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은 오랫동안 상대방을 '괴뢰'라 불렀다. 국민의 주권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 종주국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란 말이다. 1972년 7.4공동선언을 계기로 최소한의 권위를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단계가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괴뢰'관은 그 후에도 양측 지도부의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한을 괴뢰로 본다면 그 종주국은 의문의 여지없이 미국이다. 미국은 1945년 9월의 남조선 점령 이래 반세기 이상 남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21세기 들어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은 아직까지도 압도적인 수준을 지키고 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북한에 대해 소련이 맡았다는 것이 한국인의 통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역할이다. 미국 다음으로 남한과 큰 관계를 맺었던 일본의 역할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국인은 없었다. 반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은 소련의 역할과 분명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북한과 중국·소련의 관계
중국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한국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나라다. 개항기 이후 혼란에 빠지고 국력이 약해졌으나, 식민지시대 조선 독립운동의 최대 후원국 역할을 계속했다. 우익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좌익 항일운동은 중국공산당에 의지했다.
해방 후 중국의 역할은 한국을 점령한 양대 맹주, 미국과 소련에 밀려나 있었지만 항일투쟁의 전우관계를 배경으로 한국에 영향력을 키울 기반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당정부가 대륙을 잃고 한국에서 임시정부 세력이 몰락했기 때문에 남한과의 관계는 발전하지 못한 반면 함께 공산블록에 들어간 북한과의 관계는 밀접해졌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최대한 가까워졌다. 전쟁에 대한 소련의 '후원'은 막대한 인명을 바친 중국의 '참전'과 큰 거리가 있었다. 미국과의 정면대결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인 중국에 한국전쟁은 남의 전쟁일 수 없었다. 인접국으로서 운명을 공유하는 관계가 전쟁으로 확인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몇 해 후 중-소 관계가 갈라지자 북한은 두 나라와의 관계를 서로 비슷하게 두는 등거리외교를 기조로 삼았다. 정세 변화에 따라 때로는 소련을, 때로는 중국을 더 가까이 했다. 수시로 비중이 옮겨지는 상태를 오래 겪는 동안 북한 지도부는 어느 쪽에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세를 키웠고, 이 자세 위에 '주체' 노선을 세웠다.
냉전기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가 미국에 대한 남한의 의존도보다 훨씬 덜했다. 의존 대상이 두 나라였다는 것도 이유의 일부지만, 소-중 두 나라 모두 스스로 체제 위기에 몰린 일이 많았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투자만큼 큰 투자를 북한에 꾸준히 할 여유가 소련에도, 중국에도 없었다.
1970년대 초까지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Vintage Books, 1994) 257-287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3년까지의 세계적 호황기에 '황금시대'(Golden Years)란 이름을 붙였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좁은 범위의 선진국으로 부의 집중이 이뤄진 시기다. 제3세계 착취가 가혹하던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권 후진국보다 사회주의권 후진국이 더 나은 발전 여건을 누렸고, 북한은 이 여건을 잘 활용했던 것이다. 경제 자립도가 남한보다 높았기 때문에 종주국에 대한 의존도 역시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홉스봄이 같은 책 403-433쪽에서 '위기시대'(Crisis Decades)라고 이름 붙인 1973년 이후의 20년간 일어난 세계적 경제구조의 변화 속에서 한반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남한은 이 시기에 가장 큰 발전을 이룬 신흥산업국(NICs)의 하나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위치에 접근한 반면 사회주의권은 전면적 침체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북한에 대한 후견국 내지 종주국 역할의 수행이 갈수록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북한이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란 극도의 경제난을 겪고 그 직후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강화되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후견국 역할이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북한은 이웃 두 대국의 도움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건국 후 최악의 고립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냉전 해소의 기운 속에서 남한이 '북방정책'을 채용할 때 북한의 대응 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중-소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당시 어떤 상태였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명인문화사, 2012) 제3부 "핵심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
공산진영의 맹주 소련은 자신을 유럽국으로 간주하고 아시아보다 유럽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북한의 소련에 대한 의존도는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이라고 교육받아 온 우리의 통념에 비해 높지 않았다. 1953~1956년간 북한이 받은 원조 중 34.9%가 소련 것이고 35.4%가 중국 것이었다고 하는데(위 책 325쪽), 당시 두 나라의 경제수준 차이를 감안한다면 소련 원조의 비중이 생각보다 작았다.
