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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서울·경기·인천의 한나라당 '싹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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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서울·경기·인천의 한나라당 '싹쓸이'다"

[박동천 칼럼] 언어의 장벽과 현실의 장벽

나에 대한 두 번째 논평에서 송병헌이 취한 입장의 골자를 내가 읽은 대로 요약해 본다. 그는 내가 노동 정치에 관해 제기한 비판적인 논점 가운데는 자신도 공감하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노동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노동 정치의 형성을 위해서 더욱 우선돼야 할 것은, 활동가들 사이의 소통이 아니[라] (…) 현장의 노동운동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해온 구조와 제도를 타파하고 개혁하는 문제"라고 한다. 이처럼 "구조와 제도를 타파하고 개혁하는 문제"를 강조하면서도 그는 내가 제시한 사법 제도 개혁은 구조와 제도를 타파하고 개혁하는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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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핵심적 차이를 바로 논의하게 되면 지금까지 주고받았던 내용과 대동소이한 소리를 단지 반복하는 데에 그칠 위험이 높아 보인다. 마침 송병헌은 두 번째 논평에서 차이와 일치에 관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해, 몇 가지 흥미로운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했는데, 이런 점들에 관한 그의 생각은 한국의 노동운동계에 대한 내 비판에 일부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은 노동 정치"라고 입장을 고수하는 그의 태도와 상당히 두꺼운 연관이 있어 보인다. 논리적으로 일관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론이나 실천에서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지켜져야 하는가, 애당초 일관성이라는 것을 안 지키면 무슨 탈이 나는가, 등등의 화두들과 관련해서 그가 현재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대략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근처에는 철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화두들이 섞여 있는데, 그것을 그가 자체로 파고들어 생각해 봤는지, 생각해 봤다면 얼마나 어디까지 파고들어 갔는지 등은 나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 나를 상대로 한 그의 글만 봤을 때 그런 탐색의 흔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까지는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런 탐색이 충분히 진행되었더라면 현재 그와 내가 "노동 정치"와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해서 벌이고 있는 논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어쩌면 직접적으로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안목에 도달하기가 좀 더 쉬워질 수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우선 이 몇 가지 화두에 관해 내가 생각하는 견지를 짤막하게 (또는 길다고 볼 사람도 있겠다) 드러내기로 하고, 그 다음에 핵심적 차이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차이와 일치

송병헌은 말하기를, 이 논의가 시작하기 전에는 나와 차이보다는 일치가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논의가 진행함에 따라 일치보다는 차이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마 이는 심각한 의미를 품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다소 가볍게 사용한 표현일 것이다. 설사 심각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에 관해 몇 마디 하는 것 때문에 가볍게 한 말에 대해 정색을 하면서 달라붙는다는 인상을 받지는 말기를 바란다. 차이와 일치에 관해 여기서 몇 자 적는 까닭은 말꼬리를 잡기 위함이 아니라, 나와 송병헌이 다름 아닌 차이와 일치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방식의 차이를 (또는 일치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기실 현재의 토론이 생산적으로 전개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차이와 일치에 관해 송병헌은 나와 토론을 해보니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견해 차이의 거리가 더 크다고 느꼈다고 말하는데, 내게는 이 느낌이라는 것이 그와 나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견해 차이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송병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내 편에서 말하더라도, 나를 향해 쓴 송병헌의 비평을 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차이를 종종 발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차이를 발견하는 곁에 예상하지 못한 일치를 발견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거리가 있다. 이처럼 (전에 없던) 토론이 진행하면서 새로 알게 되는 일치점과 차이점들 사이에 상대적인 비중이 어느 쪽으로 치우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이에 차이의 간격이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지기만 하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새로 발견된 일치점의 수효가 새로 발견된 차이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조차 새로 발견된 차이점 하나가 워낙 감정적으로 치명적 대목을 건드려서 두 사람이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또는 의견의 일치가 설령 전혀 이뤄지지 않더라도, 토론이 진행할수록 두 사람 사이에 견해 차이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교감 같은 것이 생기고 농도가 진해지는 경우도 아마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피터 윈치(Peter Winch)는 생전에 노먼 말컴(Norman Malcolm)의 책에 대해 비평하는 와중에, "내가 제시하는 거의 모든 논점에 대해 노먼은 반대 의견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이 정도의 대화를 서로 나눌 상대도 대단히 희소하다는 점에서는 서로 동의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경우에 윈치와 말컴 사이의 견해 차이라는 것은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드는 동력이 아니라 대단히 가까워지게 만드는 동력임이 분명하다.

