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산업전(産業戰)의 진영(陣營)으로 여겼던 물산장려회관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전시하여 생산열과 구매욕을 촉발하려 하였고(<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3~134쪽), 이의 일환으로 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염매시는 대중으로부터 선풍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시의 기사다.
"조선물산장려회 주최로 우리 물산 애용을 장려하기 위하여 금월 4일부터 열린 조선물산염매시는 개시한 이래 2주일 동안 예상 이상의 성황으로써 한산한 북촌 상가에 큰 충동을 주었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동염매시의 계획은 일주일마다 새로운 물산을 출품하길 하였는데 미곡, 직물, 고무신, 비누, 화장품 등 일상 수요품은 수요자가 날로 증가함으로 부득이 계속 출품키로 되었는바, (…) 물품추인에 대한 일체 책임은 염매시 간사 정세권 씨가 지기로 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염매시 성황 수요자가 날로 격증", <동아일보> 1931년 11월 20일)
조선의 소상공인들에게 왜 염매시가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또 다른 기사다.
"염매시는 일반 백화점과는 그 성질이 달라서 순전히 조선 물산만을 취급하는 관계로 조금이나 뜻이 있는 고객은 반드시 찾아오는 까닭에 출품자로서는 그 선전의 목적을 달할 수 있다. 지방으로부터 출품하는 우리물산생산업자도 점차 증가 중인데 동 염매시 간사 정세권 씨는 동 염매시 발전책에 대하여 더욱 노력 중으로 지방에 있는 우리 물산 생산업자 중에 아직 출품치 못한 사람을 속히 동 염매시 사무소로 신입하기를 바란다 한다." ("조선물산장려회 제4회 염매시, 각지에서 출품 답지", <동아일보> 1931년 11월 29일)
위의 두 기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조선물산장려회관의 설립은 물산장려회의 선전 및 판매 활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일종의 허브였다. 다양한 상공업자들이 상품을 진열할 수 있는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고, 이를 정세권의 건양사가 도맡았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회관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을 모았고 진열관에서 전시·판매하였다. 즉,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정세권이 구축한 것이다. 당연히 정세권의 건양사는 전사 차원에서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김용기, 문용규와 함께 건양사를 설립하였다. (…) 정세권은 1920년대 건양사가 큰 이윤을 올리며 주주 90여 명, 자본금 20만 원의 기업으로 성장하자 이를 배경으로 물산 장려 운동에 본격 가담하였고, (건양사의 공동 설립자) 김용기가 신간회 회계 재정부장을 지낼 때 신간회 경성지회 재정부원으로 동참하였다. 건양사 경영진 모두 물산장려회 지원에 적극적이어서 김용기는 물산장려회 명예회원 및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115쪽)
정세권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건양사와는 별개의 회사, '장산사'를 설립하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전담시킨다.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의 하나인 <장산>은 장산사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정세권이 설립한 '장산사'와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장산>이 동일한 명칭이라는 점은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다. 장산사는 생산업자가 진열관에 출품하지 않은 상품들 중 좋은 물건을 선별하여 위탁판매를 하거나 구입·판매하면서 품목을 다양화시켰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 135쪽)
앞선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조선물산장려회관은 기부금으로 건립하려 하였으나 기부금이 걷히지 않은 관계로 정세권의 사비로 완공되었다. 그렇기에 본인 소유의 건물이 되었고 건양사는 전사적인 차원에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선물산장려회 전무이사로서 그리고 건양사의 사주로서 정세권은 두 조직을 본인의 건물인 조선물산장려회관에 입지시킨다. 거대 기업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본인이 후원하는 기관의 실질적 운영자로서 한 건물에 여러 조직들을 입지시키는 것은 조직 운영과 관리상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낙원동 300번지, 경성 최초 그리고 최대 부동산 개발 업체의 사무실과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이 위치하였던 곳이다. 낙원동 300번지에는 당시 경성에 가장 높은 건물일 수 있다.
4층 높이의 건물의 1층은 조선물산장려회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3분의 2 그리고 건양사가 3분의 1을 사용하였다. 2층은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실과 물품 전시관으로 사용되었고 3층은 정세권의 가족이 기거하였다. (<구름라 바람 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44쪽)
낙원동 300번지 건물에 대한 유가족의 기억은 선명하다.
"4층짜리 건물 입구에는 아버님 개인 회사인 '건양사' 간판과 '조선물산장려회'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둘째 따님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연관은 되지 않으나 건축 또는 조경사적 의미가 있을지 모른 점은 해당 건물의 4층은 옥상정원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20일 오후 4시 반에 낙원동 300번지에서 동회관 신축 기공식을 개최하였었는데 동회 이사장 이종린 씨의 식사와 정세권 씨의 설계보고가 있었고 내빈 측의 축사가 있었다는데 건평 28평 4층 건축으로 아래층은 동회 사무실로 제2층은 진열관 제3층은 일반의 식당 제4층은 옥상 정원으로 사용할 터이라 하며 늦어도 7월 15일까지는 낙성식을 하리라 한다." ("물산장려회관 7월 중순까지 준성", <매일신보>, 1931년 4월 22일)
옥상 정원이라는 개념이 대한민국에서 나름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불과 근래의 일이다. 100년 전 낙원동 300번지 조선물산장려회 총본산의 건물 설계에는 시대를 앞선 기획이 들어 있었다.
아래 사진은 4층 옥상 정원에서 찍은 정세권의 가족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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