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사망 소식에 접한 미국 정부는 꽤 명쾌한 반응을 보였다. 조의를 담은 아주 짧은 대통령 성명을 내고 제네바에 가 있던 북미회담 대표단이 북한대표부를 조문차 방문하게 했다. 전 세계의 북한 외교공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지만 제네바 외의 다른 곳에서는 미국 외교관이 방문하지 않도록 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한 미국 관리는 그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고 한다.
“이 일은 북한 역사에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였다. 미국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북한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사소한 것으로 크게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315쪽)
남한 정부가 생색 낼 기회를 누리지 못한 것은 미국에게처럼 “사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소식이 전해진 직후 김영삼 정부의 결정 두 가지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아쉽다”는 표현으로 한 것과 군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린 것이었다. 비상경계령은 명백한 적대적 반응이었다. “아쉽다”는 공식 입장은 그보다 온건한 것이었지만 며칠 후 이부영 의원의 조문 제안에 대한 반응은 비상경계령보다도 더 험악한 것이었다. 남한 정부는 북한에게 생색을 내기는커녕 냉전 이후 최악의 적대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혈맹’ 관계의 두 나라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전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붕괴론이 더 힘을 얻은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설령 결국 붕괴하더라도 그 전에 대화를 통해 얻을 것이 많다는 입장이었다. 남한과 미국의 태도 차이를 보여주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정부가 대북강경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취한 일련의 조치는 북핵위기와 관련한 미국의 정책과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7월말 국가안전기획부는 두 명의 탈북자를 공개했는데 그중 한 명은 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였다. 강명도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이미 다섯 개의 핵무기를 제조했다고 주장했다. 외무부는 그의 주장에 놀라기만 했지만 미국정부는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었을 뿐더러 북한과의 대화를 훼방하기 위한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강명도의 주장은 소문에만 의거한, 근거가 없는 말일 뿐이라고 물러섰다.
한미 간의 핫라인을 통해 토니 레이크 안보보좌관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에게 강명도의 주장을 부인한 것은 고맙지만, 애초에 그런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저의가 뭐냐고 따졌다. 정 수석은 안기부가 무슨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며 강명도는 그 발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와 같은 기자회견이 사전에 기획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탈북자들이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진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음은 틀림없었다. (같은 책 318쪽)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근거 없이 내놓는 것은 게이츠 CIA 국장 같은 미국인들에게 배운 것이겠지만, 맥락이 틀렸다. 게이츠는 북한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세계최강 정보기관 수장의 권위 위에 뻥을 쳤다. 탈북자 개인의 권위와 비교가 안 된다. 그리고 게이츠의 뻥 이후 여러 차례 북미회담을 통해 북한 핵사업의 실체가 많이 밝혀져 왔다. 강명도의 뻥은 북미관계에 종사한 미국 관리들이 모두 바보라는 주장을 함축한 것이었다. 레이크 보좌관이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미관계에 종사한 미국 관리들은 남한 정부의 갈팡질팡에 시달리다 보니 남한 국내정치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게 된 것 같다.
3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국정부의 태도는 “관망”에서 “대북적대”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이번에도 김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취했던 “두드려보고 건너는” 방법을 취했다. 즉 여론이 형성될 때까지 입장표명을 미루다가 가장 주류의 입장에 편승하는 방법이었다. 대통령이 관망하는 사이 보수파들이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와 논쟁을 선점했고, 주사파 학생들이 여론을 악화시킨 결과 정부는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사실 보수주의적 견해가 김 대통령의 성향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강경”하다는 이유로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했다. (같은 책 319쪽)
이렇게 해서 남한은 이후의 북미회담 진행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그 동안 남북대화가 북미대화에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북미회담 진행을 견제해 왔는데, 8월 5일 북미회담이 속개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아낌없이 드러내면서 김일성 대신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일축해 버렸기 때문에 그 명분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북미회담 속개 시점에서 미국 대표단의 분위기를 퀴노네스는 이렇게 그렸다.
