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내 책에 대한 논평에서도 역시 그 세 가지 점은 변함이 없다. 당시에 표명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합해서 이 기회에 애정 어린 비판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 고마움이란 그의 입장에 면종복배하기보다는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대목들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표현될 수 있는 종류라고 믿는다. (☞관련 기사 : "노동 없는 자유주의…한국 사회 못 바꾼다")
내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펴냄)에서 정치 변혁을 위한 주체로서 노동자 세력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송병헌은 내가 노동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하나의 결함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로부터 유추하면, 한국 정치의 진보를 위해 말을 꺼내기로 한다면 누구나 노동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을 상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박동천 지음, 모티브북 펴냄). ⓒ프레시안 |
내가 노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로는 주로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단순한 이유는 실제 권력 투쟁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아야 할 것인지는 그 책의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했던 주제는 한국 사회 진보 진영의 정치의식을 구성하는 매우 많은 요소들이 속수무책으로 보수적이며 편협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이때 "진보 진영"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 중에는 송병헌이 "노동 정치" 세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속한다. 다시 말해서 내 책은 "노동 정치"를 희망으로 부각하는 뱡향과는 반대로, 그 "노동 정치"라는 것이 현실 정치에서 별로 희망을 주지 못하는 까닭이 폐쇄적이고 피상적인 정치의식에 있다고 비판하는 일을 비록 주목적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어쨌든 목적의 일부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노동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사실로부터 한국의 노동운동계에 대해 비판적인 나의 태도를 읽어낸 송병헌의 독해는 정당하다. 아울러 그러한 내 태도를 겨냥한 그의 비판에 대답하자면 그 책에서 노동이 표면에서 거론되지 않은 두 번째, 보다 심각한 이유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노동 정치"라는 문구가 현재 한국 정치의 현실에 대해 그다지 실효적인 정합성을 내가 보기에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차원의 난제로서 해결이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노동 정치",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 등을 말할 때, "노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질문이다.
일례로 한국노총이 한나라당과 연대할 때 거기에 동의한 소속 조합원도 "변혁의 주체"에 속하는가? 민주노동당을 떠나 딴 살림을 차린 노회찬과 그런 진보신당더러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 배짱을 부릴 뿐인 민주노동당 중에서 어느 편이 지금 "노동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아가 노무현 이후 보수의 압도적인 우세 국면에서 민주당을 배제하고 5~8퍼센트의 지분의 순수성에 만족해하는 폐쇄적 결벽증이 송병헌의 "노동 정치"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 것일까? 영국 블레어 노동당의 이라크 파병은 어떠하며, 프랑스에서 조레스나 블룅 등이 자유주의적으로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은 또 어떠한가? 반대로 스탈린, 마오, 김일성은 "노동 정치"의 표본인가? 그들이 아니라면 카스트로 또는 체 게바라에서 모범을 찾아야 하는가?
나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고,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우아한 생활까지도 가능한 수준의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578쪽). 즉, 노동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방향으로 사회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일반적인 목표의 차원에서는 나 역시 노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며 또한 언제든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노동"이라는 이름을 내건 정치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하기만 하면 실제로 그런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에는 동참할 수가 없다. 송병헌이 역설하듯 "정치는 현실"이며, 현실에서 활동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나 또는 송병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기보다는 각자 스스로 중요하다고 보는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송병헌은 "노동 정치"의 중요성을 설파할 때, 실제 활동가의 소원이나 열망을 즉각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차원과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전체적인 구도를 감안하는 매개된 차원을 뒤섞어서 말하고 있다. 매개된 차원에서 노동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해야 하고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 개개인들 또는 노동자 조직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상황의 인식이나 목표의 우선순위는 그야말로 각자의 개별적인 정서나 맥락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노동 정치"의 중요성에 관해 아무리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의미의 본령과 부합하는 "노동 정치"가 되는 것인지에 관해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견해 차이들이 자동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다.
