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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복지기관의 '자진 폐업',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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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복지기관의 '자진 폐업', 무슨 일이?

[위기의 방화자활] ① 김원중 실장의 10년 자활사

복지를 담당하는 많은 기관 중 지역자활센터라는 곳이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 혹은 차상위층 중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자립을 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창업을 지원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다. '생산적 복지'의 전형이다. 전국 230개 시군구에 247개의 자활센터가 운영 중이다. 자활센터 운영비는 전액 국가(보건복지부 50%, 광역단체 25%, 기초단체 25%)가 부담하고, 복지법인에 위탁돼 운영된다.

그 중 서울 강서구에서 지난 2001년부터 운영돼 오던 강서방화지역자활센터의 모법인인 상록복지재단(이사장 박문규)이 최근 자활센터 지정서를 반납했다. 일반 기업으로 치면 '자진 폐업'에 해당되는 일이다. 사회복지사 8명이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무엇보다 강서방화지역자활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창업을 한 100여 명의 참여 주민들이 다른 센터로 이전하거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복지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프레시안>은 연속 기사를 통해 추적할 계획이다. 편집자


▲ 김원중 실장 ⓒ프레시안
강서방화자활센터 김원중 실장. 그는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의 핵심 인물이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 실장의 인생 이력을 살짝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82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이 노동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다. 삼성전자.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신분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입사했기에 '위장취업'은 아니었다. 그래서 쫓겨날 일도 없었다. "월급도 잘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7년을 일하다 떠났다. 유리 공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자신을 버리고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는 이유다. "당위적으로 살지 않고 이념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4년 동안 에니메이션을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에니메이션과 관련된 프로젝트도 하고, 광고 일도 했다. 한 때 "아빠 나 100점 맞았어요"라는 삼성전자의 '또 하나의 가족' 클레이 에니메이션 광고에도 참여했다. 그러던 중 건축회사를 하던 선배가 "디자인 부장을 맡아달라"고 김 실장을 불렀다. 그 선배는 요양원 공사를 준비 중이었다. 김 실장은 일본의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해 주거 개조비를 지원해주더라고요. 고령자의 경우 집 때문에 2차 장애를 많이 입어요. 문지방 같은 데 걸려 넘어지고, 특히 화장실에서 많이 넘어져요. 문지방을 없애거나 화장실에 잡을 수 있는 손잡이 레일을 달고 미끄럼 방지 장치도 하죠. 노인들이 넘어져 어디 부러지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합병증도 생겨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장애 유발 요소 제거를 위해 집 개조를 해주는 거죠. 우리나라도 노인 복지 차원에서 이런 사업이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이런 사업을 위한 주택개조사 자격증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교재를 번역하고 공부해서 자격증 시험에 응시했었죠. 물론 떨어졌지만요.(웃음)"

자격증을 얻지는 못했지만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을 거쳐 본인이 원하던 예술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사회복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마침 강서방화지역자활센터의 직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취직했다. 2003년이었다. 그렇게 자활센터 일이 시작됐지만 처음에는 생각과 달랐다고.

"참여 주민들이 보통 9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오면, 그들에게 홍보지 전단을 주고 '나가서 홍보하세요' 하면 일이 땡인 거예요. 무슨 홍보요? 도배사업단이 있는데, 도배 일감을 받아오기 위한 홍보죠. 공공근로랑 비슷했어요. 출근부 찍고 나가서 홍보 전단 돌리면 끝. 나도 센터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나가서 도배 영업 뛰어다녔어요.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허탈해지더군요. 참여 주민들과 나와의 관계는 뭐지? 내가 나가서 일감을 구해 오면 사람들 보내서 일을 하고. 그냥 물적 관계인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자활센터에 찾아오는 주민들의 특성과 장기가 다 다르다 보니 맞춤형 교육을 위해 스스로가 창업 전문가가 돼야 했다. 주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김 실장은 스스로 목공을 배웠고, 본인이 가르치기 힘들면 외부로 교육을 내보내기도 했다. 창업 지원을 하다 보니 '라면 가게는 목이 좋아야 하고 목 좋은 자리는 권리금이 얼마'라는 식으로 업종 별 창업 지식만 늘어갔다. 그러나 김 실장은 자신이 '사회복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영업사원'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점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혼란이 커졌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자활 일하기 시작한지 1년 정도가 지나니까 사람들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빈곤이라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기도 하지만, 그 심정 알죠? 초등학생 여동생에게 산수를 계속 가르쳐줘도 못 풀면 쥐어박고 싶은 심정. 자활에서 교육을 시켜도 변화는 없고, 수급 생활에 젖어 들려고 하고. 게다가 자활은 사회복지 업계에서 급여 수준이 제일 낮아요. 복지관의 80% 정도죠. 한 마디로 이 바닥에서는 3D업종으로 통하죠."