김일성 사망 한 달 뒤, 미국과 북한 대표단은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카터와 김일성 간의 드라마틱한 만남이 빚어냈던 낙관적 분위기가 완전히 씻겨나가고 없었다. 양국 대표단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 전날인 7월 8일이었는데, 7월 중에 상황은 일대 전환을 겪은 셈이었다. 김일성은 무대에서 사라졌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권력 승계 여부를 둘러싸고 온갖 억측이 난무한 것도 사실이다. (…)
평양의 불투명한 상황은 미국 정부에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강석주는 계속해서 북한을 대표할 것인가? 그는 김정일의 확고한 신임을 받고 있는가? 김정일은 권력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은 당시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기를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우리 대표단의 최우선과제는 묵한 핵시설에 대한 전면적 핵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반도 운명> 288-289쪽)
남한 정부는 언론플레이에 너무 열중하다가 미국 대표단의 신뢰를 잃기도 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언론보도였다. 거의 매일같이 한국 관리들이 한국 언론에 북미회담의 진행사항을 흘려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회담에 대한 헛소문과 비판이 일어 협상적업은 어려워지곤 했다. 한국 관리들은 정보누설을 차단해달라는 미국 측의 거듭된 요청을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대표단은 갈루치와 강석주 사이의 축소회담 내용을 제네바 주재 한국 외교관들에게 브리핑해 주던 일을 중단하고 말았다. (같은 책 302쪽)
회담 속개 불과 1주일 후에 양국 합의 성명이 나온 것을 보면 양측 대표단이 합의 도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성명의 내용과 성격을 퀴노네스가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남한의 부정적 역할을 알아볼 수 있다.
8월 12일의 합의성명은 기본적으로 두 달 후에 모습을 드러낼 1994년 10월 21일의 ‘기본합의문’의 준비를 위한 개략적 초안이었다. 이것은 두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들이 서명한 최초의 합의였다. 우리가 합의문의 서명 시에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은 한국의 부정적 반응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의 큰 중요성은 두 나라가 서로 상대방의 가장 요긴한 요망사항을 들어줄 용의를 서면으로 표시한 최초의 문서라는 사실에 있다. 북한은 2기의 경수로와 함께 궁극적 관계정상화를 위한 약속을 얻어내고, 미국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을 뜻을 확인해 줌에 따라 세계적 핵안전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중요 사안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미국은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계속해서 이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북한 측은 팀스피릿 훈련의 중지와 북미평화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지는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북미평화협정 체결은 전혀 재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의 남북대화 재개 약속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반도 운명> 309-310쪽)
‘특별사찰’이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특별사찰 제도를 IAEA가 북한을 상대로 들고 나온 것은 미국이 제기한 연료 재처리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 NPT에는 재처리를 규제하는 내용이 없다. 미국이 하도 요란을 떠는 바람에 IAEA에서 특별사찰을 끄집어낸 것인데, 한 번 끄집어낸 이상 국제기구의 위신 때문에 도로 접어 넣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국은 국제기구의 요청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이것을 북한에 들이대 왔다.
북한 입장에서는 특별사찰 요구가 불공정한 횡포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IAEA가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장소를 사찰하게 하는 특별사찰 제도는 주권 침해가 심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에 대비하는 제도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핵무기를 만드는 나라들은 NPT 가입국이 아니라서 손도 못 대는 IAEA가 유독 북한에게만 특별사찰을 요구한다면 NPT에서도 IAEA에서도 탈퇴하겠다는 것이 북한 입장이었다. 카터는 이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배제하고 김일성과의 회담에 임했다.
따라서 특별사찰 문제는 미국에게 북미회담의 자물쇠인 셈이었다. 회담을 파탄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문제를 강경하게 요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원할 때는 옆에 치워놓으면 됐다. 1974년 8월 북미회담의 합의문에서는 “전면적 핵안전조치를 준수”한다는 말로 표현을 바꿈으로써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 표현이 미국에게는 ‘특별사찰’의 뜻이었고 북한에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남아있었다.