이 주고받음이 앞으로 몇 차례나 더 계속될지도 알 수 없고, 주고받음이 끝났을 때 그 때문에 나와 송병헌이 처음보다 더 멀어지게 될지 더 가까워지게 될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현재의 논의에서 불거질 수밖에 없는 견해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이 멀어져야 할 필연성은 없다고 보며, 실제로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일치를 기대하고 시작한다면 실망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지만, 일치를 기대하기 전에 상대를 이해하는 데 먼저 초점을 맞춘다면 토론 때문에 사회가 무너지는 사태는 아주 특별한 예외를 빼면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그 책에서 "정책의 내용보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암시했던 내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소통이란 의견의 일치에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 의견의 일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이 이뤄질 수 있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구분과 완강한 이분법

송병헌의 평에 대한 첫 번째 답변에서 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나누는 송병헌의 태도를 가리켜 "완강한 이분법" 또는 "도식적 구분" 등의 표현으로 불렀다. "완강한"이나 "도식적"이라는 형용사에는 물론 뭔가 잘못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이에 관해 송병헌은 내가 자신을 가리켜 그런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약간은 언짢지만, 전반적으로는 자신의 이분법이 정당하기 때문에 설사 누가 그것을 "완강하다"고 부르더라도 크게 개의치는 않는 듯이 보인다. 반면에 나는 여전히 그의 구분은 불필요하게 도식적이며 완강하다고 보는데, 이런 지적은 그의 두 번째 비평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먼저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용어와 그런 용어의 의미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그런 용어들을 통해서 사물, 사건, 사태, 사람, 사고방식 등을 구분한다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파고들어 살펴보자. 아래 그림은 한 축으로는 집단의 목적을 중시하느냐/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느냐, 그리고 다른 축으로는 공권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느냐/사회적 강자가 멋대로 힘을 행사하도록 방치하느냐고 하는 두 차원에서 국가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무정부주의의 개념적 영토들을 각각 도식화해 본 결과이다.

