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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IMF 위기를 책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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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IMF 위기를 책임지지 않았다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⑦] 국가경제 파탄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불러온 금융-외환위기는 예견된 사건이었다. 1997년 11월 어느 날 갑자기 한두 사람이 잘못해서 터진 사태가 아니었다. 최소한 지난 수년간 집행되어온 경제정책의 실패가 금융위기에 이어 외환위기를 초래했고, 그것이 국가경제를 파탄내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책임진 사람이 없었다.

엉뚱하게도 물가폭등, 대량실업, 집단도산, 세금증가, 소득감소, 집값-땅값폭락 등으로 경제건설에 힘 바쳐온 산업역군들이 그 짐을 지게 되었다. 국가경제의 근간인 중산층이 급속하게 붕괴되고 무수한 가정파탄이 잇달았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그 멍에를 지고 신음하고 있다. 당시 실업대열에 끼었던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해 소득-계층 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사회구조의 극단적 양극화는 그 상당한 원인이 IMF 사태에 있다.

IMF도 한국의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실태를 보고 깜짝 놀랐던 같다. 많은 금융회사들이 자기자본이 동나 버린 상태였다. IMF는 융자조건으로 금융회사의 자기자본 비율을 8% 이상 유지하도록 요구했다. 이 비율을 지키지 못하면 폐쇄조치를 당할 판이었다. 금융회사들이 다시 대출회수에 나섰고 이어 대출중단에 들어갔다. 시중의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금리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자금난은 흑자기업도 강타하여 연쇄도산으로 인한 대량실업이 속출했다.

30대 재벌의 평균 부채비율이 450%나 되었다. 선진국 같으면 융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계열사끼리 지급보증을 통해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IMF는 상호지급보증을 축소하여 재무구조를 개선하도록 요구했다. 자금수요는 늘어났지만 IMF는 상당기간 고금리 체제를 유지했다. 외화유치를 촉진하고 금융회사로 하여금 부실채권을 정리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토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금융비용이 급증하여 경영수지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부동산을 처분하고 계열기업을 매각하려고 해도 매수자가 없는 실정이었다. 결국 손쉬운 인력감축에 의존함으로써 흑자기업에서도 대량해고가 발생했다. 감량경영을 위한 인건비 절약은 인력감축에 그치지 않았다. 잔여인력의 임금도 삭감했다.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정리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갖가지 증세정책이 나왔다. 세금증가는 소득감소로 이어졌다. 대량해고, 임금삭감, 세금증가, 물가폭등 등으로 소득이 감소했다. 소득감소는 내수시장을 침체시켜 매출감소를 가져왔고 그것이 또 인력감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따라서 실업대열이 더욱 길어졌다.


▲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서울 세종로 청사에서 긴급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최종 협상 결과를 발표한 후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극단적 양극화 부른 'IMF 위기'

김영삼 집권 5년 동안 외채가 1100억 달러 이상 증가했다. 산업구조가 조립-가공 위주로 구축되어 부품산업의 기반이 취약했다. 수출증대를 도모하자면 시설확충을 꾀해야 했고 그러자면 선진국에서 자본재를 수입해야 했다. 외채의 상당액이 실물투자를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경제파탄으로 인해 기계장치의 효용가치가 폭락했다.

IMF 관리체제가 도입된 이후 휴업-폐업한 공장의 기계장치가 해외로 헐값에 팔려 나갔다. 모든 경제주체가 부자놀음에 정신이 나간 사이에 많은 외화가 밑 빠진 독 물 새듯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다고 금융-자본거래를 자유화하는 바람에 외화반출에 관한 규제를 크게 완화했으니 해외도피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1997년 말 외채규모가 1530억 달러라고 했지만 얼마나 신빙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민간기업의 현지금융과 역외금융을 정확하게 파악했을 리가 없다. 민간부문이 자기신용으로 해외에서 기채(起債)하고 그것이 상거래와 연결되면 파악이 용이하지 않다. 외채규모가 2000억 달러가 넘을 것이란 추정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경상수지가 흑자를 내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외채를 상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채무차환 단계에 이른 것이다. 외국인에게 토지취득을 허용하고 공기업을 매각했던 것은 바로 그 까닭이었다. 말이 외자유치였지, 외채를 갚으려고 은행, 토지, 건물, 공장, 기업 등을 닥치는 대로 외국인에게 헐값에 팔아 치웠다.

1998년 들어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됐다. 고무적이지만 무역구조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수출이 늘고 있었지만 환율이 70%가량 앙등한 데 비하면 그 증가율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도산업체의 기계장치와 중장비 등을 싸구려로 팔았고 금을 모아 30억 달러어치나 수출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유지했던 것이다. 수출경쟁국인 동아시아 국가들도 외환위기를 겪고 있어 싸구려로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요시장도 경기침체로 수입수요가 줄어 수출증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수입수요가 감퇴했는데 무역흑자가 증대했으니 이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부품수입의 감소는 2~3개월 후 완제품 수출의 감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또 자본재 수입의 감소는 시설투자의 축소를 의미하여 경기침체의 장기화를 예고했다. 무역수지가 흑자를 내자 일부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마치 경제가 호전되는 것처럼 호도하는 짓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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