제네바의 회담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지만 외교적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복잡했다. 갈루치는 북한이 특별사찰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강석주는 수락은커녕 논의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라 상황이 매우 불확실해졌다. 또 북한은 예의 양다리 걸치는 작전으로 나왔다. 북한이 합의사항을 이행할 지의 여부는 “IAEA의 불공정성이 얼마나 고쳐지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강석주는 “특별사찰 문제는 상호신뢰가 회복되면 해결될 것”이라며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소한 카터-김일성 회담 당시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북한의 태도를 서방의 언론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북핵위기의 전말> 339-340쪽)
1993년 7월 제2차 북미회담 이래 미국정부 내에서는 과거와 현재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논쟁이 이어졌다. 특별사찰은 북한이 이미 재처리한 연료를 확인하자는 것이므로 과거를 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 때문에 협상이 늦어지는 동안 재처리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문제, 즉 안전조치(safeguard) 문제였다. 위트-폰먼-애커먼은 1994년 5월 이 문제의 논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은[미국 고위 관리들은] 곧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참석자들 중에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비확산관련 의무를 이행하거나 핵 활동을 중단 또는 공개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 북한이 핵탄두 한두 개 분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한 의혹이 있다고 제재에 나섰다가 오히려 북한이 핵탄두 다섯 개 이상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가로 추출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분명히 있었다. 또 대북제재, 특히 군사행동을 동반한 무역금지를 전쟁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핵확산 금지에 관한 국제레짐과 미국의 오랜 정책의 신뢰도에 큰 손상이 갈 것이 분명했다. (같은 책 228-229쪽)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내가 추측하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6월의 카터 방북 이후 10월에 제네바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미국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지켰다. 클린턴 행정부는 협상을 원했던 것이다. 협상이 본의가 아니었는데 카터가 사고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보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앞서 부시 행정부 때부터 특별사찰을 내세워 온 것이 협상을 막는 족쇄가 되어 있었고, 그 족쇄를 벗어 던지는 장면을 카터가 얼버무려 준 것으로 봐야겠다.
북-미 대화의 고삐는 계속해서 미국이 쥐고 있었다. 공산권 붕괴 이래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체제 유지를 위한 절박한 과제로 여겨 왔다.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북한의 NPT 탈퇴선언 등 강경한 태도는 기실 “날 좀 보소 아리랑”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전쟁까지 검토했다. 검토한 결과 이제 북한과의 협상에 성의를 보이고 있었다. 8월 12일의 합의문은 실제 이뤄진 합의 내용의 일부만을 담은 것이었다.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와 상관없이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제네바의 “합의문”은 단지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의 윤곽만 그린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대표단은 제네바에서 합의된 문건보다 더 자세한 문건, “합의각서”의 초안을 건네주었었다. 다만 시간 제약 때문에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고 “합의성명”만 발표하기로 했다. 그 합의의 이행단계를 조목조목 밝힌 그 문서가 후일 최종 합의문의 초석이 된다. (같은 책 340쪽)
“벼랑 끝 전술”이란 말이 북한의 대외전략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많이 쓰인다. 이 말이 적절해 보이는 대목도 꽤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장면에까지 쓰이는 일이 많다. 1993년 3월의 NPT 탈퇴선언 이후 북한의 강경한 태도는 명분도 합당하고 현실적으로도 효과적인 정책이었다. 위험이 수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위험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결국 북한의 강경한 태도 앞에 스스로 거둬들이게 된다. 소위 제1차 북핵위기에서 북한의 전략은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미국의 태도에는 불안한 점이 많았다. 북한과 협상하기로 정책을 돌리기 위해 ‘카터 쇼’를 필요로 한 것부터 그렇다. 그리고 강경파의 돌출행동이 튀어나올 위험이 늘 있다. 제네바합의를 완성하기 위한 제4차 북미회담을 며칠 앞두고 핵항공모함 키티호크 호를 포함한 전투함대가 한반도 근해로 이동한 것도 그런 예다.
로널드 슬래포터 태평양지역 미군사령관은 “강한 군사력은 외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한반도 근해로 전투함대를 보낸 이유다. 이것이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태평양 성조지> 회견에서 공언했다고 한다. 회담 분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는 이 도발적 조치를 사령관의 단독행동으로 본다고 퀴노네스는 적었다.
여기서 강석주는 1993년 6월 11일의 공동성명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의 사용이나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조선과 미국은 합의한다”고 한 대목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두 나라 사이에 쌓인 불신으로 인해 핵회담 시작 때부터 상호간의 신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적어도 평양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점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태평양사령관이 보낸 강력한 메시지는 북한에 대해 그 동안 미국이 쌓아 온 신뢰를 뿌리째 흔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북한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 상황에 임한 것은 핵회담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제네바에서 첫날 회담을 끝낸 강석주는 이튿날 일정은 실무진 논의로 하고 그 뒤 이틀은 주말이니까 휴식을 취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 덕분에 미국은 함대를 동해에서 철수시킬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함대는 그 후 일본 요코스카로 철수했다. (<한반도 운명 328쪽)
제4차 북미회담에서 마무리되고 있던 협상 내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에도 남한에도 많았다.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함대 이동 정도 조치는 자의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남한 국방장관 이병태는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인 9월 2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그 해 팀스피릿 훈련의 취소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제네바의 두 나라 대표단은 그런 도발에 교란되지 않고 회담을 마무리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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