▲ 도식적 구분의 예. ⓒ프레시안

이 그림은 이 네 가지 정치적 성향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지는 상대적 위상을 보여주고, 아울러 서로서로 부분적으로 겹친다는 (또는 독자에 따라서는 겹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로부터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점을 알려 준다는 데에 유용성이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고 나아가 설사 아무리 그 효용이 크더라도 여전히 도식적인 구분일 수밖에 없다. 도식적(schematic) 이해란 어떤 현저한 특징에 착안한 개략적인 윤곽을 파악한다는 뜻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비하면 인식의 굉장한 향상에 해당하지만 그처럼 개략적인 윤곽 이상의 세부 사항에는 별로 도움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항상 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식적인 구분이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는 대목에 접어든 다음에도 계속 그 구분에만 매달려서 사물과 사건과 사태와 사람과 사고방식들을 나눠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완강한 이분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도식을 적용하려 해봤자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경우란 무엇일까? 예컨대 20대 때 노동운동 과격파에 속했던 경력을 가지고 오늘날 한나라당 간판으로 경기도지사를 지내는 김문수는 국가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자유주의자인가, 무정부주의자인가를 물어보자. 위 그림에 표시된 도식적인 좌표 공간에서 김문수의 위치를 잡아 점을 찍어보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아주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 도식이 아주 무용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김문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왼쪽 맨 아래 구석에 그의 위치를 잡을 사람은 없을 테니, 점들은 대체로 그림의 상반부에 모일 것이고, 그로써 김문수에게 무정부주의 성향은 별로 없고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다는 사실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그가 자유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국가주의자인지를 물으면서, 이 질문에 반드시 정답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위 도식이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사회적 자유주의를 책에서 언급한 것은 주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겹치는 매우 넓은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합리주의-공리주의-법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명박 정권을 몹시 해로운 정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도 사회주의에는 이론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거부감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을 (내 짐작에 2002년 노무현에서 2007년 이명박으로 이동한 유권자 가운데 다수가 이런 성향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 동력으로 수용할 수 있는 지평은 오로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겹치는 영역에 대한 보다 명석한 인식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을 내가 강조한다는 것은 물론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를 배제하는 자유주의를 둘 다 배격한다는 함의를 가진다.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볼셰비키와 마오와 김일성의 예만 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 조직 원리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고, 사회주의를 배제하는 자유주의란 대처와 조지 W 부시와 이명박이 보여주듯 폭력에 의존하는 저질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배격한 후에도 물론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는 물음은 남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물음이야말로 "진짜 문제", 즉 정치 사회가 실존적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로서, 진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교과서나 이론이나 개념적인 도식 등이 도움이 전혀 될 수 없고,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떤 유형의 소통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지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진보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각자가 신봉하는 강령이나 노선이 (자기가 보기에) 옳다는 주장만을 펼치지 말고,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소통의 불길을 일으켜서 어떤 조직된 힘으로 엮어낼 것인지를 아주 깊게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에 내 책의 주안점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병헌은 마치 내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듯이 독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간략하게 제시하는 개념 규정이라는 것을 보면 그가 이 두 주의를 강령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강령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매우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야 한다. 한국 정치의 진보나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해서 하나의 통일된 노선을 추구하기로 (다시 말해 설사 결정된 노선이 자기 맘에 안 들더라도 승복하겠다고) 겉으로만이 아니라 내심으로까지 합의를 한 다음, 한데 모여 내용 및 절차에 관한 토론 끝에 어떤 강령을 결정하고, 거기에 이름을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붙이는 일련의 과정이 실제로 일어난 다음에나 사회적 자유주의는 하나의 강령이 될 수 있다. 만약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강령을 정하기로 충분한 사람들이 합의를 해서 그 내용에 무엇을 넣을지 의견을 구하는 단계라면, 나도 아마 몇 마디 보태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먼저 필요한 일은 무엇보다 잡다하게 찢어져 있는 자칭 타칭 "진보"와 "개혁"의 세력들이 하나의 운동을 향해서 집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개방적이고 유연한 안목, 그러면서도 결단과 집행에서는 단호할 수 있는 실존적 의지를 갖춰야 하리라고 그 책에서 주장했던 것이다.

송병헌이 여전히 완강한 이분법에 (아마도 스스로 자각하지는 못한 채 : 이 표현이 예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지금까지도 상당히 그랬지만 앞으로의 논의에서는 더욱 예의는 묵살하고 오직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만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로잡혀 있는 증거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역사적 출발점이 다르고, 사회적 기반이 다르고, 미래 구상에서 다르다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각 이유가 모두 현재 쟁점의 본질을 파고들기보다는 자신이 미리 설정해 놓고 있는 이분법을 반복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첫째,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 자체도 지극히 모호한 말이지만, 설령 출발점이 달랐다고 치더라도 지금부터 갈 길이 달라야 할 까닭이 없다. 기어이 나누기로 하면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주로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말이고, 대단히 흡사한 발상이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독일어권 및 그 영향을 받은 지역의 언어로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또는 지역에 따라 민주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사회 사상을 압도했던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지성계에서 특별히 우월적 지위를 차지한 적이 없고 오히려 오웬의 사회주의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케인스의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우파의 원조에 해당하는 미제스가 밀-케인스를 마르크스나 엥겔스보다도 한 술 더 뜨는 사회주의자로 치부했었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회 사상을 대표했던 영국이나 미국과 유럽 대륙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병헌이 전공한 베른슈타인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엥겔스나 카우츠키의 사회민주당이 아니고 "선거식 의회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세력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엥겔스나 베벨의 사회민주당이라고 하더라도 볼셰비키가 다수파로 행세할 수 있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비하면 훨씬 자유주의적인 풍토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사회적 자유주의를 말할 때 염두에 두는 사람의 목록을 일부 밝히면, 그린, 홉하우스, 밀, 케인스 등에 더해서, 베른슈타인, 조레스, 블룸, 오웰, 베유(미테랑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베유 말고 철학자 베유), 그리고 최근의 인물로는 롤스, 센, 진, 기타 등등이 포함된다. 내가 독일어를 읽지 못해 독일 쪽 사정에 어두워서 그렇지, 독일어권이나 여타 언어권에도 내가 알기만 했다면 이 목록에 포함시켰을 사람들은 대단히 많을 것이다. 예컨대 조스팽이나 슈뢰더나 블레어는 모두 마르크스식 도식에 비추면 자본에 영혼을 팔아먹은 배신자로 보일지 모르지만(베른슈타인이나 조레스나 오웰이나 베유 같은 고도의 지식인조차 마르크스의 결벽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불필요한 배척에 앞장선 경력이 종종 있다), 나처럼 진짜 문제에서 도식보다 소통과 운동을 중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시라크나 콜이나 대처의 전횡에 대해 현실적으로 최선의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노선으로 평가될 수 있다. 좌우지간, 만약 조스팽이나 슈뢰더나 블레어가 어떤 공동 행동을 취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역사적 출발점이 다르다는 핑계를 한사코 고집하면서 손사래를 쳤다면 비난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유치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다른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공동 보조를 취하지 못한 경우는 물론 많았는데, 그 역시 단순히 "일치"를 준거로 해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사회적 기반"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만을 제기하고자 한다. 방금 위에 내가 열거한 사람들은 대개 미숙련 육체 노동자의 형편에 비교했을 때 상당히 유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부모 아래 태어나 자라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스승이나 선배 및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개선할 책무를 느껴서 정치사회 운동에 뛰어든 부류이다. 이들의 "사회적 기반"이 육체 노동자들의 사회적 기반과 다르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송병헌이 "사회적 기반"이라는 문구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노동운동이 본래적으로 이와 같은 지식인들로부터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목표와 명분에 공감하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그 책에서 노동운동 자체를 거론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 하나도 여기에 있다.

