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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법 개혁이 우리를 구원할까?"

[기고] 박동천의 반박에 답한다

'작은 일치, 큰 차이'?

박동천의 책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펴냄)으로 인해 쓰게 되는 두 번째 글이다. 왜냐하면 박동천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인 나의 첫 글 "노동 없는 자유주의 …한국 사회 못바꾼다"에 대한 상세한 반론("'삼성 타격'보다 '서초동 개혁'이 중요하다")을 게재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노동 없는 자유주의…한국 사회 못 바꾼다", "'삼성 타격'보다 '서초동 개혁'이 중요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자꾸 '차이'와 '일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첫 번째 글을 쓰기 위해 박동천의 방대한 책을 읽고 났을 때, 든 생각이 두 사람 사이에 '큰 일치, 작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즉 진보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들에 대한 공감, 인간다운 사회를 향한 지향점의 공통성, 그리고 그 사회로 다가가기 위한 '이행 전략'에 대한 고민 등 두 사람 사이에 큰 일치가 느껴졌던 것이다. 반면 차이는 '노동 정치'에 대한 강조의 차이, 그리고 사회적 자유주의의 한계라 생각된 것에 대한 나의 비판이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진보를 위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글을 쓰면서는, '작은 일치, 큰 차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더 많이 확인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실 나의 첫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는 '손잡을 여지가 많은' 것이다. 이점에서는 나와 저자는 같은 의견으로 생각한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유주의와 그 한 조류로서 사회적 자유주의는 노동 정치를 대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차이가 있다는 점, 따라서 만일 노동 정치의 관점에서 진보를 추구한다면, 사회적 자유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도, 사회민주주의적 구상에도 가능성과 여지를 열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나의 첫 글에서 충분히 나의 입장과 취지를 전달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저자는 나의 글 속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사이에 내가 긋고자 하는 "완강한 이분법", "도식적 이분법"을 읽어내고 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보는 나의 생각이 "완강한" 이분법인지에 대해 논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의 글에 대한 저자의 독해와, 저자의 반론을 통하여,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겉으로 글로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어쩌면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차이들'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정리할 의무를 느끼는 것이다.

그 '차이들'이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노동 정치에 대한 생각의 차이, 자본주의 극복의 목표와 경로에 대한 관점의 차이 등으로서, 결국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차이이다. 먼저 '노동 정치'로부터 출발해보자.

구조와 제도가 문제

우선 저자는 "(내가) 한국 정치의 진보를 위해 누구나 노동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을 상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진보를 위한 '노동 정치'의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나의 관점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내가 '노동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맞다.

나는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로부터 사회경제적-실질적 민주주의로 민주주의가 심화되려면, 즉 노동계급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더 평등한 사회경제적 권리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되려면(바로 이것이 진보이다), 노동 정치가 형성·진전되어서 사회 진보를 견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정치 세력화하고 사회 세력화(여기에 '문화 세력화'를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 정치'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면 저자가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비판한 지점은 어디인가. 저자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노동계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 정치의 행위자(활동가) 차원이다.

우선 저자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내가 노동계급이 변혁의 주체라고 가정하는 것에 대하여, 이는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선험적 가정이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노동'을 말할 때 그것은 균질적이고 단일한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고,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군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집합적으로(진보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차원의 난제로서 해결이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 등을 말할 때, '노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질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실로 '노동'의 범주에는 균일한 대상만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다. 즉 '노동' 그 안에는, 산업 노동자 뿐만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 노동자, 또한 정규직 노동자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미조직 다수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개별 노동자들의 분산되고 다양한 의식이 필연적이다. 즉 저자의 지적처럼,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견해 차이들이 자동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으며", 때문에 "'노동 정치'라는 문구가 현재 한국의 현실에 대하여 그다지 실효적인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보는 견해는 정당하다.