"노동 정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에 관한 견해 차이를 해소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그 책의 도처에서 "진짜 문제"라고 표현한 과제로서, 그것은 지식인들이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살과 뼈가 부딪치는 즉각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투쟁 또는 토론을 통해서 결판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송병헌이 원하는 "노동 정치"가 올바른 전략과 목표를 설정하기에 앞서서, 먼저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는 "노동 정치"를 표방하고 나서는 잡다한 세력들 사이에 소통의 물꼬를 트고, 나아가 공동 행동이라는 실제적 효과를 담보할 수 있는 집단 의사 결정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마녀사냥, 합리주의, 선험주의, 민족주의라는 프레임을 상대화함으로써 피상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내가 진보 진영에게 촉구한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소통과 집단 의사 결정의 메커니즘을 위해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정치"의 올바른 전략을 찾기에 앞서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고 노동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진짜 노동자"라는 미숙한 독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부당 해고나 억압적 조직 문화에 시달리며 당면한 억울함에 치를 떨기에도 여념이 없을 노동자 개개인에게 아량이나 선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남들보다 멀리 넓게 생각하는 의식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송병헌이나 나처럼, 비록 생활인으로서 종사하는 직장에서 어떤 분개할 만한 처사를 즉각적으로 접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지식인으로서 당면한 상황의 혼란한 정서들을 한 단계 지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노동 정치"와 같은 지침을 내놓을 때 내놓더라도 바로 그와 같은 지침이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공통 기획으로서 실효를 가지기 위해 어떤 종류의 소통이 필요할지, 그리고 전략적 집단의사의 결정이 내부에서 권위를 가지기 위해 노선선택의 방법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송병헌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도 나와 크게 견해가 다를 것이다. 이 차이는 내 책 "어디에서도, 진보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 등과 연관 짓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 그리고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가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그의 어법에서 나타난다. 이런 얘기라는 것이 순전히 서로 다른 문구들을 통해 정리하기만 하면 그뿐이고 더 이상 파고들 내용이 없는 것이라면, 나와의 견해 차이를 이런 식으로 정형화하는 송병헌의 인식은 정확하다.
그렇지만 언표가 말이 되는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문구의 속내를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며, 적어도 내 능력이 닿는 한 저런 문구들의 속내를 파고 들면, 나로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이란 허망한 마녀사냥의 일종일 뿐이고,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 사이의 완강한 이분법 역시 진영 내부의 결속을 가식하려는 목적 말고는 현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언제부터 있었는가? 만약 개인의 욕구를 해방하고 기계 문명과 분업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사회 생활의 방식을 자본주의로 정의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근대 이후 계몽 기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의미의 자본주의라면 체제 차원의 대안을 고려해보는 일이 일단 말은 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시작한 일이라면 역사 속에서 아마도 끝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 가능성일 뿐이고 실제로 자본주의를 체제 차원에서 극복한 후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를 정합성을 유지하면서 그려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근대 이후에 이룩된 풍요와 생산을 어느 정도로 유지하면서 개인들의 욕구는 얼마나 규제할 것인가, 나아가 그 규제의 방식은 또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세부적인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결국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곧 "전면적인 체제 개혁"이라는 문구를 내건다고 할지라도 그 실상은 사회 규범 가운데 어떤 것을 수선하고 나머지는 놔두는 형태 이상일 수가 없음을 말해준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에 의한 지배 또는 전횡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자본이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근대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차이라면 부자의 권력 위에 무사들 즉, 깡패들의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는 깡패가 남의 소유물을 뺏어갈 수 없다는 안정감을 개인들에게 심어 줌으로써 창조적 동기가 행동으로 발현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때로 부자가 깡패를 고용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 권력과 깡패의 권력이 시민들의 의식 안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지 못한 곳일수록, 부자가 고용한 깡패의 권력과 부자에게 뇌물을 받은 국가의 권력이 혼잡하게 섞이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황이 대충 잘못이고 뭔가 고쳐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송병헌과 내가 생각이 다를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고쳐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꼬집어 말하라고 하면, 나는 전횡과 폭력이 문제라고 보는 반면에 송병헌은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데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내 책에는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보는 정치의식이 현실을 개선하는 추동력을 조금이라도 가지려면 "지역주의라는 것이 해소된 상태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정합적인 형태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형태적으로 매우 흡사한 장면이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에 의해서도 배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한 상태"라는 것이 무엇일지를 나로서는 그려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자본주의를 수선 대상으로 보면서 접근하는 태도가 진보 진영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내 입장은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써 충분히 밝혀졌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논의는 혹시 송병헌이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라는 표현 뒤에 어떤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그림이 있는지 알려준 다음의 일로 미루고, 마지막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불신과 우려를 살펴보고자 한다.