셋째, 미래 구상이 다르다는 지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얘기가 전개되기 전까지는, 이러저러한 점이 다르다는 사실 진술이 아니라 송병헌이 내심 지니고 있는 추정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판정으로 내 눈에는 읽힌다. 송병헌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는 미래 구상이야말로 사회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과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에 관한 대안을 가지고 흥정과 협상을 벌이게 되면 충분히 통일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한다. 이 점을 이제 내가 장기 의제로서 제안한 사법 개혁과 관련해서 다음 항에서 따져보자.

권력, 구조, 제도를 개선할 의제로서 사법 개혁

내가 제안한 사법 개혁에 관해 송병헌은 내용, 현실성, 유효성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사법 개혁에 관한 그 책의 논의는 무엇을 바라봐야 할 것인지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골자만을 말한 것으로서, 사법 개혁의 내용이나 함축을 세세하게 다룬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내가 말하고자 한 의미가 송병헌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첫째, 내용에 관해 송병헌은 "오늘도 부당 노동 행위와 대규모 정리 해고가 여전히 자행되고, 공권력에 의한 파업 진압과 시위 탄압이 지속되는 등 자유권과 노동 기본권이 탄압받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계층 양극화가 심화되는 등 생존권적 기본권이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위와 같은 개혁들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단지 자본주의를 조금쯤 '정상화'시키는 조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공권력에 의한 파업 진압과 시위 탄압, 자유권과 노동 기본권 탄압을 문제라고 보는 송병헌으로 하여금 사법 개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하는 좋은 단서에 해당한다.

