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2일 2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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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문명의 위기' 앞에서 '적응주의'를 생각한다
[김기협의 퇴각일기] 열한 번째 이야기
영국의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근황을 적어 보내다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Retreat Diary'라고 했다. 쓰면서 생각하니 '퇴각일기'보다 '피정일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퇴각(退却)'에 '피정(避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상생활의 틀을 벗어나 마음을 다듬는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피정
김기협 역사학자
제주살이 10년
[김기협의 퇴각일기] 열 번째 이야기
1990년 여름 교수직을 떠난 뒤, 얼마 동안 프랑스에서 자료 조사를 하고 돌아온 후 제주도에 자리 잡았다. 몇 가지 이유가 어울려 작용했다. 첫째, 자연을 가까이하며 살고 싶었다. 그 무렵 유럽에 많이 가서 지내보는 동안 한국의 도시 생활이 너무 자연과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케임브리지 같은 소도시는 말할 것 없고, 파리 같은 대도시의 환경도
'반전유인(盤前有人)'의 바둑 자세
[김기협의 퇴각일기] 아홉 번째 이야기
이번 연길 체류 중 한 가지 일과가 자리 잡았다. 마작(麻雀)이다. 아내와 언니 세 분, 4자매가 별다른 사정 없으면 점심 후에 큰언니댁에 모여 저녁 전까지 판을 벌이는데, 나는 후보 선수다. 주전 선수가 다 있을 때는 4시경에 가서 휴식 원하는 분을 교체해 드린다. 한 분이 사정이 있으면 나도 선발 선수로 뛰는데, 내 일하는 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개장
달만 쳐다보지 말고 손가락도 들여다보라!
[김기협의 퇴각 일기] 여덟 번째 이야기
1969년 내가 사학과로 전과할 때 서울 문리대 사학과가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로 분과되고 있었다. 그 해 신입생은 분과된 각 학과로 지원해 제1회 입학생이 되었는데, 2학년으로 전과한 나는 사학과의 마지막 회에 끼어들었다. 사학과 학생들은 기존 커리큘럼에 따라 학점을 이수하고 국-동-서 중 어느 분야라도 골라 졸업논문을 쓰게 되어 있었다. 분과
40세에 교수직을 떠난 이유
[김기협의 퇴각 일기] 일곱 번째 이야기
내 여권에는 이름이 'Orun Kihyup Kim'으로 되어 있다. 1983년 첫 여권 발급을 신청할 때 정한 이름이다. 두 형이 1970년대 초반에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원래 이름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적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그런데 'Ki Bong Kim'과 'Ki Mok Kim'이 같은 시기에 버클리에서 지내는 동안 이름 때문에 불편을
중국어의 '동세서점(東勢西漸)'?
[김기협의 퇴각일기] 여섯 번째 이야기
작년 봄 중국어를 공부할 마음이 바짝 들었다. 중국사를 전공으로 택한 후 50년 동안 중국어 공부할 생각이 늘 있었지만, 다른 일 제쳐놓고 매달릴 만큼 절박한 마음이 든 적은 없었다.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는 만큼, (중국어에서 번역한 책도 두 권 있다) 회화는 형편 따라 천천히 익혀 나갈 수 있으려니 하는 정도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내가 대학 제도 안
"나는 왜 이렇게 말을 못 할까?"
[김기협의 퇴각일기] 다섯 번째 이야기
몇 주일 전 한 YTN 기자로부터 불쑥 전화가 왔다.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특집을 만드는 데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 나를? 알고 보니, 추기경님에 관한 글을 검색해 본 가운데 내가 예전에 쓴 글에서 흥미로운 시각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추기경 선종 얼마 후 프레시안에 올린 글의 사진 설명이 인상적이었다며 그 설명도 내가 쓴
연변, 아내 고향이 내 고향!
[김기협의 퇴각일기] 네 번째 이야기
'제2의 고향'이란 말을 흔히 하는데, 지금은 '제1의 고향'도 없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나도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 고향은 경상도 영천, 어머니는 충청도 아산에서 출생해 함경도 덕원에서(지금은 강원도 천내) 성장했고, 서울에서 만난 두 분이 서울에서 나를 낳으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 고향을 처음 찾은 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가톨릭교인이 된 사연
[김기협의 퇴각일기] 세 번째 이야기
2년 전, 68세 나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뜻밖의 일로 받아들인다. 나 자신에게도 뜻밖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동양적 취향을 보였고, 전공도 중국사로 하게 되었다. 철든 뒤로는 합리주의에 깊이 물들어 '신앙'이란 것을 갖게 될 것 같지 않았다. 학생 시절 불교를 가까이해서 절 살림에 꽤 익숙해졌지만, '종교'로 받아들일 마음
"제자여, 역모를 꾸며라!"
[김기협의 퇴각일기] 신영복 선생의 글을 번역하며 '사제관계'를 생각하다
'퇴각일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조마우로 군을 제자로 거둔 이야기를 적었다. 적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켕겼다. 남에게 스승 노릇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 노릇이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알기나 하는 건가? 돌이켜 보면, 평생을 통해 이분이 내 '스승'이라고 공언할 만한 당당한 사제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 마음속으로 가르침을 얻으며 '선생님'으로 모셔 온 분은 많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