그러나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판단도,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다르게 보아야 할지 모른다. 즉 한국의 노동운동은 실상 오랫동안의 단절과 억압이라는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이후 1987~88년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시기까지의 근 40여 년 동안 노동운동은 금기의 영역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겨우 20여 년의 성년을 갓 넘었을 뿐이며, 여전히 노동 탄압과 비우호적인 여론 등 제약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와 전망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주의적 관점이 반드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노동계급 및 노동운동의 현재가 지닌 조건과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운동의 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현재 상태를 가져 온 탄압과 망각을 강요당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복원하고 알리고 교육하는 일이다. <한국 전쟁의 기원>을 쓴 커밍스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이라는 '골치 아픈' 낱말을 네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적 또는 법적 진실, 개인적 또는 서술적 진실, 사회적 또는 "대화"의 진실, 그리고 치유적 또는 회복적 진실이다. 진실과 정의는 묻힌 과거의 청산과 기억,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한국 사회에서 여성,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 취약 계층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프레시안
둘째로, 저자는 진보 정치의 행위자(활동가) 차원에서 '노동 정치'를 비판한다. 즉 "한국 사회 진보 진영의 정치의식을 구성하는 매우 많은 요소들이 속수무책으로 보수적이며 편협하고, 이들의 정치의식이 폐쇄적이고 피상적이고 미숙한 독선"에 빠져 있어서, 오히려 대중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해악을 준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현재의 진보 정치 세력과 정파들이 추구하는 NL, PD 등의 분산적 이념의 스펙트럼, 현장의 요구와 결합하지 못한 관념적이고 과격한 구호와 이념들, 구체적 대안없이 주장되는 신자유주의 반대 등 구호 정치,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공통의 효과적인 기획을 도출하지 못하는 진보 진영의 무능력 등의 상황과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들이 미숙한 독선과 편협, 견해 차이에서 벗어나서, 진보를 위한 의미 있고 실효적인 "공통기획"을 안출하고 이에 공감할 수 있도록, 서로 "소통"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저자의 현실인식과 우려에 대하여 공감한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불만이다. 진보 활동가들의 의식과 능력, 의지와 열의, 규모와 연대 정도 등은 노동 정치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생각과 이념이 통일되지 못하고 독단적이고 편협하다면, 이는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과 성장에 해악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독단적 이념을 깨고 서로 소통하고 공통 의제를 개발해야 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타당하고 정당하다. 즉 활동가 사이의 소통이 필요하고, 민주주의의 진전과 진보를 위한 새로운 의제를 대중에게 제시하고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노동대중 사이에 저항담론 말하자면 대항헤게모니의 형성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 정치의 형성을 위해서 더욱 우선돼야 할 것은, 활동가들 사이의 소통이 아니다. 더욱 우선돼야 할 과제는, 현장의 노동운동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해온 구조와 제도를 타파하고 개혁하는 문제이다. 왜 그러한가. 활동가들은 노동대중과 단절되거나 고립하여 존재할 수 없다. 진보 정치를 위하여 활동하는 활동가들은 대중에 기반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 정치의 형성을 위해서는 대중이 노동하고 생활하고 투쟁하는 현장의 조건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중은 일상의 생활 환경과 작업 공간에서 매일매일 겪는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를 교육하고 '계급 의식'과 연대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정치의 형성과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대중의 일상투쟁을 제약하고 탄압하는 구조와 조건, 제도의 타파가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탄압해온 것은 법과 제도, 그리고 공권력이었다. 이것이 일차적 문제이다. 한국을 제외한다면 노동 쟁의를 형사 사건으로 처벌하는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노동 쟁의 사건은 통상 검찰 공안부에 배당되어 기소된다. 기소죄명은 업무 방해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죄, 집시법 위반죄 등이다. 노동 쟁 의사건이 검찰 공안부에 배당된다는 것은, 노동조합운동마저 기본권이 아니라,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 노동 쟁의 사건에는 정부의 각 부처와 경찰, 사측 인사가 참여하는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열린다. 그리고 사측의 요청으로 수천 명의 경찰 병력이 투입되고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진다. 때로 사측이 고용한 용역깡패도 동원된다. 노동 현장은 전쟁터로 변한다. 노동쟁의는 패배한다. 패배를 전후하여, 해고 노동자나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고공 농성 중인 노조원의 투신이나 사망 소식이 들린다. 노조원의 사망 소식은 거의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주요 강성 노조에 대한 일상적 감시와 도청, 회유, 협박이 지속된다. 이것이 민주화된 오늘 한국의 노동 탄압의 현실이다.

