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지식층을 많이 아꼈다. 가족들은 특히 이광수와 이극로를 기억한다.
"이광수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 소유) 북촌 한옥에 머무르게 하셨어요. 이극로 선생을 무어라 불렀는지 아세요? 고무신 박사예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어요. 아버지가 너무 아낀 분이었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이광수는 비록 친일을 하긴 하였으나, 인간적으로 기농 정세권과 인연을 이어갔다.
"이광수 선생님이 오빠들(정세권 선생의 아들) 중매를 서주신다고 했는데, 모두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었나봐요. 그래서 저와 동생(정몽화)의 중매를 서주셨죠. 부인되시는 허영숙 선생님 병원에도 자주 갔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하지만, 민족운동 관점에서 정세권(1888년생)은 비슷한 연배인 민세 안재홍(1891년생)과 고루 이극로(1893년생)와 고락을 함께 한다. 안재홍과 정세권은 초기부터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함께 하였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였다. 1929년 귀국한 이극로는 이후 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조선어학회에 투신한다. 이극로의 적극적 활동에 동감한 안재홍과 정세권 역시 조선어학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며, 이들 모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받는다.
나이가 비슷한 이들의 만남 그리고 이루어진 운동–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볼 때, 이들은 가히 동지적 인연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는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를 유족들이 유독 기억하는 연유다. (추가적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들의 관계는 산업계와 언론계, 학계의 중추적 인물들이 국내에서 목숨 걸고 전개한 민족 독립운동 전선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말을 지키고 간직하는 것이 주목표였기에 일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이윤재와 한징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들 중 혁혁한 노력으로 조선어학회를 이끌고 조선어말사전 편찬에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그 역할이 상대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 고루 이극로다. 이는 그가 해방 정국에서 자진 월북한 것, 그리고 북한에서의 활발한 활동에 연유하지 않았나 싶다. 이극로는 북한 국어 정책과 정치 활동에 관여하여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시 무임소장관에 선임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1967년)과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의장(1964년)을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박용규 지음, 한글학회 펴냄, 2012년), 199쪽)
상해 동지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고루 이극로는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독일에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기간 어학 분야를 공부하였고, 베를린 대학교에서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여 1922년부터 3년간 조선어를 가르쳤다.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 사상과 어문 운동', <한국인물사연구> Vol.5, 한국인물사연구소 펴냄, 2006년, 334쪽) 경제학 박사 출신이 외국 대학에서 조선어를 강의하고 조선어학회를 주도한다는 측면이 일면 엉뚱해 보일 수도 있었기에, 신문 지상에는 "탈선 경제학 박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고루 이극로 씨 탈선 경제학 박사', <조선일보>, 1932년 2월 11일)
당시 그는 독일계 박사이면서 조선어학회를 주도하는 이유로 지성계와 언론계의 주목을 받았고, 원고 청탁과 대담 및 좌담 요청이 쇄도하였다.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 운동', <한국인물사연구> Vol.5, 한국인물사연구소, 2006년, 337쪽) 그의 귀국 자체가 <동아일보> 지면에서 다룰 정도로 그는 귀국과 동시에 재조선 학계 스타로 떠올랐다. ('독일 철학 박사, 이극로 씨 귀국', <동아일보> 1928년 10월 28일)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그해 3월부터 조선어 연구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선인을 위한 조선어사전이 없었기에, 조선어사전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 및 상무위원을 맡으며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쪽) 그는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를 개명하고 초대 간사장(1931~32년), 2대~6대(1932~37년) 간사, 7대 간사장을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195쪽)
조선어학회 후신인 한글학회의 표현을 빌자면 "이극로는 한글 운동의 기획자로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사업(1933년)과 표준어 사정 작업(1936년)에 민족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유도하였고 (…) 조선어학회는 이극로를 중심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5쪽)
그는 조선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한글 운동에 매진하였다. 1930년대 말 조선어학회의 재정난이 타개되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회원들은 취직을 하고 여가에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극로만은 사전 편찬실을 지켜나갔다.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제안하였음에도 그는 이를 거절하며 사전 편찬 작업에 골몰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8쪽)
이극로의 활약상에 대한 외솔 최현배의 증언이다.