우선 송병헌 자신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문제들이 왜 사법 개혁이라는 의제와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지부터 (당연한 일인데도 송병헌이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다시 한 번 부각해야겠다. 경찰이 파업을 진압할 때, 시위권과 노동 기본권을 탄압할 때, 경찰은 그런 파업과 시위가 "불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노동자나 시민들은 파업과 시위가 표현의 자유라든지 생존권과 같은 기본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두 진영이 직접 힘겨루기로 결판을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정한 심판 기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길이다. 크게 말했을 때 정치가 바로 그런 심판 기능에 해당하는 것이고, 좀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가서 보면 사법 기능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심판 기능이다. 촛불 집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도심에 촛불이 하나만 나타나도 우르르 몰려가 억압하는 경찰의 행태에 관해 당한 사람들이 행정소송이나 헌법소원을 내고, 그에 관해 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시민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설사 대통령이 경찰 수뇌부에게 그런 암시를 주더라도 경찰이 법원 판결을 줄곧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송병헌으로 하여금 이런 당연한 연관을 무시하도록 이끈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나 법체계가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이라고 나는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동경하는 몽상가가 아닌 담에야, 국가 기능의 핵심은 사법 기능이라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법 기능이 당장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것처럼 나타난다는 사실 때문에 사법 기능 자체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으로 사춘기적 미숙성이 아니겠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 기능이 기득권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내 주장을 송병헌은 "자본주의의 정상화"에 다름 아니라는 이유로 일축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정상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사법의 민주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 개혁을 말할 때 나는 사회주의/자본주의 구분과 상관없는 지평에서 (여기는 저런 구분이 논의의 진전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지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고하는 반면에, 송병헌은 그런 나에게 기어이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는 자가 제작한 족쇄를 씌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둘째, 송병헌은 내가 말하는 사법 개혁이 현실성이 없다고 꾸짖는다. 며칠 전,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어떤 분과 이런 얘기를 잠시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분의 첫 번째 반응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런 개혁은 진보 정권은 못하고 보수 정권이나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획기적인 개혁일수록 진보 정권이 못하던 일을 보수 정권이 맡아서 처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개혁의 필요성을 진보 세력만이 감지하고 일반 대중은 정치 공방 자체를 두려워하는 상태라면, 진보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공권력만으로는 기득권의 저항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은 반면에, 개혁 의제에 관한 사회적 논쟁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진행하여 마침내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필요성이 어렴풋하게나마 인지되기 시작한다면, 보수파 가운데 영리한 축에서 그런 의제를 받아들여 정책화한다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훨씬 덜 불러오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노회찬이 서울시장이 되어 무상 급식을 시도하는 경우와 원희룡이 그렇게 하는 경우를 가상해서 보수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관점은 급진파가 발명한다. 급진파가 그것을 식상할 만큼 전파하고 나면 보수파가 채택한다"고 한 마크 트웨인의 관찰이 적확하게 들어맞는 대목이다.

내가 말하는 수준의 사법 개혁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기로 말한다면 어떤 다른 개혁 의제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제창하는 까닭은 사법 개혁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도 안에서 가장 발본적인 수준의 구조 개선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과 지위와 언론이 결합되어 있는 현재의 강고한 기득권 체제는 이보다 훨씬 지엽적인 수준의 변화에도 극렬하게 저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구조의 개혁이란 항상 기득권의 저항을 누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기득권의 저항을 누를 수 있는 힘은 오직 인민 다수의 공감에서만 나올 수 있는데, 이러한 공감의 단초를 나는 지금 진보를 원하는 지식인 계층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지식인이란 학위나 학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분별해서 이해할 줄 알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포함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국가의 본질적 권능이 사법 기능임을 뚜렷이 자각하고, 대한민국의 경우 고려나 조선에서 일제와 독재를 거치는 동안 사법 기능이 줄곧 행정권의 눈치를 보는 습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아서, 그 사법 기능의 주체로서 인민의 역할을 확립하는 방향의 개혁에 나선다면, 이 일은 더 이상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발상이라도 "식상할 만큼 전파된" 다음이라면 보수파가 앞장서서 채택하자고 나서게 될 정도로 시대의 요청이라는 파도를 탈 수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보수파가 내가 주장하는 정도의 발본적인 구조 변혁을 시대의 요청으로 받아들일 시기라면, 나는 누가 나를 보수파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을 것이며, 실제로 보수파의 일원이 되더라도 특별히 양심이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내 생전에 오기만 해도 무척 행복하겠다.

셋째, 송병헌은 사법 개혁의 유효성을 시비하면서 "학연·지연, 정치 권력과의 유대, 기업과의 유착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득권 집단이자 권력 기관인 법원이 전향적인 자기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의심한다. 이 의심은 물론 당연한 것인데, 동시에 여기서 의심되는 대상이 장기적인 효과인지 단기적인 효과인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법 제도를 보통법 체계로 개편한다는 것은 일면 법원 조직법이라든지 검찰청법, 그리고 형사·민사소송법을 개정하는 일을 포함하지만, 보통법 체계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되기까지는 법 개정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이것은 왕조 체제에서 의회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만으로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내 책에서 제창하는 변화는 의식과 문화, 즉 공론 차원의 변화로서, 우리 사회의 진보 진영이 권력으로 당장 좌우할 수 있는 차원에만 시선을 국한시키지 말고 공론의 차원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 가운데 하나였다.