노동에 대한 언급이 항상 특정 노조나 정파, 활동가와 관련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정파와 활동가들 사이의 소통의 문제 이전에, 작금의 열악해지고 있는 노동 현실과 노동 탄압의 현실이 더욱 큰 문제인 것이다. 해고 무방비 노출, 최장시간 노동,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과 희생,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 상황과 실업의 증가와 같은 절박한 노동 현실과 초보적 노조운동마저 탄압하는 법과 제도, 그리고 이 속에서 신음하고 절규하고 분신하는 노동자를 말하지 않고 진보며 민주화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만이다. 곧 소통 이전에, 구조와 제도가 문제이다. 그것이 우선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

이제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문제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나의 문제제기 방식이 너무 단순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박동천은 지금의 이러한 단순한 물음에 대해서도, 내가 "완강한 이분법"을 고수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문제제기를 한 것은 내가 "완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이분법'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의 문제는,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물음과 같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자유주의이며,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계승자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먼저 박동천의 문제제기의 정당성 여부부터 살펴보자. 박동천이 나에 대해 비판한 것은, 내가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를 '완강하고 도식적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당하다. 나의 '완강성'과 '도식성'의 여부와 정도는 차지하고, 내가 두 구상을 구분하고 차이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와 구분되며 이를 넘어서는 '사회민주주의' 구상을 제시했고, 암묵적으로, 노동 정치의 성장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적 구상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따라서 박동천이 나의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위 두 구상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폄하했다는 취지였다면, 그의 비판과 지적이 정당하다. 사실 위 두 구상은 내용적으로도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며, 또한 실천적으로도 서로 결합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나는 이전의 글에서, 두 구상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었기 때문에, 두 구상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박동천의 문제제기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즉 박동천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과 '노동 정치'를 강조하고, '사회민주주의' 구상을 옹호했던 나의 입장에 터하여, 내가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독해했다고 보는 것 같고, 그렇게 독해된 사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박동천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은 허망한 마녀 사냥의 일종이고,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 사이의 완강한 이분법 역시 진영 내부의 결속을 가식하려는 목적 말고는 현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 한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박동천은 이제,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소통을 주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위와 같이 독해된) 사회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사실상 사회적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를 유효한 사상으로 절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과 '노동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면, 박동천이 그러한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 문맥상, 그리고 그의 다른 글 여러 곳을 통해볼 때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박동천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소통 가능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때 박동천이 소통 가능성을 열어놓은 사회주의는 위와 같이 독해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극복'과 무관한 개선과 개혁을 추구하는, 따라서 자유주의와 결합이 가능한 형태의 사회주의일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결국 개념 문제로 귀결된다. 즉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개념 규정이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개념 규정을 해야만,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차이가 있는지,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을 지향한 구상인가 아니면(혹은 동시에) 자유주의에 친화적인 구상인가, 이 두 구상은 소통이 가능한지 등의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간단히 개념 규정부터 출발하자.

사회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나온 사상적 조류이다. '급진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 Neoliberalism이 아니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린, 홉하우스, 홉슨, 베버리지, 케인스 등에 의해 대변된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달리, 시장이 항상 중립적인 것은 아니며, 사회의 일부 집단에게 빈번하게 구조적 불이익을 낳는 경향이 있다는 판단 아래, 시장에 대한 규제와 국가 개입을 옹호했다. 이 사회적 자유주의는 전후 서구의 복지자본주의의 이론적 선구라 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의회주의적 개혁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 방법으로 사회주의적 상태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노력이자 이념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붕괴론, 계급투쟁론, 프롤레타리아독재론, 집단적 사회화론 등과 같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명제를 기각하고, 소련식 정치·경제 체제를 배격하면서, 자본주의경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주의 노선을 옹호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각국의 사회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등 정당들에서, 다양한 역사적·사상적 배경 속에서 수용되어, 동유럽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서유럽 사회주의 모델로 정착되었다. 사회민주주의는 1951년 프랑크푸르트선언에서는 '민주사회주의'로 표현되기도 했다.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많은 부분 유사하거나 공통적인 면을 갖고 있다. 사회적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는 평등과 함께 자유의 가치를 강조해왔다. 특히 양차 대전의 경험을 거치면서, 파시즘과 소련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베른슈타인이 언급했듯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계승자라 할 만하다.

두 이념 조류는 혁명적 변혁이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다. 경제에 대한 정책 개입을 옹호하는 성격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사회민주주의도 평화적 이행을 강조해왔다. 또한 두 사상 모두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기본적으로 인정한 데서 출발한다. 복지 정책이나 국가 개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나 폐해를 완화하거나 개혁하고자 했다. 특히 서구에서 구체적인 경제 정책과 복지 정책 차원에서 두 조류는 상당히 '수렴'하는 양상을 보여 왔는데, 이를 매개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가 케인스주의였다. 케인스주의는 1930년대 스웨덴, 1950년대 영국 등과 같이 각국에 수용되어, 복지국가 모델의 이론적 토대로 기능했다.

