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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겠습니다"…세월호 기억저장소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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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겠습니다"…세월호 기억저장소의 진화

[주간 프레시안 뷰] 뜻깊은 우연과의 만남

후배 교수의 말 한마디

2014년을 돌아보니, 참으로 뜻깊은 우연과의 만남으로 채워진 한 해였습니다. 배가 침몰하고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때 후배 교수가 던진 한마디로, 세월호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선배, 세월호 유가족이 있는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나는 몽둥이로 한 방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대답했습니다. "그런가?" 우리는 5월 초, 바로 진도행을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간단하면서도 명백한 답을 왜 그렇게 늦게 찾은 건지 바보 같기만 합니다.

4월 16일,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이 침몰하면서 우리 모두는 공황 상태에 빠졌었습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후배 교수가 던진 질문 한마디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우연과 만남을 가져다줬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록전문가로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상(像)이 환하게 떠올랐습니다. '늦었다'라고 깨달았을 때가 제일 빠른 때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일단 몸을 움직였습니다. 함께할 연구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진도군청에 근무하는 기록연구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교수 둘, 연구원 둘, 대학원생 하나 이렇게 다섯 명이 진도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 2014년 10월 29일 자신의 생일 날 뭍으로 올라온 지현이를 끝으로, 진도 팽목항에는 '실종자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기차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도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전라도 지역에 근무하는 기록연구사 두 명이 차를 가지고 목포역에서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동스런 순간이 이어졌지요. 진도체육관에 도착하자 진도군청에 근무하는 기록연구사가 쫓아 나와 부스를 차리는 데 필요한 텐트와 각종 집기를 준비해줬습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고, 하루 만에 기록 보존 활동을 알리는 플래카드와 안내문 등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서울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조를 짜서 교대로 진도에 내려오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진도에서의 기록 수집 활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울먹임을 삼키며, 가족들에게 미소를 보이려 애썼습니다. 우리라도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진도체육관에서 며칠을 자고 나니, 4월 16일의 실체가 몸 전체로 느껴졌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 기억저장소'를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그때였고요. 언론에 우리의 생각을 알리고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돌며 기록을 수집하고 자원봉사자의 구술 증언을 들었습니다. 특히 자원봉사자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이명수-아름다운재단과의 만남

진도체육관 옆 기록 보존 부스에서 기록을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한겨레21>에 인터뷰 연재를 싣고 있던 이명수 씨였지요. 저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겁니다. '기억저장소'를 알리고 싶었던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전화 목소리에서 전해오는 진정성이 저를 움직인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후, 여러 언론사에서 '기억저장소'의 필요성에 공감했습니다. 생면부지인 그와의 우연한 만남이 '416 기억저장소'를 만들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이명수 씨의 표현을 빌리면, 인터뷰 당시 두 사내는 인터뷰 중간 중간 별 부끄러움 없이 꺼이꺼이 울었답니다. 그가 정혜신 박사의 남편이고 쌍용차 사건 때 치유 공간 '와락'을 운영했던 사람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세월호 가족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워 그들이 행복한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5월 말, 이명수 씨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 자금 지원 요청을 하러 가는데, '기억저장소'이야기를 함께 건네도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416 기억저장소'를 만들고, 그곳을 출발지점으로 공동체 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저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한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소개로, '아름다운재단'과 연결됐고 지금의 '기억저장소'가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아름다운재단'과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재단의 담당 팀장이 먼저 전화를 했고 '기억저장소' 구상을 경청했습니다. 팀장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진도에 머물러 있어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5월 말 밤 9시가 넘어 인사동 전통술집에서 첫 미팅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극복해가야 할지, 참으로 뜻깊은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이 모금 운동을 해줬고, 그 결과 현재 기억저장소 공간 비용과 기록을 수집·정리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비용이 마련됐습니다.

