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반, 조선의 상공업은 불황과 불경기, 일본인 기업위주의 일제 산업정책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83쪽)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후반에서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1920년대 조선의 암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최태영 교수(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초대원장)의 회고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YMCA 강당에서 내리 3년을 (물산 장려 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강연을 했다. 일제가 일본 상품만을 한국인들한테 강매하면서 한국인에게는 조그마한 제조업도 금했던 때였고 공업학교도 절대 허가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그 때 일본 상품에 세금을 매길 수 없었기에 조선 물산을 장려해야 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우리나라 것을 만들어먹자, 우리가 만든 물건만 사자, 우리 상품을 애용하자, 옷도 일본인이 만든 양복을 입을 수밖에 없다면, (하다못해) 우리가 만든 옷감이라도 쓰자고 할 만큼 연설 내용이 절실했습니다. 하다못해 가공이라도 우리가 한 것을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제144호), 2005년, 8쪽)
당시 조선의 상공업이 극도로 위축되었기에, 조선산 완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면 원자재라도 조선산인 물건을 사서 쓰고, 심지어는 가공이라도 조선에서 한 것을 사용하자고 호소할 정도로 조선의 공업은 피폐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시대적 상황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시작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 조만식 선생의 지도에 평양에서 시작되었으며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들불같이 일었던 이 운동은 불과 반년 뒤인 1923년 여름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되더니, 1924년 4월 30일 개최된 제2 정기 총회를 분기로 완전한 침체기로 빠져든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 81~84쪽)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였던 한국일보 논설위원 유광렬의 기록이다.
"1923년 창립할 때에는 전국적으로 성세가 높던 이 운동은 그 후 대체로 침체한 상태였다. 한때는 학생이 (조선산) 수목교복을 입은 때도 있었고, 기생들마저도 수목을 입는 이가 있었으나 이것은 소수요, 대다수의 열정은 식어가는 듯 보였다." (유광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전모 : 민족운동사 측면사', <인물계>(1권 2호), 1964년)
조선물산장려회가 급격하게 세가 위축된 것에 대해,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일제의 훼방과 공산주의 계열의 반대를 이유로 들었다.
"조선 민족의 국산품 장려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제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집단 활동을 탄압하였다. (…)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격심해지면서 아울러 이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청년들의 비판과 공격이 격심해졌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자 나모 씨는 과격파의 교조성을 비판하고 민족 자본의 육성 없이는 경제적 민주 독립과 노동계급의 건전한 성장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과격파들은 유산 계급에만 귀속되는 것이라고 집중 공격을 계속하여 광범위한 소비자 대중 국민을 이 운동에서 이탈시켰다. 일제 탄압과 마르크스 과격파의 양면협공을 받게 되자 의욕을 상실하여 더 이상 적극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24년부터는 무기력한 체념에 빠져 겨우 간판만을 지키고 있다." (<재발굴 한국 독립운동사>(신용하 지음, 한국일보사 펴냄, 1989년), 75쪽)
조선물산장려회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하였던 초기(1923~1924년), 민족주의 계열 명망가 주도하면서 일부 상공업자들을 가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중기(1925~1929년) 그리고 상공업자들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부흥기(1929~1932년), 마지막으로 상공업자들이 조직에서 이탈하자 시작된 쇠퇴기(1933~1937년)이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 77쪽)
아주 짧았던 초창기를 거쳐, 중기인 1924년 이후, 조선물산장려회는 과연 제대로 된 조직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침체에 들어간다. 1924년 4월의 제2회 정기 총회 이후, 실무와 재정을 담당하는 이사회는 거의 열리지 못하였고, 극도의 재정난 속에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하여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간간이 기관지를 만들어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원고난과 검열난, 인쇄난이 겹치면서 이마저도 힘든 상황에 봉착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침체 상황을 보여주는 다른 예는 조선물산진열관 건설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 물산을 진열할 수 있는 조선물산진열관 건설을 추진하였다. 1928년 8월 조선물산진열관을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고 창립비 1000원을 마련하자고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2쪽)
과연 조직 운영을 위한 이사회가 열린다고 한들, 사무실 임대료도 지급 못하는 조직이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로 재정 형편이 열악한 조직이 전국적 차원의 운동을 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에 지회가 설립된 대단한 조직이었다. 그렇다면 이 조직의 재정적 지원은 매우 탄탄하여야 한다. 그런데 1929년 이전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벅찬 패망 일보 직전의 조직이었다.
