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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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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정세권은 1920년부터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을 시작하여 1950년대 중후반까지 사업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이후의 개발은 외부적 요인(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의 혼란)으로 인하여 왕십리 인근 지역에 한정된 듯하다. 따라서 정세권의 개발 사업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님 정남식 님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총독부가 불러서 들어갔더니 나 보고 왜 한옥만을 건설하느냐?고 묻더구나. 우선 무시하고 들어왔다.' 하지만, 중일 전쟁의 여파인지는 모르나, 총독부가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일식 주택을 건설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면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주택 사업에 손을 대지 않으셨어요." (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2015년 10월 16일)

그리고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는 1940년 11월 20일 '택지 건물 등 가격 통제령'을 발포하였다. 통제령은 모든 택지와 건물 가격을 1939년 9월 18일을 기준으로 통제 통결시키는 것이었다. 이의 후폭풍은 상당하였다. 시장 거래 가격을 거의 1년 전 수준으로 동결시켰으니, 매매 시장의 위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거래가 중지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주택 구매자가 1940년에 주택을 높은 가격에 샀다면 손해를 보고 작년 가격으로 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매매 시장은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지방 인구가 여전히 경성으로 진입하고 있었기에 임대 시장은 매우 활황이었다. 굳이 주택을 팔지 않아도 집을 세놓아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택 개발 업자 입장에서는 주택 건설 채산성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일 전쟁의 여파로 건설 자재 가격이 상승하였기에 주택 건설 가격의 상승은 불가피하였으나, 가격 통제령으로 말미암아 주택 매매 가격 인상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고, 이러한 사업성의 악화로 인해 디벨로퍼들은 주택 공급에 나설 수 없었다.
▲ "신축 가옥은 많으나 주택난은 여전 심각"(<매일신보> 1940년 11월 23일).

그리고 정세권은 개인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망 하에 있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다른 디벨로퍼에 비해 더 좁았다. 조선물산장려회 활동, 신간회 참여, 그리고 조선어학회 후원 등으로 그는 일제의 요주의 리스트에 있었고, 특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빼앗겼기 때문에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왜정 말기, 뚝섬 일대의 큰 토지를 빼앗긴 후 가세가 기울었어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큰 집을 나와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했을 때, 옆 집 사람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세권의 딸 故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의 황금기 시절, 정세권 선생의 개발 지역은 청계천 이북 경성 지역의 대부분과 경성 외곽 지역(오늘날로 보자면 교외 지역 개발)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그의 증언을 따르자면, 건양사는 한 해 300여 채의 가옥들을 개발하였다 한다. 근 20년에 걸쳐서 6000여 채를 건설하였다면, 이는 상당한 규모다. 1920년대에는 경성 내 신축건물의 20~3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정세권은 본인이 건설한 한옥 주택의 품질을 체크하기 위해 한 지역에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면 온 가족이 이사를 하여 그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였다. 실제로 집에 살면서 집의 하자 등을 고치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정세권의 손녀 김재원 교수의 증언이다.

"할아버지께서 집을 계속 새로 지으셨기 때문에 정말 자주 이사를 다니셨어요. 새로 입주한 집을 외할머니께서 손보시곤 했어요. 그리고 집이 이내 빨리 팔리곤 했기 때문에, 이사가 매우 잦았습니다.

어머님(故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께서는 계동에서 출생하셔서 봉익동과 가회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1928년께 소학교(교동 소학교) 들어가실 때에도 가회동에 사셨다고 하십니다. 당시 가회동은 아직 동네가 형성되지 않았던 곳으로 허름한 오래된 한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후 소학교 재학 시절에 익선동과 낙원동(3층집)에 잠시 사시다가 1934년 이후 이화여고에 다니실 즈음 다시 가회동 양옥으로 이사하셨다고 합니다.

이화여고에 다니는 동안 다시 서대문(적십자 병원부근)에 사셨고, 다시 가회동으로 이사하였다가 서대문(죽첨동 : 옛 인창학교 부근)에 사시는 동안 이화여전(1938년께)에 입학하셨다고 합니다. 이전에 다니시는 동안 다시 가회동으로 이사하셨다가 결혼 당시(1949)에는 왕십리로 나가계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쟁 말기에 가운이 많이 기울어졌었겠지요." (정세권의 손녀 김재원 교수 이메일 인터뷰, 2015년 9월 10일)

위 증언에는 빠져 있지만, 정세권은 한일은행 창업주이자 대부호인 조병택의 저택을 매입하여, 해당 부지에 한옥 집단 지구를 1930년대 초반에 건설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창신동에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또 정세권은 혜화동과 성북동 일대에도 대량의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하였으며, 아들 내외가 그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기록이 전한다.

