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23시 08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은 효율적으로 기금 운용을 하고 있나?
[기고] 국민에 '더 부담하라' 하기 전에...
지난주 중반, 2017년 국민연금 수익률이 저조하고 연금고갈시기가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기사가 난 후, 주 후반부터 해결방안으로 연금보험료 인상과 연금개시시기 연기안이 신문지상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논의 전개에 수긍하기 어렵다. 국민들이 자신의 연금을 국민연금에 지불하면 국민연금(정확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은 기금을 운영하
김경민 서울대학교 교수
나는 왜 조선 최초 '디벨로퍼'에 주목했는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춘원 이광수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만약 그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세권 선생은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을지 모른다. 정세권 선생의 셋째 따님 정몽화에 따르면,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정세권의 자서전을 집필하려 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고 이광수가 한국에 있었다면, 정세권 이야기는
"통일된 말 있어도 글 없으면 문화 민족 아니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감격의 큰사전
1957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하여 정세권은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이라는 글을 한글誌(한글학회 펴냄)에 실으면서 본인의 참여 동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큰 사전 완성하는) 날을 당하여 지난 일을 돌아보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삼십 년 전 어느 날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석상에서 한 선생님을 맞이하여 그 포부를 물어보았더니 그 선생이 말씀하
건축왕, 고문도 모자라 3만5000평 서울 땅 빼앗겨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에 이어 재산마저 강탈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내선일체을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였고 학교 안에서의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1935년 자체 회관을 갖추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어학회는 눈엣 가시였다.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같이 화동 129번지 학회사무실에 출입하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건축왕, 조선어학회에 발 담그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고루 이극로와의 인연
정세권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지식층을 많이 아꼈다. 가족들은 특히 이광수와 이극로를 기억한다. "이광수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 소유) 북촌 한옥에 머무르게 하셨어요. 이극로 선생을 무어라 불렀는지 아세요? 고무신 박사예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어요. 아버지가 너무 아낀 분이었어요….
그가 손을 떼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몰락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성공과 위기의 건축왕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이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제의 방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최태영 박사의 물산 장려 운동 강연에 대한 회고다.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하는 날이면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사상범을 감찰하는 일본인 미와(三輪) 형사가 연단에 버티고 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칼자루를 잡았다 놨다, 연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연설 내용을 감시했다
"낙원동 300번지 부순다고 사진 찍으라니…"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사라진 조선물산장려운동 총본산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정세권 선생 가족들의 추억은 남다르다. 정세권 선생 가족들과 수차례에 걸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생생히 들었던 부분은 낙원동 거주 시기의 기억이었다. "1920년대 당시에는 계단이 있는 집이 귀해서 낙원동 300번지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와서 층층다리를 오르내렸다.
100년 전 서울에 옥상 정원이 있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관, 북촌 상권에 충격을 주다
조선 산업전(産業戰)의 진영(陣營)으로 여겼던 물산장려회관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전시하여 생산열과 구매욕을 촉발하려 하였고(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3~134쪽), 이의 일환으로 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염매시는 대중으로부터 선풍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시의 기사다.
만해 한용운, 건축왕에게 감사하라 한 이유는?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설하다
1928년 1월 19일 동아일보에는 "조산 물산 장려 운동 경성지회 설립"이라는 작은 기사가 실렸다. 지난 1월 16일 오후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경성지회를 설립하면서 새로이 15명의 이사를 선임한다는 내용이었다.비록 작은 기사로 소개되었으나, 그날의 모임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황금기의 도래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새로 선임된 이사진에는 정세권을 비롯한
부동산 디벨로퍼가 독립운동에 돈 댄 까닭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든 정세권
1920년대 초반, 조선의 상공업은 불황과 불경기, 일본인 기업위주의 일제 산업정책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83쪽)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후반에서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1920년대 조선의 암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최태영 교수(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초대원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