사무실 임대료로 내지 못하는 쓰러져가는 조직에 임대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재력을 활용하여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립하고 1층에 상품 판매소와 2층에 상품 진열소(일종의 디스플레이 쇼룸)를 갖추게 한 이가 있으니, 정세권이다.
사업가가 기부할 때 가장 눈여겨 보는 것 중 하나는 기부받는 조직의 안정성이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조직이어야 기부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멸렬한 형편의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정세권의 재정 지원은 어쩌면 상식 밖의 일일 수 있다. 더군다나 그는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는 디벨로퍼이지, 조선물산장려회가 근본적으로 양성하고자 하는 계층인 상공인 계층도 아니었다.
또, 앞서 이야기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조선의 상공업은 아주 작은 규모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일부 자본을 축적한 기업이 있었다 한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조선계 상공업의 대다수는 그야말로 소상인이요 소공인이었다. 따라서 정세권과 같은 대형 디벨로퍼에게 조선의 상공업이라는 영역은 본인 사업에 전혀 보탬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상관도 없는 영역이었고 그리고 그가 돌보고자 하는 조선물산장려회는 일부 명망가들 위주로 돌아가는 간판뿐인 조직이었다.
정세권의 참여는 일제 식민치하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시작된다. 일제가 시장 식민 정책을 통해 조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상황을 우려하였고, 일제는 조선인 회사들에 대한 강도 높은 감시를 실시하고 있었다.
1929년 당시에 대한 정세권의 회고다.
"1929년 일본은 우리 배달 민족을 자국의 대화(大和) 민족에 동화하려고 식민 식민(植民植民), 기지 식민(基地植民), 문화 식민, 원료 식민, 시장(市場) 식민, 모두 다섯 종류의 식민 정책을 강행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정책을 강행하는 시기이므로 경찰에서는 형사진을 두어서 회사마다 모임을 담당하는 형사가 있었다."
정세권을 위시한 상공업자들의 가세는 조선물산장려회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명망가 위주의 조직에 새로운 계층의 수혈은 조직 재활성화의 새로운 모멘텀이었다. 정세권 평생의 동지로 1925년부터 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해온 민세 안재홍(당시, <조선일보> 주필)은 당시 물산장려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새로운 돌파구를 상공업자들이 주도하는 실용적 노선의 가미에서 찾았다.
"물산 장려 운동이 초기에는 식자층에 의하여 관념적인 운동으로 그 초기 과정을 지내왔었다. (현재는)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했을 조선인 상공업자들과 결합이 이루어져 그 일단의 진전을 보려하고 있다. 이는 필연이요. 또 당연한 일이다." (안재홍, '물산장려회의 일진전 – 그 회관 건축의 실현을 보고', <장산>(2권2호), 1932년, 2쪽)
정세권의 참여로 인하여 조선물산장려회는 이전의 재정 문제를 해소하기 시작하며, 도약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던 조선물산장려회가 1927년부터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요인의 하나로 이사진이 개편되면서 새로 상무이사로 참여한 건축가 정세권이 적극적 재정 지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에도 회관을 지어 기증한 인물로서 조선물산장려회에도 회관을 신축하여 기증했으며, 새 기관지의 조선물산장려회보의 발행비용도 모두 부담하였다."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 75쪽)
정세권은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취임하면서, 물산장려회의 재정 문제를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1929년부터 3년간 조선물산장려회 경상비와 기관지 발행 비용 등 재정의 상당 부분을 짊어졌고, 1930년부터는 전임상무로서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반을 총괄하기 시작한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 113~115쪽)
1923년 기세를 올리던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불과 1년 만에 대침체기에 빠진 상황에서, 1920년대 후반 정세권의 지원과 실질적인 참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황금기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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