1956년 흐루시초프가 서방과의 평화공존 노선에 나서면서 북한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 중-소 분쟁이 펼쳐지자 북한은 두 나라의 원조를 모두 받기 위해 중립노선을 취했으나 중국 쪽으로 많이 기울어지는 편이었다. 1962년 북한의 소련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군사원조 중단 등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 후 브레즈네프-코시긴 지도부가 대 서방 강경노선을 취하면서 소-북 관계가 다시 긴밀해졌다. 반면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홍위병의 북한 지도부 비판이 나옴에 따라 중-북 관계는 소원해졌다. 북한의 대 소련 교역액이 1966년 1억7000만 달러에서 1970년 3억7300만 달러로 늘어나는 동안 대 중국 교역액은 2억300만 달러에서 1억5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후 소련과의 교역은 북한의 대외교역에서 계속 50% 이상을 점하면서 1985년 17억6600만 달러(62.5%)에 이르렀다(위 책 326-327쪽).
북-소 관계는 소련의 대 서방 정책이 유화노선일 때 약화되고 강경노선일 때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동서 간의 데탕트가 진행된 1970년대에 한-미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서 대결의 첨병으로서 위치 때문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에 나설 때 북한의 반응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과 거리 좁힌 중국·소련, 수세에 몰린 북한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는 북-소 관계가 원만했다. 당시 북한은 1984년 9월의 합영법 제정과 대남 수해원조 등 온건한 개혁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1985년의 해방 40주년 기념식에는 알리예프 제1부수상 등 소련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고, 몇 주일 후에는 고르바초프의 오른팔로 알려진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방문했다. 그해 연말 원자력 기술을 포함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기도 했다(와다 하루키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서동만-남기정 옮김, 돌베개 펴냄) 170-171쪽).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태평양 경제협력체 참가 의사와 동아시아 핵무기감축 제의 등을 포함한 1986년 7월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과 이를 더욱 강화하면서 한국과의 경제협력 가능성을 밝힌 1988년 9월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을 내놓는 데 따라 북한 지도부는 불신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소련을 비롯한 대다수 공산국가의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도 북한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1990년 9월 한-소 국교정상화가 이뤄지자 북한은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 동맹국의 리익과 신의를 팔아먹은 행위"라며 극렬한 비난을 퍼붓기에 이른다(김계동 위 책 327쪽).
1991년 12월 소련 해체를 전후해 러시아가 시장경제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면서 북한과의 경제관계에서 시혜적 성격을 제거함에 따라 교역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1990년 25억7000만 달러로 북한 대외교역의 53.3%를 점하던 것이 1991년 4억6000만 달러, 1993년 2억3000만 달러, 1995년 8000만 달러로 곤두박질했다.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는 동맹조약인 북-러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의 개정을 제안하고, 이를 북한이 거부하자 동맹관계를 무시한 채로 1996년 9월의 조약기간 만료를 기다렸다(위 책 328-329쪽).
중국 역시 1980년대 들어 개혁개방 정책의 전개에 따라 한국과의 관계를 열어가는 등 북한 지도부를 불안하게 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으나 동맹관계의 신뢰는 잘 유지되었다. 소련과의 관계가 불안해지는 만큼 중국과의 관계에 더욱 집착하는 추세도 보인다. 한-소 수교를 전후해 1990년 3월 장쩌민 총서기, 1991년 5월 리펑 총리, 1992년 4월 양상쿤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위 인사들의 방북과 김일성의 1989년 11월, 1990년 9월, 1991년 11월 연이은 방중이 두드러진다.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 이후 2000년 5월 김정일의 방중까지 8년간 이런 수준의 고위급 교환방문이 끊어지는 상황과 대비된다(위 책 246쪽).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도 북한 무역에 경화결제를 요구해 시혜적 성격을 약화시킴으로써 북한 경제난을 방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원칙 고수를 표방하는 중국의 북한 후원 입장은 1993년 유엔에서 확인되었다. 북한의 NPT 탈퇴에 대한 제재 움직임을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를 명언하며 가로막은 것이다. 중국은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지켰고, 자국 경제사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위 책 246-247쪽). 그러다가 경제 발전과 국제적 위상 제고에 따라 북한의 후원국 역할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1981년 9월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부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연이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동맹관계를 전보다 경시하는 변화를 일으킴에 따라 북한의 고립 위험이 계속 자라났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대외정책 변화 요구에 따라 남한과의 대화 등 나름의 개혁개방 정책을 채용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단계에서 두 차례 극도의 호전성을 보인 사건에서 북한이 상황 적응에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1983년 10월의 아웅산사건과 1987년 11월의 KAL기 폭파사건이다. 당시의 세계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 호전성을 보인 이 두 사건은 아직까지도 북한의 국가 성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기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 북한의 위기의식 위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위기의식이 왜 그런 극단적 방식으로 표출되었는지는 아직도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지금 시점에서도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위해 북한이 해명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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