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 한 YTN 기자로부터 불쑥 전화가 왔다.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특집을 만드는 데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 나를? 알고 보니, 추기경님에 관한 글을 검색해 본 가운데 내가 예전에 쓴 글에서 흥미로운 시각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추기경 선종 얼마 후 <프레시안>에 올린 글의 사진 설명이 인상적이었다며 그 설명도 내가 쓴 것인지 물었다.(☞ 관련 기사 : "김수환 추기경, 그는 과연 변절했는가?")
내가 쓴 것 맞다. 기고문에 곁들일 사진은 편집자가 골라 적당히 설명을 붙이는 것이 관행인데, 그 무렵에는 내가 할 일이 너무 없었던지 골라준 사진을 받아 설명까지 작성해서 보내곤 했다. 사진 설명의 짧은 글에는 고도의 축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도 흥미로운 시도였다. 위의 설명처럼 깔끔하게 뽑힐 때는 각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글까지 뒤져보고 점지했다는 데야 사양할 길이 없어 인터뷰에 응했는데, 며칠 후 방영을 보며 혀를 찼다. "나는 왜 저렇게 말을 못 할까?" 내가 봐도 내 언변은 생각을 전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면에 자막으로 흘린 글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였다.
내 아기 시절에 관한 어머니 말씀 중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두 돌 가깝도록 말 배우는 게 늦어서 살짝 걱정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날 혼자 앉아서 뭔가 옹알거리고 있기에 유심히 들어보니 구구단을 외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주 지어낸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언어보다 숫자에 능한 편이라고 당신 스스로 믿고 싶고 또 내게 그렇게 주입시키고 싶을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유년기의 내가 숫기 없고 말 잘 못하는 데 대한 콤플렉스를 완화시켜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식들이 과학자의 길로 나아가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역사학과 국어학을 업으로 삼은 부모의 길을 자식들에게 권하고 싶은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워낙 확고하셨기 때문에 구구단의 흥겨운 가락 한두 마디 흉내 내는 아기가 마치 수리(數理)에 통달한 것처럼 들리셨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식들을 과학자의 길로 몰아넣으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집요했다. 마치 경주용 말에게 눈가리개를 달아 앞만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았다. 책도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도록 골라서 구해주었고 산수나 자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최고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내게는 반대편 걱정이 시작되신 것 같다. 세뇌 효과가 너무 좋아서. 어떤 색깔을 좋아하느냐 묻는데 '회색'이라고 대답하는 식.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떠오른 생각인데, 임꺽정과의 내 만남도 그 걱정 때문에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니었던지.
초등학교 졸업 무렵 어느 날 벽장 한구석에서 <임꺽정(林巨正)>이란 제목의 책 여섯 권을 찾았다.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많은 시간을 그 책과 함께했다. 내 글쓰기의 바탕은 그때 벽초 선생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의식도 그때의 몰입 속에서 빚어졌다.
1960년대 당시에 그 책은 금서였다. 어머니는 국어학 교수라서 그 책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연구실 아닌 집안 벽장 속에 '보유'하신 것은 고양이 길목에 생선을 놓아둔 격이었다. 활자 찍힌 종이라면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아이가 있는 집구석에 그런 재미있는 책을 놓아두다니! 수십 년 지난 후에 그 진의를 여쭤보니 씩~ 웃으며 "좋을 대로 생각하렴!"
임꺽정에 관한 어머니의 진의를 떠올린 것은 내가 마흔 살 나이가 되어 아버지 일기를 처음 읽을 때였다. 아버지가 당시 아끼던 학생 강신항 선생에게 <임꺽정> 읽을 것을 권한 대목이 있다. 1993년 <역사 앞에서>를 낼 때 강 선생이 붙여 준 추모의 글 '사람답게 사는 길'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우리 말글의 가치를 가장 잘 살려낸 모범으로 아버지는 벽초 선생을 꼽은 것이다.
10년 전 어머니가 계시던 경기도 이천의 요양시설로 강 선생을 모셔 간 일이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를 탈 때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며 "대출도서 반납합니다. 60년 만에" 하는 것이었다. <임꺽정> 여섯 권이 들어있었다. 아버지가 읽기를 권하며 빌려주신 책이라고. 몇 주일 후에 댁으로 가져가 돌려드렸다. 아버지가 제게 남기기보다는 선생님께 남기신 책으로 여긴다고 말씀드렸다.
<임꺽정>을 비롯해 많은 글을 초년에 읽으며 글쓰기를 위한 기초가 닦여 있었지만 교수직에 있던 30대까지는 글쓰기를 그 자체의 의미가 있는 활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편지나 논문처럼 필요에 따라 쓰는 활동의 수단이었고, 크게 막히지 않는 것만 다행스러웠다. 내 편지를 받고 좋아하는 이들이 더러 있고 시국선언문 써달라는 부탁을 가끔 받는 것은 일상의 소소한 보람일 뿐이었다.
40대 들어 대학을 떠난 후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의 권유로 중앙일보사 동서문제연구소에 적을 두게 된 것은 다분히 우연한 일이었는데, 그것이 글쓰기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사에 얹혀 있으니 밥값을 글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역사 이야기를 <월간중앙>에 싣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중앙일보>에 서평 연재도 맡고, '분수대' 집필에도 몇 해 참여했다. 글쓰기의 잠재력이 그곳에서 표출되는 바람에 잠깐 편의상 적을 둔다고 들어간 곳에 10년씩이나 걸치고 지내게 되었다.
