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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교회부터 '예배 전 국민의례' 시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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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소망교회부터 '예배 전 국민의례' 시키면 어떨까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정부의 공무원노조 민중의례 금지 해프닝을 보며

80년대 초반까지 태극기 하강시간에 맞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가 나오면 사람들은 가는 길을 멈추고 태극기가 내려오거나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나도 세상 물정을 모를 때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를 바라보며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되새겼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에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 내가 이해한 세상 물정은 국기가 내려오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 자신들은 정작 가르쳤던 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은 바는 그렇게 한다고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 한다고 반역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파쇼국가에서나 있을 법 했던 국기 하강식은 80년대 중반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대학에 가서 영화관을 출입하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려면 애국가 반주에 맞춰 관람객 모두가 일어섰다가 앉아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태극기가 화면 가득 등장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면 앉아있던 모두가 일어나서 가슴에 손을 얹고 화면을 바라보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머리가 굵어진 다음에는 사방에서 일어나도 나는 오징어땅콩 과자만 먹었다. 물론 오징어땅콩을 먹은 내가 반역자가 된 것도 아니고 일어선 사람들이 특별한 애국자가 된 것도 아니다. 이것도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에 없어졌다.

군대에 가니 아침 6시에 연병장으로 불러내 국기에 대한 경례와 태극기 제창에 이어 복무신조 낭독을 시켰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복무신조를 잠도 덜 깬 목소리로 돼지 멱따듯 질러댔는데, 시켜서 하는 것이니 따라는 하지만 도대체 이런 게 군복무에 무슨 소용이 되었는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의문이다. 아무튼 가기 싫은 군대에 가보니 "엄동설한에 최전방에 배치된 제군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치하한다"는 내용의 군사령관 지휘서신이 행정반 벽에 붙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별 네 개짜리 사령관님은 군대 면제받은 대학후배의 아버지였다.

요즘은 있나 모르겠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고등학교 때까지 교실 안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붙어 있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인가 하는 내용이다. 월요일마다 운동장에서 하는 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에 이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집단으로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장에 나간 군인도 아니고 한창 뛰어놀 어린 아이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다고 외치는 모습에서 오싹함을 느낀다. 이것이 일제시대 때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의식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아무튼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한데,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늘 그랬듯이 맹세하라고 우리들에게 명령한 사람들은 정작 조국과 민족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운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조금 확대 해석해보면, 우리나라에 만연한 자살문화도 어릴 적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고 맹세해야 했던 국가권력의 집단적 세뇌행위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 진영의 집회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결사투쟁(決死鬪爭)과 같은 살벌한 구호나 전투적 문화도 결국 그 연원을 찾아가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강요받아야 했던 어린 날의 집단적 세뇌가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 더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외우면 훌륭한 학생이라고 상 받았던 것 가운데 국민교육헌장도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로 시작되는 헌장은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는 비장한 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 선생님은 안 그랬지만, 원고지 20매쯤 될 내용을 모두 외워오라던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가득한 선생님도 있었다. 못 외우거나 안 외우면 아이들을 패기도 했는데, 창문 너머로 들리는 이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는 어린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이걸 못 외운 너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반역자다. 이런 빨갱이 같은 놈."

돌이켜보면, 이 충성심 가득한 반공 선생님은 여자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학교 안에서 예쁜 아이가 눈에 띄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러 세워서는 껴안고 주무르고 난리였다. 열 살짜리 남자아이들도 분노해 마지않았던 아동 성학대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던 선생님들은 모른 체 했는데, 그 비겁자 중에는 교장과 교감 선생님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과 안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신앙심이 투철했던 아이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우상숭배 강요와 똑같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조상의 묘에도 절을 안 하는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행위는 그와 똑같다는 논리였다. 일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나는 이 대목만큼은 수긍할 수 없어 비기독교 친구들의 편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군대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자. 화장실에서 먹던 초코파이가 그렇게도 맛나던 논산훈련소에 입소한지 얼마 안 되어 위에서 총기수여식이라는 걸 시켰다.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구대장이 되어 M16 소총을 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열심히 연습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라고 내가 크게 외치면 150명쯤 되는 동기들이 소총을 2단계로 들어올리며 "충성"을 외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긴장을 하여 "국기에 대하여 충성"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키득키득 웃고 난리가 났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총기를 나눠주던 중대장이 뿔테 안경을 쓴 훈련병 하나를 끌고 나왔다.

"야, 이 개새끼야. 너는 왜 총을 안 잡아. 총 잡아!"

얌전하게 생긴 그 동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대장이 그 친구를 단상 앞에 세워놓고 '인민재판'을 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여기 국가에 대한 반역자가 있다. 국가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준 신성한 총기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이다. 이런 반역자는 함께 훈련할 수 없다."

그러더니 헌병을 불렀다. 각본이 짜져 있었는지, 헌병 두 명이 단상 뒤편에 미리 대기 중이었고, 이름도 모르는 훈련병 동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순순히 끌려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내가 남을 해치지 않는 이상 국가나 공동체가 나의 자유를 구속할 권리가 없음을 강조하는 이념이다. 내가 학교나 직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다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아서 내가 손해를 본 적도 없다. 150명 가운데 한 명이 총기 잡기를 거부한다고 나머지 149명이 총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닌데, 그 한 명을 반역자로 낙인찍고 감옥으로 끌고 간 국가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 운운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다.

결론으로 가자. 공무원노조가 국민의례를 하지 않고, 민중의례를 한다고 해서 정부가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만큼 국민의례를 하면 되었지, 노조 행사에까지 국민의례를 들이대는 행태가 치사하기 짝이 없다.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으로 군대를 안 간 자들이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있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더욱 어안이 벙벙하다. 더군다나 공무원노조가 국가 행사에서 이뤄지는 국민의례를 거부한 것도 아니고, 노조 집회에서 '적기가(赤旗歌)'를 부른 것도 아니다.

공무원노조는 공무원조직이 아니라 노동조합 조직이다. 그 수장은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아닌 노조위원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는 국가와 사용자가 노동조합의 운영에 개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살인과 파괴행위가 없는 한 노조 집회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던 트로트를 부르던 국가가 나설 일은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는 간단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고 정부가 뭐라 한다면, 이것은 종교 탄압이다. 마찬가지로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노동조합 행사에 정부가 개입해 민중의례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노조 탄압이다.

군미필자가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있는 나라의 정부가 그렇게 애국가 부르는 게 좋으면, 모든 국가행사에서 4절까지 부르도록 하시라. 그리고 매일 해질 때면 하던 국기 하강식을 다시 부활시키고, 영화를 틀 때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시라. 국기에 대한 맹세도 부활시키시라.
▲ "군미필자가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있는 나라의 정부가 그렇게 애국가 부르는 게 좋으면, 모든 국가행사에서 4절까지 부르도록 하시라. 그리고 매일 해질 때면 하던 국기 하강식을 다시 부활시키고, 영화를 틀 때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시라. 국기에 대한 맹세도 부활시키시라. "ⓒ연합뉴스

아참!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애국가를 4절까지 모두 부를 수 있을까? 학창 시절 골수 반공 선생님이 그랬다. 애국가 4절까지 못 부르는 사람은 국가관과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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