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920년대 개발은 공간적으로 사대문 내부 특히 청계천 이북(북촌 지역)에 집중된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4대문 외곽 지역(창신동, 서대문, 성북동 등)을 개발하였는데, 경성 외곽은 일종의 교외 지역 뉴타운/신도시 개발로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사대문 내의 빈 공간을 개발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1940년대 이후의 개발은 왕십리 지역에 집중된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이 도시 계획사 측면에서 중요한 이유는 일본 강점기의 일제 개발 정책에 대한 정세권의 대처 방법/전략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선 연재에서 설명하였다시피, 일제는 일본인의 경성 이주를 원활히 하기 위해 2가지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 전략은 일본인 주거주 지역인 청계천 남쪽 지역을 넘어서 조선인 공간인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에 일본인 거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일종의 도시 미화 운동을 벌이면서 시가지를 예쁘게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두 번째 전략은 기 형성된 주거 지역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농지와 같은 공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뉴타운/신도시 개발 전략이었다. 첫 번째 전략이 192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면 두 번째 전략은 여러 논의 과정을 거쳐 1930년대 이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전략은 기 형성된 주거 지역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농지와 같은 공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뉴타운/신도시 개발 전략이었다. 첫 번째 전략이 192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면 두 번째 전략은 여러 논의 과정을 거쳐 1930년대 이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정세권의 도시 계획/개발에 대한 인식은 일본인의 청계천 이북 북촌 진출을 막는 것이었다.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는 그의 인식은 한옥 집단 지구 형태로 투영되어, 북촌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한옥들이 처마를 이어가며 어우러진 형태의 대형 개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조선인이 북촌에 거주할 수 있었고, 조선인의 북촌을 그나마 지켜낼 수 있었다.
지속해서 일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뉴타운/신도시 개발 전략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일제의 신도시 개발 전략은 서구의 도시 계획 이론 중 에버에저 하워드의 전원 도시 이론(Green City)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1937년의 대경성중심의 100년 계획이다. 이는 경성의 인구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수원, 인천, 금포, 개성, 의정부, 춘천, 이천, 김양장 등 경성 주변의 8개 도시를 전원 도시(신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경성과 이들 도시는 경성의 남대문과 동대문, 광희문을 포함한 6개 문에서 시작하여 방사형 도로로 연결되고, 각 도시를 잇는 환상형 도로가 8개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매일신보> 1937년 2월 10일, 국토계획의 입장에서 '위성 도시' 건설 입안)
대표적인 예가 1937년의 대경성중심의 100년 계획이다. 이는 경성의 인구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수원, 인천, 금포, 개성, 의정부, 춘천, 이천, 김양장 등 경성 주변의 8개 도시를 전원 도시(신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경성과 이들 도시는 경성의 남대문과 동대문, 광희문을 포함한 6개 문에서 시작하여 방사형 도로로 연결되고, 각 도시를 잇는 환상형 도로가 8개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매일신보> 1937년 2월 10일, 국토계획의 입장에서 '위성 도시' 건설 입안)
이는 비록 계획 차원의 비전이었으나, 작은 스케일에서는 이를 차용한 개발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는 서양식 주택들을 집단적으로 개발한 문화 주택 단지를 이미 이곳저곳에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 문화 주택 단지는 그들의 기반인 남대문 일대에서 용산을 거쳐 영등포와 흑석동으로 나가는 축선상에 많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이 눈에 띄는데, 광희문 외곽 왕십리 지역이다.
정세권의 입장에서 경성의 개발 판세를 복기해보자. 종로 이북 북촌 지역에는 정세권을 위시한 많은 조선인 한옥 집단 지구 디벨로퍼들이 활동하면서 한옥들을 촘촘히 세운 형국이다. 그리고 남대문은 이미 일본인들에 선점되어 있었고, 일제는 이미 남대문을 지나 후암동을 거쳐 용산 그리고 현재 중앙대학교 인근의 흑석동까지의 축 개발 구상을 세웠고 실제 개발이 대단위로 행해졌다.
