷 방송국을 만들었고, 전국 각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통해 세월호 사건을 기록하고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혹과 문제들을 파헤치는 준비들을 하고 있다. 물론 <다이빙벨>이 그랬듯 이러한 작업에 대한 왈가왈부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건이 일어났던 2014년보다 더 크고 심한 압박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영상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중요한 창구 중 하나이다. 부디 그러한 작업들이 쉽게 꺾이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마치 시민들과 유가족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었던 단원고의 2학년 교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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