“(이극로 선생은)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어려움을 극복하였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198쪽)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행된 최초의 피의자인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의 평가다.
"고루 이극로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한글 운동의 제1인자이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202쪽)
"조선어학회 대표는 고루 스승이었고, 학회의 모든 운영은 오로지 고루 스승이 이끌어 갔다. 한 예로 학회 운영비가 떨어지면 이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다가 돌아와 '129,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라고 길게 한숨을 내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201쪽)
129는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었던 종로구 화동 129번지를 뜻한다. 조선어학회를 129로 부를만큼 고루 이극로에게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었고, 129 설립에 전력을 다한 정세권에 대해 그는 매우 고마워하였다.
이극로의 글이다.
"조선어학회의 발전. 이제 조선어학회라 하면, 해내 해외를 불론하고 조선말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로 뚜렷하게 알리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 학술단체가 어떻게 (성장)되어 왔나를 간단히 적으려 한다. (…) 그러다가 이제로 육년전에 비로소 서울 수표정 42번지 조선교육협회 집안에서 방 한칸을 얻어가지고 곁방살이로 문패를 붙이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는 사전 편찬, 잡지 간행, 철자법 통일안 작성 이 밖에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장산사 사장 정세권 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양옥 한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7월 11날에 이 집으로 회관을 옮기게 되었다. 조선어학회가 딴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가 된 것은 창립 이후 이번이 처음 일이다. 이 학술단체가 독립된 호주가 되도록 성장한 것은 오직 조선어학회 회원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과학적 사업에 대한 조선 사회의 많은 동정이 있은 까닭이다.
끝으로 우리 조선어학회는 조선 사회에 대하여 특별히 정세권 씨에 대하여 감사함을 마지 아니하는 동시에, 우리는 적은 힘이나마 더욱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힘쓰려 한다." (이극로, '조선어학회의 발전', <한글> 제25호, 한글학회, 1935년, 339쪽)
짧은 글에서 그는 두 번에 걸쳐서 정세권의 호의에 감사하였다. 당시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월급이 21원이었다 한다. 정세권은 토지 매입비 및 건설비 4000원을 들여 회관을 완성하였다하니, 200여 명 월급 분량을 내놓은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02쪽)
그가 이렇듯 정세권에게 거듭 감사함을 표명한 것에는 그의 종국적 목표에 연관되어 있다. 이극로는 회관을 단순히 조선어학회 활동 기지로 여기지 않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을 갖고 있었다.
이극로는 대학을 신사를 양성하는 양사원으로 인식하였고, 그는 이런 기관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투사와 독립 이후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삼고 싶어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37쪽)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답으로 "가난한 학자와 기술자에게 먹고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하였다.(이극로, '명사 만문만답', <조광>, 1939년 3월호, 167, 170쪽) 그래서 그는 실질적인 공간(화동 129번지)을 확보한 후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비를 얻어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고자 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38쪽) 아쉽게도 재단을 설립하려는 계획과 양사원 설립 계획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정세권의 조선어학회 참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활동 중 이극로를 만나면서 시작되었고, 출판업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이극로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의 최종 목표는 조선어 사전 '큰 사전'의 출판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방언 등을 표준화시키는 표준화 작업과 한글 맞춤법 통일 등이 선결과제였다. 그런데 한글 맞춤법 통일에 있어서 조선어학연구회와 조선어학회는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극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언론계와 학계 및 출판계 주요 인사 70인의 동의를 얻어 이를 돌파한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46~67쪽)
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장산> 그리고 이후 <실생활> 잡지의 발행인으로 출판계 거물이기도 한 정세권은 이극로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어학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재정적 기여를 한다. 종로구 화동 129번지의 조선어학회를 건립하여 기증하였고, 조선기념도서출판관 5인 이사의 일인으로 활약하였고, 다양한 활동에 재정 기부를 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133~134쪽)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어학회 참여자들의 면면과 활동을 고려할 때, 조선어학회 회관 설립 비용 및 각종 활동 지원 행위는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진배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조선어학회 건물 기증,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이사 재직과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 후원)의 대가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한 모진 고문과 재산 강탈이었다. 이는 다음 연재에서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