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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동 없는 자유주의…한국 사회 못 바꾼다"

[화제의 책] 박동천 교수에게 묻는다

'위기'의 현상들, 그리고 '진보'를 향한 헌사

용산 참사나 쌍용자동차 구조 조정 사태에서와 같이, 생존권을 요구하던 철거민들이 강제 진압당하는 현실, 아무런 사회 안전망 없이 노동자의 해고가 이루어지는 현실이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심지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시간을 역행하듯, 더욱 폭력적인 민중 탄압의 형태로, 억압과 강제의 반복과 퇴행의 모습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민주화 운동사적 시각에서 본다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공고화'를 거쳐 심화의 길로 진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쟁의 새로운 화두로 제기된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한 '87년 체제'의 성과물마저 위협받고 정치사회적 상황이 다시 권위주의적 통치 시기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기업과 기득권층의 이해만을 대변하면서, 대중의 의사 표현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총수 독재적 기업국가'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즉 1987년 이후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과거 독재적-권위주의적 통치의 유산들을 일정하게 감소시켰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성립됐지만, 이어 국민들은 민주적 정치 세력 대신에,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과거 권위주의의 망령을 되살려내는 현 정부를 선택했다.

현 정부에서, 미네르바와 촛불 집회에 대한 탄압. 집회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억압, 방송 장악 기도 등 민주적 법치국가로부터의 퇴행이 빚어졌고, 용산 참사가 상징하는 바 반민주적 노동 억압과 서민, 노동대중의 생존권 외면, 자율형 사립고의 확대, 삼성 총수의 사면 등 '신자유주의적 우경화'가 가속화되었다. 결과는 권위주의적 통치 양식의 재등장, 불평등의 악화, 기득권층의 강화, 노동계급에 대한 탄압의 증가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우경적 보수화의 위기를 타개하고 극복할 진보의 희망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노조 조직률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노동자 구성의 분리와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어 노동자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또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비정규직의 증대는 사회적 통합과 연대를 가로막고 이들을 개별화시킨다. 노동자·서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할 진보 정치 세력의 지지율은 5퍼센트 내외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 진보 정치 세력은 분열되어 있다.

한편, 이념·문화적으로 볼 때, 국민들로 하여금 다시 민주주의적 정부를 선택하게 하는 뚜렷한 통합적 의제도 보이지 않는다. 또 진보 정치 세력 자체도 통합적인 이념적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즉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주체사상 등의 요소들이 혼합, 착종되어 있고, 아직 어느 하나가 이념적 헤게모니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사실이라면, 이는 현재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혹 절망케 할 수도 있을 미래의 위기이기도 하다.

▲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박동천 지음, 모티브북 펴냄). ⓒ프레시안
박동천의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이 쓰인(혹은 써져야만 했던) 집필의 이유와 배경은 바로 이러한 암울한 현실 진단과 미래에 대한 우울하고 걱정스런 전망이었다고 보인다. <한겨레>(2010년 1월 27일자)와의 인터뷰에서, 박동천은 집필 이유를 놓고, "한국 정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정부 말기 나는 일본 같은 체제가 결국 아시아의 정치 모델로 고착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단 생존에 매몰돼 공장 부품처럼 일하는 개인들로 지탱되는 사회, 도덕이나 역사에 관한 상상력은 제한되고 손재주 또는 생산력으로 그럭저럭 버티는 사회 말이죠. 이는 민중의 요구가 임계점 가까이 가면 보수파가 선심 쓰듯 수용해 장기 집권을 이어가는 엘리트 순환 체제입니다. 이런 흐름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우경적 보수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절박한 위기 상황을 앞에 두고, 새로운 진보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고투한, 진보를 향한 헌사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앞에 두고, 새로운 진보 정치의 가능성과 희망을, 기존에 참다운 민주주의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던 이념적 장벽들을 타파함으로써 발견하고자 한다.

그 장벽이란, 민주적인 건강한 공론 형성을 가로막는 기존의 집단적 편견과 무지, 독단과 위선 같은 지배 담론들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민주적 공론 형성을 가로막는 지배 담론을 비판하는 데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진보 정치의 희망을 모색하려면 발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진보'를 향한 도정-집단적 편견의 파괴와 시민의식 고양의 중요성

