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가 한나라당사를 점거하던 지난 27일만 해도 "우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여기서 총파업을 선언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한국노총이었다. 또 이는 경영계로서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안이다. 전문가들은 "사실상 한국노총이 백기를 들었다"며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금지에 목을 매단 결과 역대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됐다"고 비판했다.
총파업을 위한 전체 조합원 총투표가 진행 중인 가운데 한국노총이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꾼 것을 놓고 "한나라당을 비롯해 청와대와도 일정 정도의 합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한국노총 "복수노조 허용되면 국가 선진화도 멀어진다"
'대국민 선언'의 형식으로 나온 한국노총의 이날 제안의 요지는 복수노조 금지와 전임자 자율 해결이다. 시행을 불과 한 달 앞둔 현행법에서 '복수노조 허용' 조항을 없애고 전임자는 "중립적인 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위원회' 마련" 등 준비 기간을 통해 법 내용대로 알아서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장석춘 위원장은 이날 "노조 자율적인 전임자 급여 문제 해결을 전제로 이 법의 폐기 또는 시행을 위한 준비기간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13년 동안 유예된 이 법의 시행을 다시 미루자는 것이다. 장 위원장은 "이 기간 동안 전임자 해결을 위한 노조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동시에 복수노조와 관련해서도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즉각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국민 선언'의 형식으로 나온 한국노총의 이날 제안의 요지는 복수노조 금지와 전임자 자율 해결이다. ⓒ프레시안 |
얼핏 보면 두 조항의 시행을 모두 유예하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이날 노골적으로 복수노조 허용을 반대하고 나왔다.
장석춘 위원장은 "기업내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강성 투쟁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고 더 투쟁적인 노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그리하여 선진적 노사관계 실현은 요원해지고 결국 노동자의 자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선진화도 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 위원장은 또 "(복수노조 금지만이) 파국을 막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복수노조 금지는 한국노총 내 일부 세력의 강력한 요구다. 실제 지난 7일 15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한국노총의 노동자대회장에는 항운, 자동차, 택시, 철도 등의 명의로 "복수노조 결사반대"라고 쓰인 에드벌룬이 띄워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장 위원장은 그동안 수차례 걸쳐 "일부 세력이 복수노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위노조와 총연맹이 같을 순 없다"며 원칙을 재확인했었다.
한나라당이 '준비 기간' 포석 깔고 한국노총 "역사상 가장 어려운 결단"
▲실제 지난 7일 15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한국노총의 노동자대회장에는 항운, 자동차, 택시, 철도 등의 명의로 "복수노조 결사반대"라고 쓰인 에드벌룬이 띄워져 있기도 했다. ⓒ프레시안 |
'준비 기간' 얘기는 한나라당에서 먼저 나왔다. 지난 27일 있었던 당정 협의 후 신상진 한나라당 제5정책조정위원장은 "당은 내년 당장 시행은 어렵다는 입장을 정부에 제기했다"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는 노조활동을 위축시키지 않도록 사전에 재원마련 방안 등을 위한 준비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전달했다"고 말했다.
또 한국노총의 바뀐 입장은 그간 공조를 유지해 왔던 민주노총과의 연대도 깨트릴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는 점도 '사전 조율'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당 뿐 아니라 정부와의 '사전 합의' 없이 한국노총이 독단적으로 내놓기에는 그 파장이 엄청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석춘 위원장은 입장 변화의 배경에 대해 "우리 노사관계가 다시 투쟁의 시대로 후진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 노동운동 역사상 노동조합의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만 했을 뿐, 뚜렷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먼저 내놓은 '준비 기간' 얘기를 한국노총이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날 오전, 한나라당 지도부와 이명박 대통령은 조찬 회동을 가졌다. 하루 전날인 29일 밤에는 당정청 수뇌부 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의 제안에 뒤이어 열린 임태희 노동부 장관, 장석춘 위원장,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김영배 경총 부회장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한나라당은 한국노총과 경총에게 "이틀 뒤까지 합의안을 마련해 오라"고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태 이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연대 총파업까지 거론될 만큼 노사정의 뜨거운 쟁점이 됐던 두 문제가 한국노총의 제안을 정부와 한나라당, 경영계가 받아들이는 형태를 취하는 사실상 마지막 '쇼'만 남겨두고 있는 셈이다.
"노동조합 스스로 헌법에서 보장한 단결권 포기"
이 제안이 현실이 된다면, 장석춘 위원장과 한국노총은 두 문제가 논란이 돼 온 13년 역사상 최악의 '담합'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3년 동안도 노사정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법 시행 유예라는 '담합'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속내야 무엇이든, 그간 한국노총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막을 수 있는 카드로 삼성과 포스코가 반대하는 '복수노조 허용'을 강하게 밀어붙였었다. 그러나 '법 시행이 원칙'이라는 입장을 정부가 굽히지 않으면서 코너에 몰린 한국노총이 자신의 마지막 카드조차 버리고 정부와 경영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문가들은 한국노총의 선택을 맹비난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노동조합 스스로 헌법에서 보장한 단결권을 포기한 것이며 그 조건으로 얻은 전임자 임금의 경우도 시간만 벌게 된 셈"이라며 "한국노총이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부에게 모든 카드를 내 준 격"이라고 평가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도 "한국노총이 백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전임자는 스스로 줄이고 복수노조는 금지시키면 삼성 등은 아무 것도 손해볼 것이 없다"며 "최악의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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