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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설社는 왜 최고 부자가 못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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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건설社는 왜 최고 부자가 못 되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80년 앞서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 길 연 정세권

'뉴스테이'(민간 건설사가 중산층용 임대 아파트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 정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정부가 저리 은행 이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건물 건설 후 분양 위주 사업을 하던 민간 건설 회사가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실 해외에서는 민간 부동산 회사들이 중산층과 서민을 대상으로 임대 주택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이 매우 일반화돼 있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 산업이 낙후된 우리나라에서는 임대 주택 혹은 임대 아파트는 저소득 서민층에만 한정된 시장으로 여겨져 왔었고, 주된 역할을 하는 조직은 LH(토지주택공사)와 SH(서울도시개발공사) 등 공기업이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중산층 혹은 서민용 임대 아파트 시장은 민간 디벨로퍼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대형 민간 임대 사업자가 존재할 뿐 아니라, 뉴스테이 정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관련 기사 : "뉴욕 부자들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유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민간 기업의 임대 주택 개발 및 운영 사업 진출이 새롭고 신기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경성의 디벨로퍼는 민간이 운영하는 임대 주택 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했고 실제 사업을 진행했다.

단순 부자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부자가 된 배경

경성 주택 시장에는 1920년부터 1940년 사이 크게 3번의 사이클이 존재했다. 1910년대에서 1921년까지 급등한 주택 시장은 1922년과 1923년 사이 50% 이상 하락하는 대폭락을 경험한다. 1924년 이후 서서히 오르던 주택 시장은 세계 대공황기(1929~1933년)에 다시 내림세로 반전했다. 이후, 다시 폭등하기 시작한 주택 시장은 1937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폭락한 후, 1939년 이후 다시 반등한 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파고 속에 횡보를 거듭하게 된다.

1922~1923년 대폭락장에서 살아남은 정세권은 시장의 선도적 지위를 점유한 후 큰 무리 없이 사업을 영위했고, 1930년대 초반의 부동산 불경기 역시 별 탈 없이 견뎌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파도가 거세지는 시점에서 그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민간 임대 주택 시장 진출이었다.

"사변(1937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집 장사가 받은 영향은 상당히 큽니다. 사변이 일어난 바로 뒤부터 집 매매는 중지 상태에 빠지고 집값은 약 20%가량 떨어졌으며, 새로 짓는 집은 전혀 없다시피 되었다가 서울의 주택난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금년(1938년) 여름부터 집값이 도로 올라서 지금은 사변 전의 가격과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건축 재료가 꼭 10% 올랐기에 전과 같이 집 장사의 채산이 서지 않습니다.

(…) 앞으로 집 장사는 도저히 전과 같은 채산을 바라기는 어려우므로 집을 새로 짖는 것은 일체 중지하고 그 대신 집세 받는 영업으로 전환할 작정입니다. 서울은 소위 대도시라고 하면서 기업적으로 집세 빌리는 업을 하는 사람이 없고, 소위 셋집이 증가한 것은 그 집이 팔릴 동안 임시로 들어있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편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 집 장사들의 나아갈 방침은 대규모의 조직적인 집세 놓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매일신보> 1939년 1월 6일자)

▲<매일신보> 1939년 1월 6일자.

과거 그는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면서 집이 팔리기 전, 몇 개월의 단기간 임대를 놓곤 했다. 해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고,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서민에게 월부로 주택을 임대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나 고투 이극로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 그 인텔리들이 살 집이 없어서 쩔쩔맸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본인이 건설한 단지의 한옥 중 빈집이 있으면, 그런 분들이 와서 살게 했어요." (딸 정정식(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 2014년 1월)

춘원 이광수는 정세권과 이후 남다른 인연을 이어간다. 정세권이 자신의 한옥을 건설해 준 것을 고마워하며 '성조기'라는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정세권의 딸들 중매를 서주었다. 고투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실무와 사전 편찬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주역이었고, 정세권은 그와의 인연인지는 모르나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건설하고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이후의 연재에서 한다. (필자)

1939년 그는 '서울은 소위 대도시라고 하면서 기업적으로 집세 빌리는 업을 하는 사람이 없기에' 시장에 경쟁자가 없음을 확인하였고 '그 집이 팔릴 동안에 임시로 들어있으라는 것이어서 (소비자에게) 그 불편이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수요가 존재함을 직감하였다. 또한, 건축비 상승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로 주택 매매 가격은 한계가 있고 시장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주택 매매 시장 위축은 당연했다.

이에 더해 전시 상황이어서, 부동산 시장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했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주택 매매 사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조직적 집세를 놓는' 즉,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이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의 자질은?

부동산에서의 수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부동산을 싸게 사거나 건설해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얻는 자본 수입(Capital Gain)과 부동산 매입 혹은 건설 후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료 받는 임대 수입(Income Gain) 이다.

부동산 상승기에는 자본 수입으로 큰 이익을 벌 수 있고 또 소유 후 임대를 통해서도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빠진다면, 자본 수입을 통한 이익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임대 수입을 통해서 나름의 수입은 가져갈 수 있다.

만약 부동산 디벨로퍼들이 분양을 통한 자본 수입만 노린다면, 그는 부를 축적할 수는 있어도 국가를 대표하는 부를 축적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부동산이 비록 한 방을 노리는 사업이기는 하나, 진정한 한 방은 싼값의 매물을 사서 가치를 끌어올린 후 10배, 20배에 파는 것이다. 즉, 준공과 동시에 건물을 팔아 단기간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준공 이후 해당 지역과 건물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한 후 판매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다.

한국의 대형 개발 사업을 홍보하는 선전성 기사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표어 중 하나가 '한국형 롯폰기 힐을 건설하겠습니다'이다. 롯폰기 힐은 일본의 대형 디벨로퍼인 모리빌에서 건설한 복합 개발 프로젝트(아파트, 오피스, 쇼핑몰과 문화 시설 등)다. 그리고 모리빌은 모리 미노루 회장(2012년 작고)이 부친과 함께 작은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사업을 일궈 일본 최대의 디벨로퍼로 성장한 회사다.

한 때 모리 미노루는 일본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만약 그가 건물 준공과 동시에 건물을 팔아버렸다면 그는 일본 최고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주요한 전략은 일부 건물은 팔더라도 일부는 임대를 주면서 관리하고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즉, 자본수입과 임대수입을 모두 고려하는 전략으로 한 때 일본 최고 갑부로 등극했다. (<도시 개발, 길을 잃다>(김경민 지음, 시공사 펴냄))

따라서 제대로 된 디벨로퍼는 자본 수입과 더불어 임대 수입을 고민해야 한다.

2015년,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부터 7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정부의 정책 인센티브로 판을 깔아준 후에 대한민국 민간 건설 회사들(이들은 디벨로퍼가 아니다)은 민간 주택 임대 사업에 참여했다.

1939년, 정세권의 건양사는 사회 경제적 흐름을 간파하고 민간 주택 임대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자본 수입과 임대 수입을 이해한 진정한 디벨로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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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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