저자는 '진보'를 일반적인 용어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진보는 "사회와 미래의 개선가능성을 추구하는 입장"이나 "사회 구조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는 '진보'의 내용은 곧 민주주의로의 변화 과정, 또는 민주화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위기의 극복과 개선은 민주화로의 전진 과정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건강한 공론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 이를 통한 진실과 정의에 대한 접근과 합의, 그리고 사회 진보의 과정이다. 왜 그러한가. 흔히 민주주의를 '민중의 지배'라고 하지만, '민중의 지배'는 선험적이거나 정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지배'는 매번 특정한 주요 사안에 대한 '민중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민중의 결정'은 민주적 절차와 참여를 통해 공론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치에 대한 관심, 분별 있고 합리적인 판단과 상식, 그리고 상대방과 이견이 있을 때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고, 때로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여 더 큰 사회적 합의 과정을 형성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곧 참여와 의사소통을 통한 공론 형성의 과정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국민)들이 건강한 상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의견을 표현하고, 상호 토론하는 과정에서 지적으로 교육되고, 타협의 지점들을 발견·확대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절대로 유지될 수 없는 제도인 것이다. 곧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 바탕이다.

'민주주의와 일반 시민의 계몽적 지성의 양립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고래로 많은 사상가들을 괴롭혀 온 딜레마였다. 즉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퇴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플라톤 이래 오래된 고민의 지점이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민의 상식의 존재, 투표나 토론 등과 같은 민주적 참여 과정을 통한 지성의 계발 가능성을 신뢰한 사상가는 밀이었다. 밀은 보통선거권의 진정한 옹호자였으며,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육체 노동자의 참정권 행사를 통한 정신적 성장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정치적 참여는 이들을 '사적 인간'에서 '공적 인간'으로 변혁시킬 것이다.

그러나 밀은 이렇듯 보통선거권을 지지하되, 그것이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토크빌이 말한 '다수의 폭정'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수자계급에 대해서 복수투표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고안하고 권장했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고 보다 높은 진실과 정의, 공동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의 '성찰적 지성인됨'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들의 '깨어있는 시민됨'을 수반하고 기대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원활한 운영과 작동을 위해서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 공론 형성 과정의 제도적 보장이 매우 중요한 것이며,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고 기능하거나, 무지와 독단, 선입견에 의해 주조된 국가 및 정치 세력의 지배적 담론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진실을 알리는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저자가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기존의 허구적 담론을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 세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진보 세력에 속하는 사람들 다수마저도 폐쇄적이고 경직적이며 가식적인 사고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한국 정치의 진보를 위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사유방식이 바뀌어야 할 부분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러한 지적 고정 관념('프레임')을 '마녀 사냥', '권력 숭배', '선견지명', '집단 생존'이라는 네 가지 프레임으로 구분하면서, 집단적인 허구의식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행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보 세력의 독단론적 담론이나 관점과, 보수 세력의 그것을 똑같은 정도로 비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보수 세력의 허구적 담론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준엄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바, 여기에서도 '진보'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애정이 확인된다 할 것이다.

진보는 주로 '독선'과 '독단', '교조', '권력 숭배', '이분법 흑백 논리', '무지', '분열' 등을 이유로 비판된다. 사회주의 역사에서 카우츠키주의자들, 레닌주의자들, 스탈린주의자들 등 '정통파'를 자처한 세력이 반대 세력을 '수정주의자', '변절자', '배신자'로 낙인찍고 제명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암살까지 자행한 '독단과 교조, 야만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독단론의 지배와 흑백 논리는, 현실과 역사 발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가로막았으며, 사회주의 세력의 분열과, 나아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 온 주요한 지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지적 태도의 기원을 "세밀한 차이와 이치를 귀찮게 생각하는 지적 나태-마녀 사냥 프레임"(76쪽) 등으로 규정한다.

반면, 보수는 위의 지적 특성에 더해서, '거짓', '위선', '은폐', '권력 숭배' 등의 측면이 더욱 강조되면서 비판되고 있다. 박종철의 물 고문 치사 사건에 대한 지배 세력의 은폐와 거짓말, 광주 학살과 정치 비자금에 대한 전두환 등 5공 세력의 은폐와 위선, 에버랜드 주식의 편법 증여 의혹에 대한 이건희와 삼성 측의 후안무치적 태도를 상기해보라. 보수 세력의 허구적 담론과 거짓말은, 자주 국가 폭력과 야만을 은폐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고, 시민들의 비판적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혼란시켜 왔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보수 세력의 '거짓말 공화국'에 대한 비판, "이문열식 언어 퇴행"에 대한 비판 등, 보수의 허구적 담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준엄하고 신랄하며 명쾌하다. 또한 저자는 진실을 가리는 정치적 수사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실용' 역시 실용적인 구호가 아니라 이념적인 구호,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구호임을 간파하는 시민은 별로 없다. 민생, 경제, 실용 등의 구호 역시 보수 이데올로기임을 일반 민중에게 일상적으로 알릴 길이 없다. 민생이라는 이름 아래 재개발 지역에서 세입자들이 죽어나가는 광경, 실용이라는 이름 이래 반대의 권리가 일축당하는 장면, 경제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는 연극같은 참상이 자행되더라도, 보통 시민은 대부분 뭐가 잘못인 줄도 느끼지 못하는 마비증상에 걸리는 것이다"