스스로 모이는 사람들

6월 초 기억저장소를 꾸려나갈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5일 저녁 7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회의실을 빌려 '기억저장소'와 함께 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인권운동사랑방 등 대표적인 시민단체가 힘을 보탰습니다. 신학생 모임, 검은티 행동, 세대행동 등 세월호 참사를 시민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애쓰는 이들도 동참했습니다. 더 값진 성과는 개인 참가자들이었습니다. 큐레이터, 작가, 전직 기자, 기록학 대학원생들, 안산 시민운동가 등 40명이 넘는 시민들 또한 자리를 메웠습니다. 첫 회의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라는 모임 이름을 정하고, 시민 기록 수집과 기억저장소 건립을 위한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가 수업을 게을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5·6월을 진도에 내려가 있느라, 수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생들이 기꺼이 양해해 줘 주말 수업으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서울로 올라와 일요일까지 수업하고 옷가지를 챙겨 다시 진도로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도에서의 기록 수집 활동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게다가 학생들 스스로가 조를 짜서 진도의 기록 보존 부스를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6월 중순까지는 수업을 피해 서로 시간을 맞춰가며, 진도와 서울을 오갔습니다. 방학 중에는 더 많은 대학원생들이 진도에서 기록 수집 봉사활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진도체육관 기록보존 부스는 11월까지 유지 가능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 참 큰 보람을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기억저장소'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다음세대재단'에서는 '하루616'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세월호 관련 웹페이지를 수집 기증해주셨습니다. '다음세대재단'이 운영하는 '소리박물관'이라는 시스템이 기억저장소 시스템 구축에 참고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용량 데이터를 수집하는 도구와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 등은 '엠군'(mgoon)에서 도움을 줬고, 시스템 구축은 대전의 '아르고넷'이라는 회사가 맡았습니다. 돈만 아는 세상에서도 돈보다 더 큰 가치를 함께 나누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건축사협의회와의 만남

'아름다운재단'에서 임대 보증금을 지원해 '기억저장소'로 쓸 공간을 빌렸습니다. 30평짜리와 60평짜리 사무실 두 개를 빌리고 나니,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답니다. 이곳에 단원고 아이들의 기록과 자원봉사자들의 기록,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투쟁 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공동체 운동을 위한 회합을 할 생각에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공간을 꾸미는 일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또 다른 만남이 난관을 능히 극복하게 해주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또 다른 우연한 만남이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명지대 교수 한 분이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공공건축 사업을 성공리에 진행한 조준배 건축가를 소개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6월 말, 조준배 건축가와 새로운 건축사협의회 부회장인 윤승현 건축가가 고잔동으로 찾아왔습니다. 사무실로 안내하자, 건축가들은 구상을 듣기도 전에 줄자로 크기를 재고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어대며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건축에 대해 모르는 저로서는 의아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의 적극성이 얼마나 고맙고 감동적이었었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 '416 기억저장소'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416archives)

'기억저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설명하자, 건축가들이 '오히려 할 일을 제공해줘서 감사하다'며 되레 인사를 건넸습니다. 사실 실내를 꾸미는 일은 건축가가 주로 하는 일은 아니라고, 겸연쩍게 말하기도 했죠. 그러나 건축가들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일에 나서는 데 한 치의 고민이나 의심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잘나가는 건축가들에게 공간 꾸미기를 부탁하는 것은 결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조준배, 윤승현 두 분 건축가에게는 그런 것쯤은 하등 상관없어 보였습니다.

2500여만 원이 소요되는 공사를 윤승현 건축가가 속해있는 '새로운 건축사협의회'가 흔쾌히 맡았습니다. '이안건설'이라는 건설사가 비용 모두를 대고, 건축설계는 윤승현 건축가가 직접 했죠. 7월에 설계를 마치고 8월 초 철거를 시작해 보름 남짓한 공사가 착착 진행됐습니다. 8월 말경 공사가 끝나자, 36명의 건축가가 다시 모여 이미지 월(image wall) 작업과 복도 벽 페인트 작업을 직접 하기도 했죠. 페인트를 칠해본 적이 없는 건축가들인 지라, 옷과 얼굴이 온통 엉망이 되었답니다. 이미지 월은 페이퍼 튜브(paper tube)를 일일이 벽에 붙이는 작업이었는데, 온종일 걸리는 지루한 일이었음에도 모두 너무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지금 그 공간에서 세월호 기록을 정리하고, 유가족이 회합도 하고, 공동체운동 기획회의를 하는 등 일이 진행되고 있답니다. 얼마 전 예지의 생일잔치도 이곳에서 했고요. 아름다운 만남이 이뤄낸 성과가 고잔동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힘이 되고 있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모임이 자주 있으니, 주변 상가와 동네 분들도 여간 기뻐하지 않는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공동체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잦습니다.


