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15년. 평생직장 개념은 희미해지고, 정리해고와 고용 불안은 일상이 됐다. 비정규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는 못 되더라도 중산층은 될 수 있다'던 믿음도 산산조각 났다.
양극화도 심해졌다. IMF 구제금융 위기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IMF=I'm fired(나 해고됐어)'였지만, 가격이 폭락한 주식과 부동산 등을 헐값에 사들이고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의 주가를 올린 일부 부유층에게는 'IMF=I'm fine(난 좋아)'이었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지만 밀려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데도 더 가난해지고 빚은 불어나는 빈곤과 부채의 늪에 빠진 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IMF 차입금을 상환할 때 245만 명이던 신용불량자는 2004년 396만 명으로 늘었고, 올해 9월 기준으로 금융 소외자(2005년 4월 정부는 신용불량자라는 용어를 없앴다)로 분류되는 7등급 이하 저신용자는 603만9071명에 이른다.
▲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실업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은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사회단체들이 제공하는 무료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밤이 되면 지하철 통로에 노숙을 했다(1998년 6월 22일). ⓒ연합뉴스 |
IMF 구제금융 위기 15년, '약탈적 금융'은 현재진행형
IMF 구제금융 위기가 시작된 지 15년이 지난 21일 오후, 빈곤과 채무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이들이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 모여 '금융 피해자 행동의 날' 행사를 열었다. 금융 피해자가 연대해 가난과 빚의 덫을 없애자는 취지다.
이들은 금융 채무자들이 탐욕적 금융 수탈 정책의 피해자라고 규정했다. 가난과 빚의 늪에 빠진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고 '도덕적 해이'를 비난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구조적 원인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1998년 IMF의 요구에 따른 이자제한법 폐지, 카드 대란을 불러온 1999년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비중 및 한도 폐지, 정리해고·파견근로·변형근로 등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정책들이 금융 채무자를 양산한 현실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 피해자 행동의 날' 참가자들은 지난 15년 동안 진행된 한국 사회의 '금융 세계화'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금융 자본의 수탈'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허영구 좌파노동자회 대표는 "15년간 위기 극복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했나"라며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되고, 수십 명이 분신했으며, 수십만 명이 정리해고로 쫓겨난" 끔찍한 상황을 되짚었다. 허 대표는 "서민을 쥐어짜는 금융 수탈이 계속"되면서 "한국은 하루에 수십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야만적인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들도 비판했다. 허 대표는 "유력 대선 후보들이 서민의 피부에 와 닿는 금융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다들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를 지속하려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허 대표는 금융 세계화의 폐해를 확산시킨 "IMF 외환위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 후 "약탈적 금융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파산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서 활동가는 올해 초 마련된 '새로운 개인 파산 절차 운용 실무'(새 파산제도)가 새롭게 출발하려는 채무자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새 파산제도의 핵심은 파산관재인 선임을 대폭 늘리고 그 비용을 30만 원 이하로 하며, 파산과 면책 절차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 활동가는 "(대부분) 정리해고, 비정규직, 실업 등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채무라는 점에서 파산제가 확대돼야 함에도 새 파산제도는 그 문턱을 높였다"고 비판했다. 이전과 달리 배우자·부모·자녀의 재산 및 10년간의 주거 변동 사항, 3년간의 과세 증명, 5년간의 출입국 사실 증명 서류 등을 과도하게 요구해 채무자를 위축시키고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서 활동가는 "(정부가) 파산 자체를 포기하게끔 유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금융 피해자 행동의 날' 조직위원회는 변호사 중에서 파산관재인을 선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민간 법조 시장의 경제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채무자의 비용으로 채무자를 조사한다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금융 채무 대책이 채권자 편향으로 돼 있기 때문에, 파산 원인이 늘어나는데도 개인 파산 신청 건수는 이명박 정부 들어 줄었다고 비판했다. 개인 파산 신청 건수는 2007년 15만 5190건에서 2011년 6만 9754건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진짜 범죄자는 가난을 만들어내고 가난한 이들을 모욕하는 사람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조직국장은 "파산은 범죄가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짜 범죄자는 "가난을 만들어내고 가난한 이들을 모욕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김 조직국장은 "IMF 위기 때 쓰러져가던 은행들에 168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살려냈다"며 "그렇게 세금으로 배를 채운 저들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비정규직을 만들어내고, 그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을 계속 모욕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도 비판했다. 김 조직국장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양 의무자 기준을 없애야 한다"며 한 가정의 사례를 소개했다.