방금 밝혔듯이 나는 자본주의에서 수선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자본의 독점과 전횡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전횡을 저지르는 주체가 삼성이나 조선일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삼성이나 조선일보가 자행하고 있는 행태들은 자본에 의한 독점과 전횡을 보여주는 현저한 사례에 해당한다. 자, 이를 고친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 삼성 자체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먼저 가려내고, 그 문제에 국한해서 수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법 제도의 개혁이 중요하다. ⓒ프레시안 |
내 생각에 이런 소리는 진부할 정도로 당연해서, 이미 내가 책에서 논의한 데 더해서 추가적으로 거론할 필요는 별로 없다. 단지 이처럼 쟁점이 되는 대목을 세부적으로 가려내서 부분적인 수선을 추구하지 않고, 이를 테면 "삼성 자체의 극복"을 시도한다면 어찌 될지와 대비하기 위해서 거론한 것이다. 송병헌은 어쩌면 "사회민주주의 개혁 정치"라면 이 씨 일가의 경영권을 제한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문제는 "자유주의 개혁 정치"와 "사회민주주의 개혁 정치"의 차이라기보다는, 삼성의 전횡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 해당 정권이 (또는 주권적 인민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는지, 그리고 이 씨 일가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어떤 손상이 초래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주어진 상황의 실태가 어떤 해법을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자유주의를 표방한 정권이라도 보다 충격적인 조치를 시도할 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정권이라도 보다 온건한 처방에 그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예컨대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의 주류를 배제하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주도하는 정권이 언제 등장할 수 있을까? 노회찬은 2002년 선거의 결과에 고무되어 "2007년 대선에서 500만 표, 2008년 총선에서 제1야당"을 노린다고 기염을 토한 바 있었다. 만일 노회찬을 비롯한 "노동 정치" 세력이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과 서로 고정된 파이를 나눠 가지는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유주의 정당의 성장이 곧 사회주의 정당의 입지를 함께 강화한다는 깨달음 아래 접근했더라면, 2007년과 2008년의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장 6월의 지방선거 역시 선거연합을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한나라당의 권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고, 나아가 한나라당 내부에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득세하여 전체적으로 한국 정치의 보수성을 깨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하는 날이 언젠가는 찾아오리라고 나는 믿지만, 이처럼 길고도 빡빡한 줄다리기를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줄기차게 견뎌내야 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자유주의-사회주의 연대가 안 되는 데에 노동 정치 세력의 책임이 더 크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송병헌은 이해하리라고 믿고 하는 소리다. 내 얘기는 자유주의적 발상과 사회주의적 발상을 이론적으로 마냥 가르기만 하는 관점을 탈피하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과 선거에 임하는 전략을 함께 고려하면서 균형을 추구하는 흥정이 현재 국면에서 필수불가결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와 같은 흥정이야말로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갖춰야 할 정치적 역량에 해당하며, 그러한 역량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가 바로 송병헌이 빠져 있는 도식적 이분법인 것이다.
독재 시대에 법치라는 말이 무자비하게 악용된 경험 때문에 진보 진영에서 절차적 권위를 불신하거나 혐오하는 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무법한 깡패 권력이 법치라는 명찰을 멋대로 달고 폭력을 휘두르던 시절에, 거기에 대항하려면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가장 원초적인 생존의 게임을 벌여야 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1987년 이후, 또는 더 좁혀서 1997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사회 변혁 운동은 자체로 자가당착이다. 정치판이 충분히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집권 이외의 방식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군부 독재에서는 벗어난 지금, 기득권에 대한 도전은 직접적인 타격을 추구하는 발가벗은 결투의 방식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를 매개로 한 개선의 방식 말고는 다른 길이 현실적으로 없다.
그러므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그것이 자유주의이든 "노동 정치"든, 절망에 사로잡힌 단말마의 저항이라는 형태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정권을 담당했을 때 인민의 여망을 어떻게 수렴하여 어떤 모양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해서 다음 정권에게까지 물려줄 것인지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할 때, "절차"의 정당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오로지 인민다수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만 성립한다. 만약 주어진 시점에서 "절차"를 한 세력이 독점하고 다른 세력을 탄압하는 구실로 악용한다면, 언젠가는 인민이 주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예비될 뿐이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도심 재개발 문제에서, 쌍용자동차나 금호타이어 문제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서, 미디어 법 문제에서, 세종시나 4대강 정비 문제 등등에서, "노동"을 표방하는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절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몇 백 명, 몇 백만 명, 심지어 (쇠고기 파동 때 그랬듯이) 인구의 90퍼센트가 절망을 실제로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인민이 주권을 발동해야 할 때"라는 보증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 역사에서 4월 혁명, 6월 혁명의 전개 과정 및 그 결과가 이미 보여줬듯이, 인민 다수는 주권 발동을 결단하는 데 대단히 신중하다 못해 인색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정치"라고 하든지 자유주의적 개혁이라고 하든지, 기존의 절차를 불신해야 할 이유가 주관적으로 포착된다면 그 절차를 바로 물리력으로 타격하려들기 전에, 또는 단순히 속상한 김에 닥치는 대로 분풀이나 하려들기 전에, 먼저 절차를 통한 절차의 개선 가능성을 탐색해야 현실적이다.
불의나 전횡에 직접 노출된 개인들이 절망과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는 것까지는 내가 말린다고 말려질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치의 개선을 생각하는 지식인이라면, 아무리 지독한 상황이라도 도발되지 않은 폭력을 먼저 행사한다는 것은 정제되지 못한 악의에 자신을 내맡기는 셈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도 다시 "도발된 폭력"과 "도발되지 않은 폭력"을 구분하는 일이 공동체가 풀어내야 할 진짜 문제에 해당하는 데, 문명사회에서 그 문제의 관리는 궁극적으로 사법부에 위임할 수밖에 없고, 그랬을 때 사법부가 정의의 원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형상화해내는지를 공론이 일상적으로 감시할 수 있으려면, 내가 그 책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사법의 민주화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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