막막하고 답답하던 차에 찾게 된 돌파구는 '인문학'이었다.

"주민들의 자발적 능력을 키울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2006년부터 지역에 있는 복지관 관계자들과 공부를 했어요. 그 때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 저, 이병곤·임정아·고병헌 역, 이매진 펴냄)이라는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빈곤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경제적 이유만 있는 걸까?', '빈곤이 경제적 문제만 풀리면 해결되는 거야?' 이런 의구심이 깊어지면서 답답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원에 갔어요.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정원오 교수의 빈곤론 강의를 듣고 해답을 얻었어요. 빈곤의 원인이 뭐냐. 경제적 요인 말고도 사회적 배제, 문화적 배제 등 빈곤의 총체적 원인에 대해 배웠어요. 빈곤의 문제는 경제적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되고, 해결책도 경제적 해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는 천박하게 경제적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된다고 한 겁니다."

2010년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실천 방법을 찾아나섰다.

"그 무렵 사회적기업이라는 말을 듣게 됐죠. <달라지는 세계-사회적 기업가들과 새로운 사상의 힘>(데이비드 본스타인 저, 박금자 역,지식공작소 펴냄)이라는 책이 있어요. 아쇼카 재단 등 사회적기업을 통해 세상을 바꾼 사례들이 모여 있는 책입니다. 자기 교정을 위한 예민하고 섬세한 발상들이 담겨 있어요. 자활센터에서 그런 발상들을 실천하고 싶었죠. 사업 평가도 재무 평가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회계 등 사회적 평가를 하고, 하나의 사회적 경제 영역으로 키워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자본주의와 중첩되는 대안 경제의 형태가 사회적 경제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고 신뢰와 연대를 통한 사회적 소유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고민들이 죽죽죽 발전되면서 강서지역에서 복지관, 생협, 시민단체 등과 함께 하나의 사회적 경제 섹터를 구축하고 싶었죠."

이 과정에서 ㈜숲소리 송재근 대표를 알게 됐다. 원목 친환경 장난감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송 대표는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마침 김원중 실장은 자활센터에서 목공사업단을 이끌고 있어서 숲소리로부터 제작 물량을 받을 수 있었다. ㈜숲소리는 서울광역자활센터로부터 외부거래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50만 원의 포상금을 받을 정도로 자활센터와의 협력 성공 사례로 꼽혔다.

시간이 흘러 목공사업단 참여 주민 3명이 창업을 할 때 김 실장은 송 사장과 함께 새로운 창업지원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협동조합 설립이다. 지난 6월 '협동조합 숲소리'가 문을 열었다.(☞ 관련기사: "돈 벌 욕심이었으면, 이렇게 안 했죠"-자활과 기업이 뭉친 최초 협동조합 '숲소리')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 나가던 중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졌어요. 협동조합은 사회적 경제를 위한 좋은 기업 형태라는 판단이 생겼죠. 그래서 협동조합 숲소리를 만들었어요. 송 대표가 아주 큰 결정을 해줬죠. 숲소리 제작 물량을 받으려는 공장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그런데 송 대표는 물량만 주는 게 아니라 기업 이름까지 내줬어요. 숲소리라는 성공한 브랜드를 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 지난 6월 협동조합 숲소리 창립식. 숲소리 조합원들은 물론 강서지역 복지관, 생협 관계자들까지 참석해 협동조합 숲소리가 사회적 경제 영역의 초석이 되기를 기원했다. ⓒ프레시안(김하영)

이전 자활 창업 사례에 비해 책임감도 높았지만 기대감도 컸다. 기존에는 창업 후 생존이 관건일 정도로 기업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지만, 협동조합 숲소리를 통해 새로운 자활 창업 사례를 만들고 싶었다. 김 실장도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자활 참여 주민이 창업을 하면 어차피 2~3년 동안은 수익과 운영 등에 대해 관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김 실장은 감사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선 세 명이 협동조합으로 창업을 했는데,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고 물량이 늘어나게 되면 자활센터 목공 기술단에서 기술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직원 조합원으로 협동조합 숲소리에 참여하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게 참여 주민을 한 명 두 명 계속 늘려서 숲소리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키우고 싶었죠."

자활센터 업무 10년. 김원중 실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오다 자활 창업에 대해 이제야 제대로 방향을 잡았구나 싶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난 6월 센터로부터 해고를 당한 것.

(후속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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