비록 건양사가 어느 지역을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의 분양 광고, 실생활 잡지에 나왔던 분양 광고와 건양사 회사 주소지 그리고 가족의 증언과 등본상 주소를 역추적하여 종합적으로 건양사의 개발 지역을 지도화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해당 지역 전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성 대부분의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더군다나, 광고와 가족의 등본상 주소에 나와 있지 않은 개발 지역이 충분히 있다는 추정할 수 있기에, 정세권의 개발지는 최소한 이 이상일 것이다.

▲ 그림 2, 건양사 개발지.

건양사 경성 개발의 규모와 방식이 함의하는 도시 개발/계획사적 의미는 필자의 견해로는 상당하다. 건양사의 사업 유형과 개발 방식은 미국 교외 주택 단지의 선구자인 레빗 사에 필적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교외화로 접어든다. 고속도로의 건설, 저렴한 주택 구입 모기지 등 여러 이유로 중심 도시에 모여 살던 백인들이 교외 지역으로 주거지를 이주한 것이다. 교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주택 수요가 폭증하자 이에 걸맞춰 대규모 디벨로퍼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레빗타운이라 불리는 거대한 교외 지역 주택 단지를 개발한 레빗(Levitt & Sons, Inc) 사이다. 레빗 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윌리엄 레빗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군인들을 위한 주택의 대량 건설 시스템을 경험하였고 이를 실제 거대 주택 단지 개발 사업에 적용하였다.

즉, 규격화된 디자인과 건설 부품의 사용, 일부 공장에서 제작된 건설 자재의 이용, 잘 짜여진 공정과 분업 체계의 적용 등을 주택 건설에 적용한 것인데, 이는 포디즘적 생산 양식을 부동산 개발에 적용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매우 짧은 기간에 대량의 주택을 건설한 것이다. 예를 들어, 롱아일랜드 소재 레빗타운에 개발된 주택 수는 무려 1만7000여 채에 이르며 이는 가장 큰 주택 단지 개발로 여겨진다.(Peter Hall, [Cities of Tomorrow], Blackwell Publishers, 2001, pp.320-322)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빗타운.

아래 사진은 1975년 항공 사진에서 보이는 동대문 북쪽 창신동 지역이다. 창신동 651번지는 앞서 설명한 거부 조병택의 아방궁을 매입하여 개발한 지역으로, 레빗타운과 스케일은 다르나 작은 규모에서 비슷한 모양새의 주택을 대량으로 건설된 흔적은 매우 흡사하다.
▲ 1972년 동대문 인근 창신동 한옥 집단 지구. ⓒgis.seoul.go.kr

하지만, 더 놀라운 곳은 돈암 지구(보문동 지역)의 한옥 집단 지구이다. 일제는 보문동 일대를 당시 경성 외곽의 뉴타운 개발 지역으로 꼽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려 하였으나, 실제 개발은 조선인 디벨로퍼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개발 시기는 1937~1940년이다.(김영수,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서울학 연구, 2009) 아래 모습은 시기적으로 미국의 레빗타운 건설 이전, 조선에서(포디즘을 고려했건 안 했건) 이미 레빗타운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주택 개발 단지가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1980년도의 항공 사진이니, 1940년 당시에는 온 지역이 한옥으로 덮여 있었다. 보문동 지역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부분이 있는지는 현재 아는 바가 없다.

▲ 1980년 보문동. ⓒgis.seoul.go.kr

따라서 그 규모가 다르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인구 폭증의 경성 1920~1930년대 우리나라에도 포디즘의 대량 생산에 비견되는 역할을 한 디벨로퍼, 건양사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의 개발이 시사하는 큰 의미는 디벨로퍼 정세권이 일제의 도시 계획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였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연재는 다음 회에 한다.

(정세권 선생님의 둘째 따님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피아노과)께서 2015년 10월 30일 소천하셨다.

2013년 <프레시안> 연재를 통해 연이 닿아 수차에 걸쳐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불과 몇 달의 신혼을 함께 한 남편이 한국 전쟁 시 납북되었던 끔찍한 기억을 들려주었을 때의 상심을 잊지 못한다. 연로한 가운데 정세권 선생님 개발 지역의 기억을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였던 모습에 대한 감사함은 글로 표하기에 너무도 부족하다.

고인은 부친이 집 장사로 매도되었던 점과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부분이 외면 받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정세권 선생님이 당한 고문의 기억에 힘들어하였다. <프레시안> 연재를 통해 정세권 선생님이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기를 소망한다. 지면을 통해서 유족분들께 다시 한 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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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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