보통법 체계로 방향을 틀더라도, 물론 개별적인 상황에서 법원이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려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재판 방식이 내가 제안한 대로 공판 중심주의로 바뀌고 수사의 개시부터 무엇이 적법한 절차인지에 관해 판사의 통제를 받도록 한다면, 예컨대 한명숙이나 노무현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검찰이 짜 맞추기로 수사할 수 있는 여지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권력의 속성상 완전히 없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또한 배심 재판이기 때문에 판사가 법정에서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도 크게 줄어든다.

판사나 검사의 권력이 줄어들더라도 판결이 노동자편으로 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당사자주의 재판이라고 정의의 실현이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민주적 결정이 최선의 결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이치와 정확하게 똑 같다. 단, 배심 재판의 경우 정의의 요청이 무시되고 계급적으로 편향된 평결이 나오게 된다면, 적어도 문제의 원인이 판·검사라고 하는 소수 엘리트 집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왜곡된 문화에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운동의 초점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장벽과 현실의 장벽

이 외에 송병헌은 민주주의의 위축을 우려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오독에서 비롯된 일로 보인다. 절차적 민주주의란 "직접적인 타격을 추구하는 발가벗은 결투"의 방식을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항의나 시위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가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필수적으로 광범위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그 책에서 여러 차례 말했고, 나아가 "시민의 불복종이나 혁명의 시도"(287쪽)까지도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자칭 절차적 민주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법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법실증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법실증주의를 대단히 강하고 분명하게 비판하면서 가장 깊은 층위에서 정치와 법이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책에서도 강조했던 사람이다. 더구나 절차적 민주주의자들 가운데 보수적인 취향의 인물들이라도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있었던 시민혁명을 두고 "절차를 어겼기 때문에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현행 한국의 자본주의에 불의와 억압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때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후행 질문은 불의와 억압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불의와 억압이 있다고 믿게 만들 것인가이다. 나는 이것이 담론과 문화와 의식과 계몽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법 개혁을 부르짖는 것인데, 이런 내가 발가벗은 결투를 "철저히 배제"한다고 오독한 위에서 섭섭해 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불의와 억압의 존재 증명을 "직접적인 타격"을 통해 하겠다는 심사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결투를 통한 증명은 곧 승자가 옳다는 얘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기실 누가 옳은지를 가려내기 보다는 누가 강한지를 가려낼 뿐이다. 그렇더라도 만약 송병헌이 생각하는 노동 정치가 결투를 통해 스스로 강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상태라면, 그 힘을 계속 휘둘러서 또 하나의 억압 체제를 빚어내지 않는 한 나는 특별히 속상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결투를 한다면 강자가 아니라 약자임이 입증될 뿐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 정치가 결투를 통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했다가 스스로 틀렸던 것으로 판명을 당해버리는 결과를 자초하는 사태가 온다면, 나는 그런 노동 정치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는 만큼이나 분별력 없는 지식인들의 선동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박동천 지음, 모티브북 펴냄). ⓒ프레시안
생각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내가 원하는 상태의 사회나 송병헌이 원하는 상태의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나는 제대로 된 구체적인 답변을 들은 기억이 아직 없다) 사회나 아마도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 세상이 바뀔 정도로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이 바뀌는 일은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만큼이나 추구하는 주체들에게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송병헌이 원하는 노동 정치와 내가 원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사회적 자유주의)가 대략이나마 행동 노선을 공유하려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등에서부터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언어의 장벽들을 상당히 많이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장벽들이 부서진 다음이라면 현실의 장벽도 꽤나 부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정권의 공권력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깡패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례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과 경기와 인천을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쩌면 송병헌이나 내가 원하든 않든 한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공동 보조를 취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나는 책에서 노동 정치의 가능성을 중시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노동 정치 세력이 자유주의와 연대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노동 정치에 대한 원론적인 비판을 잠시 미룰 용의가 있다.

그런 경우 내가 비판을 미룬다는 사실만 가지고 누가 평하길, 박동천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고 사회민주주의로 넘어 갔(왔)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안목이 편협해서 자기 눈에 낀 안경의 색깔을 대상의 색깔로 뒤집어씌우는 셈이라고 대꾸해 줄 것이다. 반면에 누가 박동천더러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에 주목한다고 평한다면 적어도 그 대목에서만큼은 도식적 이분법에서 탈피한 안목의 소유자라고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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