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편의 불법과 탈법은 관행으로 치부하면서 그냥 넘어가자던 이들이 공무원노조의 "불법"과 "탈법"은 처벌하겠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제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 눈의 티끌을 뭐라 하는 위선자들을 일갈했다던 예수의 일화가 떠오른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87호의 내용은 이렇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각자의 이익을 보호·증진할 목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자유로이 대표자를 선출하며 운영과 활동을 결정하고 그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 공무원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민주노총을 자신들의 총연합단체로 선택했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행위 자체가 불법성이 있다며 시비를 걸고 있다. ⓒ뉴시스 |
정부 여당이 주장하는 불법성의 가장 큰 이유는 민주노총 가입이다. "공무원은 국가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상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있으나 민주노총 강령에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규정돼 있어 정치적 중립성을 전제로 하는 공무원노조의 민노총 가입은 부적절하다"는 논리다. 전혀 다른 개념인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한데 섞어 놓고는 그게 같은 말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한국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문제없고 민주노총만 불법?
▲ 한국노총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정책연대를 맺었고,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맺었다. ⓒ프레시안 |
한국노총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정책연대를 맺었고,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맺었다. 민주노총은 2000년 민주노동당을 출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정당의 결성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지향해왔다.
방법론과 내용이 다를 뿐이지 노동자가 자리 목소리를 내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에는 양대 노총의 입장이 다를 게 없다.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의 집단운동이라는 본래 속성상 정치세력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경제투쟁'만으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고, 자연스럽게 법제도 개선과 정치권력 획득이라는 '정치투쟁'으로 나아간다. 이는 세계 노동운동사가 증명하는 바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불온(不穩)하게 보는 것은 노동조합운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정부 여당과의 정책연합을 한 것이니 별문제 없고, 민주노총의 그것은 정부 여당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원하는 것이니 문제가 있다는 발상은 유치하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자신과는 다른 성향의 행정부가 들어섰더라도 공무원이 동일한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일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다. 또한 정권 교체가 이뤄지더라도 공무원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기존 여당과 지금의 여당을 동일하게 대우하는가의 문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공무원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공평하게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와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미국·영국의 공무원은 정치 활동에 제약 없다
하기야 이명박 정권만 공무원노조의 정치 참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정부'라 평가받는 노무현 정권 때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유로 공무원노조를 괴롭혔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지도부가 민주노동당 지지 의사를 밝히자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관련자를 구금했던 게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선진국 가운데 공무원의 정치활동, 나아가 공무원노조의 정치활동을 금기시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답은 '없다'이다.
미국의 경우, 지방공무원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한이 없다. 정당 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특정 정당 후보를 위한 선거활동도 할 수 있다. 물론 연방공무원도 정해진 한도 내에서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거나 정당가입과 정치자금 후원 등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본받고 싶어 하는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나라, 영국도 직업공무원에 대해 폭넓고 자유로운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있다. "공무원은 항상 모든 정치적 문제에 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기준이 있긴 하지만,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수준에 머물지 더 이상의 제한은 없다.
프랑스는 훨씬 자유롭다. 공무원의 정당가입과 정치활동이 완전히 허용되며, 대부분의 공무원은 현직 신분을 보유하고 출마까지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선될 경우 공무원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파견근무를 발령받게 된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공무원의 정치활동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공무원들 역시 자기가 원하는 정당에 가입해 폭 넓은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정권교체" 슬로건 내걸었던 '선진국' 일본노총
일본의 경우에는 공무원에게 금지하는 정치활동의 실례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 징계 사유로 삼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차원의 제한과 규제에 그칠 뿐이다. 노동조합 조직을 통한 정당 가입과 정치자금 후원 등의 정치활동에 대한 제재는 거의 없다.
지방공무원 노조인 전일본자치단체노조는 2003년 11월에 있었던 제43차 중의원 선거를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선거"로 규정하고 민주당과 사민당 후보를 적극 지지했다. 교원노조인 일교조는 이라크 침략전쟁 반대, 평화헌법 수호,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허용한 유사법제 반대투쟁 등 첨예한 쟁점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다양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두 노조의 상급단체인 일본노총은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난 8월 총선에서 "정권교체의 여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에 직접 개입했다.
일본노총은 자민-공명 연립정권을 "고난의 4년"이라 규정하면서 민주당의 승리를 "(일본노총) 결성 이래 20년, 여러 선배들이 노총 결성 때 가졌던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치체제의 구축'이라는 강력한 바람이 이번에 실현되었다"고 평가했다.
선진국 가운데 한국처럼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허울로 공무원 개인은 물론 공무원노조의 정치적 권리를 근원적으로 금지하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이명박의 '선진화'가 웃음거리가 안 되려면…
공무원노조가 노동자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표방하는 상급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불법 운운하는 수준의 정부가 말끝마다 '선진화'를 내세우는 모양새가 우습다. 국가가 공무원에게 요구할 것은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근무와 관련된 행정의 중립성이다. 근무와 관련된 행정의 공정성과 능률성이 문제이지 정치활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노태우 정권은 교사들을 탄압했지만, 전교조는 결성 10년 만인 1999년 합법화되었다. 2004년 노무현 정권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미명 하에 공무원노조의 정치활동을 탄압했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운동이 건설한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한 바 있다.
ILO 협약 제87호에 따르면, 행정 당국은 노동조합의 자치권을 제한하거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어떤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행정 당국은 노동조합을 해산하거나 그 활동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 나아가 행정 당국은 노동조합이 상급단체에 가입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런 노동기본권을 공무원노조에게도 적용하는 게 '선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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