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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박 씨의 '일진 안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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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박 씨의 '일진 안 좋은 날'

[삶의 현장] "돌아다니다 보면 별일 다 당합니다"

택시운전 경력 8년차인 박상호(55, 가명) 씨는 불만이 가득찬 모습이었다.

22일 새벽 4시경 서울 한남대교 부근에서 만난 박 씨는 '표정이 왜 안 좋으냐'는 물음에 "일진이 안 좋아서"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박 씨는 "자주 있는 일이라 뭐 말하고 할 것도 없다"며 운전대를 다잡았다.

사연은 이랬다. 박 씨는 이날 새벽 1시 경 강남역 부근을 지나다 마침 유흥주점에서 나오는 40대 후반쯤의 남자 두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을 태웠다.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부근에 있는 P호텔 앞에서 내렸고, 다른 한 남자는 차에 남았다.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물으니 '앞으로 죽 가라'고 손짓만 하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30분 정도 도로를 달렸는데, 글쎄 그 손님이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요금은 올라가고 답답하더라구요."

결국 박 씨는 112 순찰차를 불렀다. 무작정 운전했다가 나중에 "요금은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 "언제 여기 오라고 했냐"라는 손님의 트집에 실랑이를 벌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와서 그 손님을 차에서 끌어내렸는데, 글쎄 이 양반이 요금을 안 주는 거예요. 심야에 30분 정도 운전하면 1만5000원은 족히 나오는데, 돈을 줄 수 없다는 거지 뭐예요."

박 씨는 요금을 받지 못했다. 손님과 박 씨의 실랑이 속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경찰관들도 "기사 양반, 그냥 대충 마무리하고 갑시다. 이 아저씨 술도 많이 취했는데…"라며 박 씨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박 씨는 "평소에 안 하는 쌍욕만 흠씬 하고 돌아섰다"고 말했다.

"얼굴도 잘 생겼고 풍채도 좋은 양반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더라구요. 하긴 유흥주점에서 양주 먹고 아가씨 끼고 노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밥벌이 해 먹는 우리 같은 사람의 심정을 알기나 하겠어요?"

"경찰관도 그러더라구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 모양이라고…. 택시 기사가 노예도 아니고, 마치 하인 부리듯 하는 손님이 타면 얼마나 속이 끓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사실 박 씨가 기분이 상했던 것은 그 손님과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들은 온갖 욕설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박 씨는 그 손님과의 실랑이로 '금쪽'같은 3시간을 길바닥에 버린 일이 더 안타깝다고 했다.

"사납금 내고 하면 12시간 내내 일해도 돈 얼마 못 벌어요. 특히 밤에는 밤 11시에서 새벽 3시까지가 '대목'인데, 그 중요한 시간에 엉뚱한 실랑이를 벌였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이러니 승차 거부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술에 잔뜩 취한 손님들은 기피하게 된다니까요."

박 씨는 오후 5시에 나와 그 다음날 새벽 5시까지 12시간을 꼬박 일한다. 일주일 야간근무를 하면, 그 다음 일주일은 주간근무다. 수입은 장거리 운행이 많은 야간에 더 많기 때문에 야간근무가 더 좋단다. 하지만 손님이 몰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보니, 이날처럼 야간근무 시간에 손님과 실랑이로 허탕 치면 속이 쓰리다.

그래도 박 씨는 다른 기사들보다는 사정이 좋다고 한다. 택시운전 경력 8년차이다 보니 손님이 많은 곳과 시간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이날도 3시간이나 허탕을 쳤지만, 요금 미터기에는 13만 원이 찍혀 있었다.

"그래도 저는 다른 기사들보다는 나아요. 길목도 잘 알고, 손님이 많은 곳도 잘 아니깐요. 한 달에 160만~200만 원 정도 버는데, 이 정도면 우리 회사에서 A급이에요(웃음). 다른 기사들 보면 채 100만 원도 못 가져가는 사람도 많아요. 돈벌이가 안 되는 직업이죠 뭐…."

박 씨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04년 운수업 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사택시 운전기사가 회사로부터 받는 1인당 연 급여는 871만 원이다. 한 달에 100만 원도 온전히 가져가기 힘든 셈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택시 운전기사들의 근속년수는 매우 짧다. 택시업계에서 5개월 버티면 회사 내에서 '고참' 소리를 듣기 일쑤다. 요즘 길을 잘 못 찾는 택시 기사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택시 기사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관련이 깊다.

"회사에 2~3개월 있다가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몸 축나고 돈도 못 번다는 사실을 다 아는데, 왜 오래 운전대를 잡겠어요? 다른 일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거죠. 나같이 미련한 사람이나 8년씩이나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거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박 씨도 처음부터 택시 기사는 아니었다. 한때는 어엿한 '사장님' 소리도 들었다. 유통업을 하면서 쏠쏠한 재미도 봤지만 1993년에 부도를 맞으면서 떠돌기 시작했다. 공사장 막일도 해봤고, 조그마한 공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운전대를 잡기에 이르렀다.

"운전대 잡고 돌아다니면요, 별 요상스런 일 다 당합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넘기지만, 때로는 자존심도 너무 상하고 세상이 왜 이러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자식들 장가, 시집 보내려면 싫어도 운전대를 계속 잡고 있을 수밖에요."

박 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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