제 아무리 조선인 갑부여도 해당 지역 부동산 개발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북쪽은 지형적 조건이 맞지 않았고, 그의 관심권에 포착된 지역은 서대문과 동대문, 혜화문(성북동 일대), 그리고 광희문 외곽 왕십리 지역이었다. 정세권은 이 지역 일대를 실제로 개발하였는데, 동대문 일대는 과거 귀족층 주거 지역과 조선의 빈민층이 혼재한 지역이었고, 성북동과 서대문 지역은 조선인과 다른 민족들이 혼재한 성격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광희문 외곽 왕십리 일대 개발은 성격과 의미가 남다르다. 정세권과 일제(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정면으로 부닥친 곳이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경성제국대학을 딸들은 이화여대를 다닐 정도의 수재였다. 그 중에서도 둘째 아들은 매우 특출 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0년대 초 경성제국대학 농과대학에 합격하였는데, 정세권은 이를 매우 기뻐하여 아들의 미래를 위하여 농장을 개발할 요량으로 뚝섬 일대 몇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당시 서울농대(경성제국대학 농과대학)는 정말로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조선에 변변한 산업이 없으니까, 농업이 중요했죠. 그래서 농과대학에는 주로 일본인들을 뽑지 한국인들을 뽑지 않았어요. 둘째 오빠는 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에서 전체 1, 2등을 하는 수재였어요. 너무 뛰어나서 조선인이지만 안 뽑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고, 그 오빠의 미래를 위해 농장 자리로 뚝섬 일대를 많이 사셨죠." (막내 따님 정정식 님 인터뷰, 2015년 10월 4일)
그리고 그는 뚝섬으로부터 현재의 왕십리 방향으로 토지가 나오면 매입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 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지원하면서 일제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른 상태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가족들은 매우 불안해하며 지켜봤다.
"우리 아버님이 갑자기 땅을 사시기 시작하셨어요. 건축을 하면서, 당시 잠화정(뚝섬) 부근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보고 산보를 가라고 해서, 거기까지 걸어가기도 했었죠. 그 언덕에 있는 땅을 전부 다 사기 시작하면서 농사를 지었어요. 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동척(동양척신주식회사)에서 시내에서 왕십리까지 그리고 뚝섬 방향으로 땅을 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하고 경쟁이 붙었죠.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은 일본놈을 못 들어오게 하려고 막은 거고. 일본은 우리 아버님이 점령을 하니까 그걸 막으려고 또 들어오고." (둘째 따님 고(故) 정남식 님 인터뷰, 2013년 9월 1일)
뚝섬 인근 지역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는,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땅 소작농은 빚을 지고 쫓겨난다는 기사 내용이다.
"왕십리와는 다르나 교통상 연결이 되어있는 뚝섬으로 나가보자. 여기는 동대문에서 동뚝섬까지 가는 기동차가 있어 교통이 편해졌다. 뚝섬을 건너서면 채소밭이 전면에 널리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섬이라 토질도 채소 재배에 좋으려니와 경성 근교로서는 채소 재배가 다른 농사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 과거에 물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그 위상을 찾아볼 수 없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뚝섬을 떠나고 지금은 소작인만 남은 빈촌이 되었다. (…) 토지 소유 관계를 보면, 면내의 전답 면적 중 동양척식회사 땅이 절반이나 되고 그 외에도 다른 지역 거주 지주의 땅이 많아 이곳 주민들은 소작농을 한다. 그런데 동척 땅을 소작하게 되면 소작 계약은 (…) 조건이 박하기 짝이 없어 빚에 쫓기는 살림을 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일보> 1931년 10월 6일,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 (7), 신작로 이외에는 보잘 것 없는 왕십리)
이 왕십리 토지 전쟁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다만, 당시 많은 사람이 왕십리 지역의 가치에 대해서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경성 근교에 있는 빈민들이 몰려 사는 동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세권의 왕십리에 대한 견해는 일반인과 달랐다.
