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0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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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일제가 9번 투옥한 독립운동가, 누가 그를 지웠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안재홍과 동지적 연대를 맺은 건축왕
1920년대 급격한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대(大)자본가로 성장하는 와중,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중 공식적 기록으로 확인 된 것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한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아래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이다.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
김경민 서울대학교 교수
왕십리 토지 전쟁, 불붙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일제의 도시 개발에 저항하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920년대 개발은 공간적으로 사대문 내부 특히 청계천 이북(북촌 지역)에 집중된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4대문 외곽 지역(창신동, 서대문, 성북동 등)을 개발하였는데, 경성 외곽은 일종의 교외 지역 뉴타운/신도시 개발로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사대문 내의 빈 공간을 개발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194
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정세권은 1920년부터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을 시작하여 1950년대 중후반까지 사업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이후의 개발은 외부적 요인(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의 혼란)으로 인하여 왕십리 인근 지역에 한정된 듯하다. 따라서 정세권의 개발 사업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님 정남식 님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18세기 중엽 런던 거리, 20세기 초반 창신동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창신동,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추억
'건축왕 정세권'이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한 지역, 창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세권 선생에 대한 연재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창신동 소재 대형 한옥이 곧 헐리기 때문이다. 해당 한옥은 어쩌면 창신동의 잊혀진 역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일지 모른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정세권의 건양사 광고에는 아래 내용이 나온다.
건축왕, 한 달 만에 한옥 37채를 만들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한 해 동안 170여 채 한옥 건설하기도
일제 강점기 시절 정세권의 건양사가 일반인들에게 인식될 만큼 매우 큰 회사이었음에도, 해방 전 사세가 기울었기에 건양사의 매출, 이익 등 회계 및 기타 사업 자료를 구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건양사의 활동은 신문 자료 혹은 인터뷰 자료를 통해서 가늠할 뿐인데, 특정시기 신문에 소개된 분양/임대 광고는 대략의 사업지와 규모를 추정하게 해준다. 건양사는 조선일
한국 건설社는 왜 최고 부자가 못 되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80년 앞서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 길 연 정세권
'뉴스테이'(민간 건설사가 중산층용 임대 아파트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 정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정부가 저리 은행 이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건물 건설 후 분양 위주 사업을 하던 민간 건설 회사가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실 해외에서는 민간 부동산 회사들이 중산층과 서민을 대상으로 임대 주택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이 매
집값 폭락 시대, 그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경성 최대 디벨로퍼,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
1936년 매일신보는 성공한 사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시리즈('나는 어떠케 성공하얏나?')로 연재하였다. 그 중 다섯 번째 연재에 정세권의 인터뷰가 실렸다. 여기서 눈여겨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제목이다.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때를 말하는 건양사주-정세권' 연재 초기,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일
그는 어떻게 10년 만에 부동산 재벌이 되었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상경 10년 후 재벌이 되다.
1929년 경성편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각 분야를 소개한 것인데, 나름 경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경성은 조선의 수도이요. 삼십여만 시민이 사는 대도시일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선의 심장이라 할 것인데 이때까지 완전히 소개한 책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누구나 유감으로 여기던 바, 이번에 경성
1980년 역삼동과 대치동, 당신의 선택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20년 정세권의 북촌 입성
부동산 투자 및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물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을 듣게 된다. 첫째는 위치.둘째도 위치.셋째도 위치. 부동산 투자에서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주 근거리에 위치하였음에도, 부동산 가격 차이가 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사교육 1번지 강남구 대치동의 경우, 근래 재개발이 완료되어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50평형대)의
영화 <암살> 주인공이 잊히는 게 온당한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왜 정세권인가?
광복 70주년과 맞물려 영화 암살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역사적 평가가 미약했음에 대한 자성,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연유로 역사 앞에 드러날 수 없었던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이 대중에서 회자되었다.이의 연장선에서 아래의 질문을 해 본다.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을 절대적으로 후원하면서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열었고, 조선어학회 재정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