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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아내 고향이 내 고향!

[김기협의 퇴각일기] 네 번째 이야기

'제2의 고향'이란 말을 흔히 하는데, 지금은 '제1의 고향'도 없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나도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 고향은 경상도 영천, 어머니는 충청도 아산에서 출생해 함경도 덕원에서(지금은 강원도 천내) 성장했고, 서울에서 만난 두 분이 서울에서 나를 낳으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 고향을 처음 찾은 것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였다.

50년 전은 고향 없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나도 고향에 끌리는 마음이 있어서 경북대를 골라 석사과정을 했고, 몇 해 후 계명대를 고르는 데도 그 점이 작용했다. 그러나 내가 경상도에 처음 가본 1968년에서 계명대를 떠난 1990년 사이에 농촌의 모습이 너무 크게 변했다. 아버지 고향 동네에 1968년에는 친척이 수십 집 있었는데 1990년에는 단 두 집이 남아있었다. 계명대를 떠나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이곳 연변에도 고향 잃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가 20여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고향 가진 사람이 많다. 아내 집안도 그렇다. 아버님이 갓난아기 때 함경도에서 안겨 온 지 100년도 안 되지만 이곳에 내린 뿌리가 꽤 든든하다. 아내의 형제 7남매 중 돌아가신 한 분 외에 모두 연변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래 세대는 다르다. 십여 명 사촌 중 연변에서 살고 있는 것이 둘뿐이다.

한국보다 연변에서 가급적 많이 지내기로 작년부터 방침을 정한 것도 퇴각 단계의 '전략'이다. 내 공부와 작업(글쓰기)의 조건은 물론 한국이 유리하다. 생각 나눌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일거리에 마주칠 기회도 많다. 하지만 이제 눈에 보이는 조건보다 보이지 않는 조건을 더 많이 생각할 때가 되었다. 당장은 일을 좀 적게 하더라도 생활이 편안해야 그나마 오래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생활이 편안하려면 먼저 아내 입장이 편해야 한다. 내 고향이 따로 있다면 갈등이라도 느끼겠지만 아내 고향에 의지하러 오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50대 이후 내 삶의 길을 열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류연산(柳燃山, 1957~2011) 선생. 2002년 가을 중국 장기체류를 계획하고 있을 때 이근성 당시 프레시안 대표가 서울을 방문 중이던 류 선생을 소개해 줬고, 그로부터 조선족사회에 관한 설명을 듣고 베이징이나 상하이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연변으로 먼저 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3년 봄부터 3년간 연변에서 지냈고, 그 동안에 류 선생이 소개해준 아내와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류 선생은 연변인민출판사에 적을 두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또래의 뛰어난 조선족 지식인 중에는 작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도서관, 실험실 등 학술연구의 여건이 미비한 환경에서 부득이한 선택이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류 선생처럼 고중(高中,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여러 해 후에야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많았다. 문혁(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진학에 적합한 능력과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 진학하기 어렵던 사정이 1980년대 들어 풀렸기 때문이다.

그 또래 조선족 지식인들이 민족심을 (중국 소수민족의 민족의식을 '민족주의' 아닌 '民族心'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라는 말이 다소 남용되는 경향에 비겨 더 정확한 표현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많이 표출한 데는 교조적인 문혁 분위기에 대한 반동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 선생의 경우에는 가풍도 작용한 것 같다. 연변에 처음 정착한 증조부가 족형(族兄)인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선생을 따라온 분이었다고 한다.

류 선생의 성품과 가풍이 어우러진 결과가 아닐까 짐작되는 또 하나 특이점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조금 풀어졌지만 중국에서는 어느 분야든 '당원' 아니고는 행세하기 어렵다. 류 선생 정도 위치와 역할을 가진 사람 중에 당원 아닌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아내의 형제 중 비당원은 아내와 언니 한 분 둘뿐이다.) 그렇다고 류 선생이 '반체제'도 아니다. 인대(인민대표대회) 대의원을 맡아 그 역할을 보통 넘게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더러 나랑 의논하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류 선생은 이상(하고 싶은 일)과 현실(해야 할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자세가 절묘한 사람이었다. 예컨대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도 불러야 하고 적게 모인 자리에서 카드놀이도 해야 한다. 노래를 시키면 서슴없이 나서서 민망한 외설과 욕설로 가사를 바꿔 꽥꽥 소리쳐 부르기 때문에 그에게 노래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사람들이 말린다. 카드놀이를 시키면 엉뚱한 패를 끊임없이 던지기 때문에 선수가 모자라도 그를 끼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주변에서 조금 얄미워하기는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노래 부르고 카드놀이 할 정력과 시간을 아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류 선생이 가장 많은 정력과 시간을 들인 일은 조선족사회의 조사활동이었다. 유적지 답사도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노인들의 기억을 채취하는 작업에 있었다. 그 작업의 성과가 여러 권 책으로 나왔는데, 대표적인 책이 두툼한 두 책으로 나온 <혈연의 강들>(돌베개에서 2003년에 낸 <만주 아리랑>은 축약본)이다. 담소를 나누다가 채취한 이야기가 떠올라 꺼내는 것이 종종 있었는데, 조선족 이주 초기의 이야기부터 문혁 시기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2004년 3월 류 선생의 답사에 동행한 일이 있다. 용정에서 만세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택시를 타고 두만강 변 용연마을의 현 노인 댁으로 갔다. 도중에 화룡에 들러 시장에서 개고기 반 마리를 꾸려 갔다. 현 노인 반가워하는 것이 마치 출타했던 자식을 맞는 것 같았는데, 단 한 번 만난 일이 있었던 분임을 나중에 알고 놀랐다. 몇 해 전 도보로 그 지역을 답사할 때 만났는데, 당시에는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할 형편이 되지 않아 '찍어'만 두고 명절에 안부 인사를 드리는 등 '관리'를 해오다가 벼르던 인터뷰를 하러 간 것이었다.