"신당리 쪽은 말도 못할 만큼 초라한 오막살이 촌락이 널려 있는데, 몇 걸음 더 나아가 왕십리 쪽으로 나가면 역시 신당리와 대동소이한 초가집뿐이다. (…) 왕십리가 일천사백호 상왕십리가 일천일백오십호나 된다고는 하나, 아주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을 뿐이다. (…) 길만 신수 좋게 뚫려 있을 뿐이고 부근에는 시내에서 밀려 나오는 소시민의 집이나 늘어갈 뿐이다." (<조선일보> 1931년 10월 6일,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 (7), 신작로 이외에는 보잘 것 없는 왕십리)
1930년대 정세권은 왕십리 일대 대량의 토지를 매입하고 실제 개발은 1940년대 이후 (해방 이후)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이후, 태평양 전쟁의 양상이 심각하게 돌아가면서 전쟁의 와중, 주택 개발은 거의 중단되었고, 일제 압력으로 정세권은 개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십리 일대 토지를 보유한 채 개발은 보류한 형국이었다.
1930년대 정세권의 왕십리 토지 매입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었고, 이는 그의 혜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이후, 신문지상에는 경성 개발에 대한 일제의 논의가 종종 발표되곤 하였고, 미래의 대경성 개발 계획에 대한 큰 그림을 그가 이해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경성 도시 계획에 영향을 준 에버에져 하워드의 이론의 핵심은 전원 도시와 사회 도시 이론이다. 전원 도시는 교외 지역의 뉴타운/신도시로 이해할 수 있고, 사회 도시는 여러 뉴타운/신도시들이 연합한 일종의 대도시권으로 볼 수 있는데, 여러 뉴타운들은 철도나 고속도로 등으로 연결되는 형태를 갖춘다.(Ebenezer Howard, [Garden Cities of To-morrow], 1902)
실제로 일제의 뉴타운/개발 계획에 맞춰 남대문 외곽의 후암동 일대에 거대한 문화 주택 단지를 개발하였고, 왕십리 일대와 보문동 일대에 새로운 뉴타운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총독부 고시 제722호, 1936) 이는 하워드의 전원 도시 계획 이론에 입각하여, 후암동, 왕십리, 보문동 일대를 뉴타운으로 개발하고 이들 지역을 교통망으로 연결하는 계획이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경성권 조선인들의 소재지는 경성 사대문 안과 일부 외곽 지역에 머문 채, 일본인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의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는 후암동/용산과 왕십리를 연결하는 도로망, 즉 남산 주회 도로다. 일제의 도시 계획은 식민 도시의 측면에서 식민 계층인 일본인을 위한 계획이었지, 피식민 계층인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왕십리가 조선인들 타운이었다면, 일제는 굳이 남대문 외곽 지역(후암동/용산지역)과 왕십리를 연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제의 큰 계획 하에서 남산 주회 도로가 건설되는 것이었고, 이는 일본인 주거지들을 연결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경성권 조선인들의 소재지는 경성 사대문 안과 일부 외곽 지역에 머문 채, 일본인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의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는 후암동/용산과 왕십리를 연결하는 도로망, 즉 남산 주회 도로다. 일제의 도시 계획은 식민 도시의 측면에서 식민 계층인 일본인을 위한 계획이었지, 피식민 계층인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왕십리가 조선인들 타운이었다면, 일제는 굳이 남대문 외곽 지역(후암동/용산지역)과 왕십리를 연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제의 큰 계획 하에서 남산 주회 도로가 건설되는 것이었고, 이는 일본인 주거지들을 연결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왕십리 일대 토지를 대량 매입하였다면, 1940년대 왕십리 일대는 남대문 외곽 일본인 주거지의 연장선에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세권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의 왕십리 토지 전쟁은 도시계획/개발사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일제의 도시 계획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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