이러한 허구적 관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시민들의 진보적 의식의 형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일찍이 '수정 사회주의'의 이론적 선구인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사회주의를 독단에 대해 '비판적'이고, 현실의 변화에 대해 '열려 있는' '이론적 비편견'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이론적 태도는, 저자가 이 책에서 기존의 허구적 관념들에 대한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할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기여는 바로 이러한 비판적 인식의 중요성, 그리고 이것이 민주적 공론 형성에 갖는 의미를 강조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의 지향점과 한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은, 민주적 공론 형성의 과정이다. 그러나 '민주적 공론 형성'은 사회적 합의 과정을 이루어가는 절차적 측면일 뿐, 그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즉 '민주적 공론 형성'을 통하여 어떤 사회(체제)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인가라는, 미래의 목표와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보'의 개념과 지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지금부터 살펴 볼 주제이다.

우선 저자가 보는 '진보'란 무엇인가. 저자는 '진보'와 '보수'를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또는 극복)의 문제와 연결시켜 규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진보'의 개념을 대체로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보'는 "사회와 미래의 개선 가능성을 추구하는 입장"이나 "사회 구조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는, 일반적 지향의 차원에서 규정된다.

둘째로, 정치적 성향으로서 규정된다. 즉 보수와 진보를 나눌 때는 기득권을 수호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추구하느냐는 차이가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지성적·심리적·문화적 차원"에서 규정된다. 즉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폐쇄적인지 아니면 개방적인지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연하고 타협적이고 분별 있는 태도"를 진보라고 규정하면서, "기득권 수호에서 사회적 약자의 보호 쪽으로 이동하는 진행만이 아니라, 배타성에서 개방성으로 이동하는 진행도 진보의 중요한 의미"라고 하면서, (전쟁이 아니라 설득과 공론을 통한 합의에서와 같이) 분별 있고 개방적인 태도가 내용상에서도 진보를 낳는다는 중요한 측면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위에서 규정된 '진보' 개념 어디에서도, '진보'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 등과 연관 짓지 않는다. 저자가 '진보'의 개념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와 연관 짓지 않는 것은, 저자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하여 의문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자체를 배격하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무망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반대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체제·제도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저자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두 가지를 제시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대체로 '절차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일치하는 개념으로 보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로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사회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의, 반대, 이견의 권리를 사회 질서의 공정성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인정한다. 이는 소청, 청원, 상소, 소원 등등 항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소청이나 상소제도로도 분출될 수 없는 항의나 반대를 위해서 훨씬 포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민주주의의 작동을 위하여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한다. 표현의 자유가 가능한 조건에서만, 이를 통하여 공론을 통한 호소가 가능해지며, 이는 진보를 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저자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의사소통을 통한 합리적 공론 형성이 있게 되면, 갈등의 평화적 해결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둘째로, '사회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유)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소외계층의 복지를 결합한 제도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빈곤으로 말미암아 생활 환경에 제약이 가해짐으로써 기회 자체가 불평등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적 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이 정치 투쟁을 통해 자본의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인정하고, 누진세와 공공교육 및 공공의료 등 일련의 사회적 입법을 통해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요컨대, 저자가 지향하는 진보의 지향점은, '절차적 민주주의+사회적 자유주의'로서, 정부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정책이 시행되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자유민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 체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역사적 사례는 영국의 그린, 홉하우스, 케인스, 베버리지 등과 같은 '개혁 자유주의'의 지성적·실천적 영향과 그로 인한 변화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 체제에서, 장점으로 옹호되고 있는 것은, 이 체제가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즉 "표현의 자유를 공정한 게임의 규칙으로서 바탕에 확실하게 깐 위에서 절차와 제도를 통한 갈등의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이상처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 것인가. 늘 토론과 절차에 의해 불가능한 의제와 상황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물론 '직접적인 정치 활동'이나 '항의 시위' 등도 언급하지만 방점은 어디까지나 위임되고 승인된 절차에 따른 소통과 표현의 자유, 공론 형성에 두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이라든지, 전쟁 반대 집회라든지, 갈등의 평화적 해결의 범위를 넘어 선 이슈나 활동들이 있을 것이다.