김종천-기억저장소 식구들과의 만남

제가 안산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6월 중순부터입니다. 주로 진도에 있다 보니, 아는 사람이라고는 진도에서 만난 유가족들이 전부였지요. 우리가 진도에서 세월호 기록을 수집할 때 안산에서는 김종천 씨가 '시민기록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무국장으로, 기록 관련 일을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안산 분향소에 있는 시민기록위원회 천막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검게 그을린 얼굴빛에 유가족일 것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었습니다. 김 사무국장 덕분에 안산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우며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산에서 만난 이들의 특징은 '모두 가족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하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도 행동하는 방식도 가족 같아진 것이겠지요. 그들과 함께한 덕에 '416기억저장소'를 지금까지 잘 운영해올 수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의 모든 회의가 '기억저장소'에 의해 영상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습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활동 역시 다양한 형태의 기록으로 저장되고 있습니다. 한 달 전부터는 유가족들이 가진 기록들, 앨범 속 사진에서 아이의 일기까지 가가호호 방문하며 수집하고 있답니다. 세월호에서 건져 온 트렁크 속 유류품도 '기억저장소'로 속속 기증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접할 때마다 '기억저장소' 식구들은 눈물을 훔칩니다. 하지만 좋은 인연으로 만난 이들이 함께함으로써 눈물은 실천의 의지로 승화됩니다. '만남의 힘, 함께하는 힘이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12월 11일 '세월호 이야기'에 소개한 것처럼 11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동체운동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유가족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감지해냈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들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을 편 것도 그였습니다. '기억저장소'가 그런 공동체운동의 장이 된다니, 이보다 더 뜻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근 '기억저장소' 1층에 있는 닭발집이 모임 장소가 됐습니다. 매주 화요일 공동체운동 회의가 끝나면, 유가족과 그들을 돕는 지역운동가 등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세월호 유가족 중 한 분이 정성스레 발라주는 닭발 안주와 함께 소주가 두세 잔 들어가면, 고잔동 공동체의 미래상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들의 바람·구상·희망의 소리를 들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면, 아름다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공동체 구상이 저절로 커집니다.

기억저장소 2호관 건설

12월 23일 화요일 점심, 윤승현 건축가를 비롯해 10여 명의 건축가가 모였습니다. 모임의 첫 성(聲)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송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저장소' 2호관 건설을 서둘러 마치고, 공동체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1호관의 두 배가 되는 크기에 전시시설까지 갖추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졸이며, 건축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은 1월에 설계를 마무리하고, 2월까지는 공사를 끝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용은 두세 개의 건설사가 분담해서 처리기로 결정했습니다. 2015년 4월 16일에는 '기억저장소' 2호관에서 1주년 전시회를 꼭 하겠다는 의지도 확인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연말에 이런 회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며, 또 감동스런 일입니다. 이런 감동이 모이고 또 모여, 우리를 지탱해줍니다. 그 힘으로 2015년을 살아갈 겁니다. 쭉 돌이켜 보면, 우연한 만남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우연한 만남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맺어진 필연적 만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남이 새해에는 더 커지고 넓어져, 고잔동의 따뜻한 시도가 우리 사회 전체로 확대되기를 기원합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국제/생태/세월호 등으로 나눠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 창간 이후 조합원 및 후원회원 '프레시앙'만이 열람 가능했던 <주간 프레시안 뷰>는 앞으로 최신호를 제외한 각 호를 일반 독자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 내려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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