"빌딩 유리창 청소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일하던 중 떨어져 장애인이 됐다. 그 아들이 직장에 다니게 되자, (부양 의무자 기준 때문에) 아버지는 수급자에서 탈락했다. (가난과 빚의 늪에 빠진) 아들은 200만 원 정도 되는 월급의 거의 절반인 100만 원씩을 매달 갚아야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희망 없는 생활에 지친 32세 청년은 결국 얼마 전 아버지를 떠나 잠적했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인가."
최덕용 한국금융피해자협회 실장은 금융 피해자의 삶을 증언했다. "2-3년 전까지는 채무, 추심 같은 걸 모르고 살았다"는 최 실장은 파산의 쓴맛을 봐야 했다. 최 실장은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은행 돈을 자기 돈처럼 썼지만 나 같은 서민에겐 은행 문턱이 너무나 높았다"며 고금리, '꺾기' 등을 당하다 결국 사업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 후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비인간적인 채권 추심에 시달려야 했다. 최 실장의 아내도 "남편에게 보증을 서준 죄"로 빚쟁이가 됐고, 두 자녀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빚쟁이 아닌 빚쟁이"가 됐다.
최 실장은 "파산 신청을 하려 해도 '도덕적 해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자 취급을 한다"고 비판했다. "새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영원한 채무자로 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최 실장은 '도덕적 해이'를 강조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빚진 사람은 다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것인가? 학자금 대출로 빚진 아이들은 모두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것인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개인들이 모두 잘못한 것이고 정부, 국회, 사회 지도층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인가? 혈세를 수백억씩 낭비하고 공적 자금을 투입하게 만드는 것이 도덕적 해이 아닌가? (…) 건실하게 살다가 실패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살아갈 길은 이 땅에 진정 없는 것인가?"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생경제위원회의 백주선 변호사는 법적인 문제를 짚었다. 백 변호사는 이자 상한선을 20%로 내려 고금리 폐해를 줄이고, 채무자의 방어권을 법에 명시해 강압적인 채권 추심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이한 지 15년이 된 21일, 금융감독원 앞에서 '금융 피해자 행동의 날' 행사가 열렸다. ⓒ프레시안(김덕련) |
"탐욕스런 금융 자본, 그리고 부패한 '모피아'와 싸워야"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은 "IMF 위기 이후 한국은 1% 금융 자본가들에게 99%가 수탈당하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들 대선에 정신없는 이때 '모피아'들은 금융 수탈을 더 많이 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키고 있다"며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을 거론했다. 홍 사무처장은 이에 대해 "3조 원을 모아온 5개 증권사를 위한 법을 만드는 국회, 실패하면 그 비용을 납세자에게 물리는 법이자 '모피아'의 숙원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대선 후보들에 대해서도 "유력 대선 후보 중 어느 누구도 금융과 관련해 서민 편에서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홍 사무처장은 "지난 정권의 2인자였던 문재인 후보는 파생상품 거래세에 반대했고, 안철수 후보는 '모피아'의 대부인 이헌재 씨를 멘토로 삼았다"고 질타했다. 이어 "저들(대선 후보들)은 (약탈적인) 금융 시스템, 경제 시스템을 바꿀 생각이 없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든 100일 안에 '이명박이 차라리 낫다'는 말이 노동자들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홍 사무처장은 "탐욕스런 금융 자본, 그리고 부패한 '모피아'와 싸워야 한다"며 "금융 피해자들의 연대"를 거듭 강조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야외에서 발언을 경청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처지를 상징하듯, 참가자들과 차가운 길바닥 사이에는 얇은 방석 하나뿐이었다. "일해도 더욱 가난해지는 세상"이 아니라 "빚 없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기를 소망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차가운 거리로 계속 내몰 것인지 한국 사회에 묻고 있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