이렇듯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여러 면에서 수렴하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두 사상은 차이 또한 적지 않다.

첫째, 두 사상은 사상적 출발점이 다르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모태에서 태어났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계승하고 자유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측면이 크지만,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논쟁 및 사회주의 이행 전략을 중심으로 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생성되었다.

둘째,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지식인의 계몽적 기획이자 사회 참여를 배경으로 태어난 측면이 컸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운동의 모태에서 태어났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운동의 이념으로 불러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셋째, 자본주의 극복 및 미래 구상에서 다르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처방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처방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대안적 구상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나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이다. 물론 그것은 혁명적 공산주의 구상에서처럼 소유권이 집단적 소유권으로 바뀌는 식의 그러한 단절과 전환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에서 즉각적으로 그러한 상태의 실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는 운동이며 운동의 목표를 완전히 폐기한 적은 없다. 그 궁극적 지향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곧 사회주의이다. 베른슈타인은 "사회민주주의는 연대성을 의미하는 사회주의적 상태를 점진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 당시 사회민주주의 개념 속에는 사회주의를 향한 지향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당시 사회민주주의 개념 속에는 자본주의 내에서 점진적으로 평화적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실천 운동이라는 핵심적 요소가 담겨있었다. 이 개념이 본래적인 것이고 중심적인 요소였다. 연대성을 향한 운동, 이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적 정의는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 1990년 베를린 강령에도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최종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운동이 모든 것이다"라고 썼다. 베른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붕괴, 공산주의의 도래 등 막연한 급진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보다 중요했던 것은 '한걸음 한걸음씩'의 끊임없는 실천이었다. 베른슈타인에게 자본주의 내에서 진보정당의 지속적인 실천은 결코 시시포스의 노동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은 자본주의의 개선과 '사회주의적 미래'를 향해 우리를 인도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적 방향을 상실한 '개량주의 없는 개량'이 아니라, 운동의 가능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운동으로서의 개량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와 운동을 추구하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 이념의 종언이나 무익성을 주장하는 견해는,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진보와 개혁을 주제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론적·정책적 논쟁의 의미와 지평을 보지 못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는 특정 시점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이념이나 사상의 영향과 위치를 절대시하는 현실추수적인 관점일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 세력의 영원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듯이, 사회적 자유주의 역시 개혁세력의 유일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가 '역사가 종말'을 선언한 것이 틀렸듯이, 이데올로기의 종언도 실제 현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진보와 운동을 추구하는 이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도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다. 노동 정치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자 사상적 지향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노동정치를 추구하는 세력들의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자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서로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이념이며,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두 이념은 사회적 기반과 지향점 등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이념 사이의 연대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정하거나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 연대란 차이를 통한 연대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노동 정치는 시민적 연대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 개혁만으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개혁 전략에 대한 물음이다. 박동천은 일관되게 '사법 제도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다. 그의 저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대목이 아닌가 한다. 내가 이해한 박동천의 '개혁 전략'은 이러하다. 즉 영미식 배심제도의 방향으로 '개혁된 사법제도'를 통해, 시민들의 상식에 의해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고, 그 판결의 과정과 이유들, 판결 결과가 공론화되고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을 통하여, 계몽적 인식이 확산되고 개혁과 진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사회적 합의가 확대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보와 개혁적 실천이 이루어지고, 이런 것이 쌓이면서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고,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우아한 생활까지도 가능한 수준의 사회"(578쪽)가 도달된다는, 그러한 구상인 것이다.

이 개혁 전략의 추진 주체는 누구일까. 박동천의 글에서 이를 분명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 다만 개혁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려는 '지성적 시민들'이 아닌가 한다. 이들이 입법청원을 할 수도 있고, 글을 기고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주어진 절차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문화적 공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개혁 전략은 소통을 통한 '계몽적 시민됨'에 기초한 '문화 혁명' 혹은 '담론 변화'와 같은 정신적 측면과, 법제도와 민주주의 절차를 활용한 상부구조적 변화를 중심적 수단으로 상정하는 듯하다.

▲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박동천 지음, 모티브북 펴냄). 이 책에서 박동천은 '사법 제도의 개혁'을 개혁 전략으로 제안한다. ⓒ프레시안
한편 이 구상에서 대중의 거리 시위나 집단 시위와 같은 "직접적인 타격을 추구하는 발가벗은 결투"의 방식은 철저히 배제된다. 박동천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시기(이를 민주주의의 '공고화'라 불러도 될 듯하다)에, 이러한 직접적 방식이나 대중의 폭력적 행동의 표출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성도 없고 부질없는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하여 역시 중심은 절차와 공론장에서의 소통에 두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개혁의 범위와 내용에 대해, 박동천은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전제는 '사법 제도의 개혁'이다.