2002년 <중앙일보>를 나와 연변으로 떠날 때까지 글쓰기가 직업 비슷하게 되어 있었지만 아직 능동적인 활동에는 이르지 못했다. 책 소개나 시사 논평 등 주어진 단편적 주제에 관한 생각을 토막글로 내놓을 뿐, 길이가 있는 이야기를 내 마음속으로부터 풀어낼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리사는 못 되고 재료나 다듬는 주방보조 수준이었다고 할까.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연변에서 지내며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를 구상하는 동안 글쓰기 준비의 다음 단계가 진행되었다. 내가 공부하고 생각해 온 내용 중에서 세상을 향해 내놓을 이야기의 방향이 대충 잡힌 것이다. 그 방향에 따라 계획을 세워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 <냉전 이후>(서해문집 펴냄) 등 작업을 진행했다.
10년간 많은 양의 글을 써내고 난 뒤 또 한 차례 다음 단계를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가치관을 역사 속의 제 현상에 최대한 정확하게 적용하는 길을 찾는 데 주력했다. 예를 들어 김구나 이승만의 행적을 민족주의나 민주주의 원리를 기준으로 평가할 시각을 잡는 데 작업의 목표를 두었다. 그런데 통용되고 있는 근대적 가치관으로는 근대 이전의 역사를 재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근대의 역사를 살피는 데도 너무 편협한 시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사'를 표방하고 역사를 넓게 살피려 애쓰면서 근대적 가치관의 대안에 관한 생각을 키워온 것이 이제 얼마큼 형체를 갖춘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퇴각'을 생각하게 되었다. 꼭 전황이 불리할 때만 퇴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진격에나 전략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이 웬만큼 달성되면 진격을 멈추고 다음 단계의 목적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무한 진격'이란 목적 없는 진격, 패망만을 목표로 하는 진격이다.
그렇다면 이 '퇴각'이 방향을 바꾼 또 하나의 진격이 되는 것일까? 그런 의미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퇴각’의 의미가 절실한 것은 지금 생각하는 전환이 전략적 전환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한 학인(學人)으로서 완성에 접근하려는 취지다.
종래의 글쓰기가 주어진 이슈들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었다면, 이제부터의 글쓰기는 내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이슈의 제기에 힘쓰고자 한다. 통용되는 가치체계의 정확한 운용보다 그 체계의 한계를 밝히고 다른 체계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정해져 있는 메뉴 상의 요리를 잘 만드는 요리사가 아니라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주방장 자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퇴각의 갈림길에서 글쓰기에 매달려온 인생을 되돌아본다.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는 길이 여러 가지인데, 나는 어째서 글쓰기를 통해서만 세상을 대하게 되었을까?
말을 잘 못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국회의원, 장관만이 아니라 회사원, 사업가, 심지어 대학교수까지도 말 잘하는 것이 맡은 노릇 잘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현대세계의 모든 조직 활동에서 언변은 성공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내가 말을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랑 이야기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데 서로 이해한다고 여겨지는 상대와는 이야기를 곧잘 나눠도, 상대가 서먹하게 느껴질 때는 말이 잘 안 풀린다. 그러니 불특정 다수를 향한 강연은 늘 어렵다. 보이지 않는 시청자를 상대로 하는 방송은 생각만 해도 몸살이 난다.
어렸을 때의 내성적 성격이 겉보기로만 극복되었을 뿐, 본질적 장애는 그대로인 것이다. 내 분수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장애다. 여기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불용지용(不用之用)'의 역설적 가치도 있다. 밖에서 쉽게 쓰이지 못하기 때문에 안으로 착실히 쌓아 나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소통 장애 문제는 내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는 데도 나타난다. 어느 신문 북섹션의 '워스트셀러'(베스트셀러의 조건을 갖춘 것 같은데도 잘 팔리지 않은 책) 기획에 끼어든 책까지 있었다. 당시에는 인세수입 적은 것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출판사에 미안한 마음뿐이다. 많이 팔리지 못하게 쓴 책임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류에 따라 주어진 이슈를 다루는 수동적 글쓰기를 하면서도, 현실 속의 어느 파당에 참여하지 못하고 내면의 공부에만 매달리는 나르시시즘이 시장으로부터 나를 가로막는 울타리였다.
이 울타리가 내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면서 한편으로는 나와 내 생각을 지켜준 보호막이기도 했다. 내 생각을 잘 키워내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시장을 통하지 않고도 그 생각을 퍼뜨리고 살려낼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차츰 커지고 있다. '국민소통 비서관', '수석 대변인'이나 '제자'의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내 생각을 아껴주는 이들이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삼아 실행과 전파에 힘 써주기를 바란다.
퇴각을 생각하면서 <프레시안>에 올리는 글도 뜸해졌다. 단편적인 주제들에 관한 글쓰기가 내키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면서는 종래와 다른 글쓰기의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같은 주제에 관한 이야기라도, 외부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비평하는 시각보다는 그 주제가 내게 일으키는 의미를 성찰하는 주관적 시각으로 옮겨가려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학자'에서 '사상가'로 전업하려는 것이다.
전업을 염두에 두고 지금까지 낸 책을 되돌아볼 때, 앞으로 글쓰기의 방향을 예시하는 것이 두 권 있다.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과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펴냄). 다른 책들처럼 계획된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책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냥 써진' 책들이다. 그런 글이 저절로 더 써지기만을 기다리겠다는 이 게으른 마음이 강태공의 '곧은 낚시'와 통하는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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