2박3일 동안 개고기와 독주에 파묻혀 살았다. 통칸 집의 한구석에는 개고기가 든 가마솥이 내내 김을 뿜고 있었고 노인이 넉넉히 구해 놓은 술은 60도가 거뜬히 넘는 것 같았다. 노인이 기분 좋게 기억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대작해 드리는 '술 상무'가 내 역할이었다. 그렇게 술 좋아하는 노인에게 술을 안 마시면서도 미움받지 않는 류 선생의 재주가 참으로 용했다.

필드워크 방법을 깊이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인류학, 민속학 방면 문헌을 꽤 읽었기 때문에 그 원리는 대충 짐작한다. 조선어와 중국어 외의 외국어를 익히지 않은 류 선생이 조사방법을 어떻게 습득했는지 모르지만, 용연마을의 경험으로 볼 때 기본 원리는 잘 지켜온 것 같다. 1990년대 초부터 약 15년간 그가 채집한 자료가 600여 개 녹음테이프로 남겨져 있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재'라고 나는 본다.

2005년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류 선생에게 한국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자료조사 지원 프로젝트에 신청할 것을 권하면서 내 손으로 신청서까지 작성해 줬다. 그 신청이 국편에서는 채택이 되었는데 마침 그 직후 류 선생이 연변대 조선어문계 교수로 들어가게 되고 국편 담당자와의 연락도 원활하지 못해 지원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그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자료 채집 작업을 잘 계속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 국편 지원을 중시했는데,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그가 필드워크를 시작할 무렵의 여건이 얼마나 열악한 것이었을지는 가히 상상할 수 있다. 녹음기 하나도 허리띠 졸라매고 구한 귀중품이었고 버스 노선도 별로 없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강 길이대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2004년 용연마을에 택시 타고 들어가 녹음기와 함께 캠코더를 돌릴 수 있었던 것은 교통 사정과 그의 경제 사정이 모두 좋아진 덕분이었다. 10여 년 경험을 통해 작업 방법도 발전시켜 놓았고 제반 여건도 좋아져 이제부터 더 큰 성과를 바라볼 수 있다고 그도 생각했고 나도 생각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집필 작업이 늘어나 연변에 자주 다니지 못하게 되고 류 선생도 학교 일이 많아 많이 보지 못하는 채로 몇 해를 지내다가 그가 투병 생활에 들어서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부음 중에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부음에 접한 나는 블로그에 '류연산'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생각 정리하는 것을 하나의 큰 일거리로 여긴 것이다.

그 카테고리는 많은 내용이 담기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류 선생 생각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고, 특히 그가 남긴 채집 자료가 크게 걸려 있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에 자료를 연변대에 기증할 뜻을 밝혔는데, 별세 후 몇 해가 지나도록 그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유족이 애를 태우게 되었다. 그 자료의 가치를 매우 크게 보는 나로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2014년 여름 어느 날 조광 교수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 일이 생각나서 이야기를 했다. 조 교수는 당시 서울시 역사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자료의 가치를 잘 이해할 분이고 또 역사학계의 여러 사업에도 밝은 분이므로 의견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조 교수는 그 자료의 가치를 바로 이해했다. 당시 국편의 간부 한 사람에게 그 자료 이야기를 하며 내게 연락할 것을 권했고, 연락을 받은 나는 류 선생의 아들 광엽 군과 연결시켜 줬다. 그러나 몇 차례 전화통화와 메일이 오고가다가 아무 성과 없이 끊어졌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런 차에 연전 국편 위원장에 취임한 조 교수가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취임 얼마 후 무슨 행사에 참석하러 연변에 왔을 때 류 선생 부인과 만나 그 자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드렸다. 두어 주일 후 연변대의 한 연구소가 자료를 서둘러 접수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역사의 해석-평가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포함된 자료이므로 충분히 검토하기 전에 외국 기관에 공개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된 경위를 나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조 교수에게 감사한다. 한국 국편에서 관심을 보이니까 연변대 관계자들도 이 자료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더라도,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료가 제대로 파악도 되기 전에 해외로 반출되거나 공개되는 것을 한국인 입장에서 누가 반길 수 있겠는가? 언제 이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기에 이를지 아직 기약하지 못하지만, 그 길을 이만큼이라도 촉진해 줌으로써 류 선생에게 얻은 은덕을 일부나마 갚았다고 생각한다.

류연산 선생이 내 만년의 삶에 길을 열어준 한 분이라고 했는데, 조광 교수도 또 하나 그런 분이다. 지난번 가톨릭 입교 경위를 적으면서도 그분 생각이 내내 마음속을 오갔는데, 오늘도 류 선생 얘기를 하면서 또 조 교수 생각이 겹쳐진다. 이분에 관한 생각도 한 차례 일기에 적기는 적을 텐데, 서두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더욱이 지금은 중요한 기관장으로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그 역할 어떻게 해내시는지 보고 나서 적어야겠다. 전전긍긍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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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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