"내 주장은 예컨대 삼성 자체를 타격하는 게 아니라 삼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먼저 가려내고, 그 문제에 국한해서 수선한다는 것이다. 탈세, 불공정 거래, 분식회계, 경쟁 업체나 하청 업체들에 대한 부당한 압력, 노동조합 탄압 등등에 대해 엄격하게 시행하고, 안 정해져 있다면 새로 법을 제정해서, 어긴 행위에 대해 정해진 만큼 벌칙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위 개혁 내용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위 개혁의 내용, 사법 제도의 개혁가능성, 개혁의 효과 등에 대해서 공감할 수가 없다.

첫째, 개혁의 내용이다. 위에 열거된 사례만으로 본다면, 개혁의 내용은 지극히 실망스럽다. 오늘도 부당 노동 행위와 대규모 정리 해고가 여전히 자행되고, 공권력에 의한 파업 진압과 시위 탄압이 지속되는 등 자유권과 노동기본권이 탄압받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계층 양극화가 심화되는 등 생존권적 기본권이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위와 같은 개혁들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단지 자본주의를 조금쯤 '정상화'시키는 조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자리의 중심 논제를 아니지만, 삼성 등 재벌 체제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재벌의 막대한 자산과 이익은 재벌 소유주와 그 족벌의 것일 수 없다. 노동자와 국민의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청소부의 월임금이 60여만 원이고, 학습지 교사가 하루 12시간을 일하여 버는 보수가 월100만 원이 안 되는 반면, 얼마 전 언론 보도에서와 같이 상장기업 임원 연봉이 수십억 원에서 백억 원을 넘는 현실은 부정의한 것이며,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납득하거나 용인하기에 매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큰 문제제기 없이 수십 년 지속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둘째, 사법 제도 개혁의 현실성이다. 과연 영미식 배심제도로 사법 제도를 전면 개혁하는 것이 가능할까. 재판의 판단을 시민에게 개방하는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판사노조와 같은 것이 생긴다면 혹시 모를까, 현재의 조건에서는 판사들이 자발적으로 기득권에 반하는 개혁을 할 가능성이 없다면, 과연 개혁의 동력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셋째, 개혁 추진의 유효성이다. 사법 제도가 개혁된다고 가정해도, 과연 개혁된 사법 제도는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다수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즉 보다 정의로운 판결을 내라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학연·지연, 정치 권력과의 유대, 기업과의 유착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득권 집단이자 권력 기관인 법원이 전향적인 자기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언론과 문화가 보수적인 지배담론을 재생산하는 상황에서, 과연 배심원들은 사회적 약자의 정의를 위한 판단을 모아낼 수 있을까. 배심원제의 전면 도입만으로, 기존 법원의 정치적·이념적 보수성과 편향성이 개혁될 수 있을까. 곧 배심제도의 도입만으로 법원이 권력과 기득권세력, 지배문화로부터 중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법원을 통한 사회 정의의 수호와 확산이라는 가정은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넷째, 민주주의의 위축이다. 사법부가 사회 정의의 새로운 수호자라는 것을 보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과 시민사회, 정부의 중요한 결정을 사법부의 결정에 집중하게 된다면, 이는 대의민주주의와 권력분립의 원리에도 어긋나며, 민주주의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재판관은 국민이 선출한 대의기관이 아닌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정치적·사회적 토론과 다양한 방식의 정치적 참여와 의견의 표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정치 체제이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결정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민주적 선택의 범위와 민주적 참여의 활력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진보를 향한 동력은 사법 개혁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유효하지도 않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넓은 의미의 '정치 공간'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때 '정치'란 국가와 헤게모니 영역이 될 것이다. '정치'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계층 및 집단 간의 역관계, 지배 헤게모니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과 확대, 정치 세력들 간의 연합과 동맹의 양상 등이다. 따라서 '정치'가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형성해가기 위해서는, 결국 노동 정치의 성장, 그리고 진보 담론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들 사이의 동맹의 형성과 지속, 진보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증대가 중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나는 다시금 처음의 생각으로 되돌아온다. 즉 '여전히 희망은 노동 정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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