혹 이러한 '직접 행동'이 많지 않다고 해도, 이러한 행동들을 예외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러한 파업이나 시위가 있게 된 것은, 이러한 행동들이 '절차와 제도' 내에서 평화적으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자본의 근본적인 이해를 침해한다고 간주될 수도 있을 '공동 결정권'이나 '사회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경우, 이 체제는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파업이나 시위도 늘 평화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

실제로 서유럽의 경우만을 보더라도,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의 한계를 넘어 선 '사회주의적' 요구들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러한 요구가 제기되면서, 체제가 감당할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선거와 투표를 통해서 (때로 시위와 폭동을 통해서), 자유주의적 정치 세력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세력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 현실이었다. 스웨덴, 독일, 그리고 영국에서 이루어졌던, 기민당→사민당, 보수당→노동당 등으로의 정권 교체가 그러한 사례였던 것이다.

사민당이 집권하여,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를 추진하게 되면, 그 때의 정치 제도는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는 같은 것일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복지국가 및 자본주의 개혁에 대한 이론적 전망은, 자유주의적 개혁 정당의 그것을 넘어서 있다.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정치는 역사적으로 노동운동과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주의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출발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추구하는 복지 정책의 범위와 노동 정책의 양상은 자유주의 개혁 정당의 그것과 수렴되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었다.

현실 정치의 갈등을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의 모델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있다거나, 평화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이제까지 전개되어 온 현실의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정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무망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면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개혁 정당은, 역사적 출발점과 지지 세력, 복지 정책의 범위와 가치의 우선순위에서 엄연히 구별되는 정치 세력으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진보와 개혁의 전망을 자유주의적 전망에 한정하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현실과의 적합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희망은 '노동 정치'다

마지막으로, '진보'의 지향점을 자유주의적 개혁 정치로 설정하든, 아니면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치로 설정하든 여전히 '누가 진보를 이끄는가'라는 추진 주체에 관한 물음이 남아 있다. 저자는 진보적 개혁의 추진 주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시사하는 것 같다.

하나는 기존의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을 포괄하는 일종의 '민주 대연합'을 추구하는 관점이다. "현실의 정치공학으로서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이동한 최소 300만 명의 부동층이 대부분 중도 성향적 유권자들이다. 차이 속의 공존 가능성을 찾아내야 모든 종류의 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에 대한 기대이다. 저자는 "기득권층 가운데 온화한 성품을 가진 부류가 보수 세력을 주도하고, 진보 쪽에서도 보수 세력에 대해 아량을 가진 사람들이 상황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면, 저자는 진보적 개혁을 위한 노동자 계급이나 노동운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대단히 의외이다. 그러나 스웨덴, 영국, 독일 등 많은 사례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동자 계급이 가진 권력 자원과 그것의 정치적 동원이 민주화 진전, 복지국가로의 이행에 핵심적 변수였던 것이다. 즉 노동자 계급의 형성과 분화, 새로운 계층의 대두가 여하히 집단적인 계급적 정체성을 획득하느냐와 관련된 '계급 형성' 혹은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규정하는 '권력 동원'의 문제가 민주화 진전(복지국가 등 진보적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 변수였다.

정치는 현실이다. 특히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보통선거권의 도입, '공동 결정권'과 같은 노동-자본 간의 관계에서의 근본적 변화,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의 도입과 같은 복지정책의 질적인 전환 같은 사회·경제적 주요 변화는 기득권층의 자발적 지지나 지성인들의 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라 하면 지나칠까. 늘 역사는 사회적 약자에 가혹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동하고 견인하고 때로 '강제'해왔던 것은 늘 광범위한 대중의 힘이었다. 특히 여기에는 19세기 말 이후 조직되고 확대되었으며, 정치세력화한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적 정치세력들의 움직임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 민주화의 진전, 복지국가의 발전에는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동 정치의 제도적 보장,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같은 친노동 정당의 정치적 성장과 정부참여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진보적 개혁이 추진되고, 확대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동 정치의 제도적 보장, 친노동 정당의 정치적 성장과 정부 참여가 여전히 결정적 중요성을 가질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많은 한계와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혹은 '아직도') 희망은 노동 정치에 두어져야 한다고 본다.

저자의 희망과 같이, 폐쇄적인 정신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진보 세력을 구성하고 진보의 리더십이 인도된다면, 한국 정치의 미래는 지금보다도 훨씬 밝아질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허구적 관념들이 깨어져 나가고 시민들의 지성이 계몽되고 더 높은 수준의 공론이 형성된다면, 민주주의는 더욱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제도적 절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문명과 진보를 향한 전진의 바탕에는 '노동 정치'의 형성과 전개 과정이 존재해왔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 노동 정치를 통해서 그러한 진보가 견인되어 왔다는 인식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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