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96년 12월 국회 동의를 거쳐 OECD에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OECD 가입은 김영삼 정부가 내놓은 신경제 5개년 계획 중 하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OECD 가입을 자신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내세우면서 96년 11월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대형 사고가 일어난 직후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OECD 가입을 서둘렀다. 자본시장 개방을 전제로 하는 OECD 가입이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이 제기됐지만 이를 묵살했다. 사진은 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신한국창조'를 역설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 |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등 부실 공사로 인한 대형사고가 연달아 터진 뒤 1년 만에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했다. 95년 1인당 국민소득(GNI)도 1만 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그러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OECD 가입 1년 만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 여파로 1인당 국민소득은 98년 7355달러로 주저앉았다.
자유주의의 선봉장 MB, 동시다발적 FTA 추진
2009년 4월 2일(현지시간) 이명박 대통령은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G20 금융정상회의 전체회의에서 보호무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한국은 2009년 영국, 브라질과 함께 G20회의의 공동 의장국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1차 G20 정상회의에서 '스탠드스틸(Stand-still. 새 무역장벽 도입금지)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미국의 오바마 정부를 필두로 자국 상품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보호주의 타파, 자유주의 수호의 선봉장으로 나선 셈이다.
"보호무역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G20 정상회의 기간 동안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타결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캐서린 애슈턴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2일 오후 런던의 한 호텔에서 가진 최종 협상은 결렬됐다. 관세 환급에 대한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일 오바마 미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에서도 '한미FTA 조기 비준'에 대한 강한 의지를 전달했다.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자동차 등 몇 가지 분야에 있어 한미FTA 재협상 필요성을 언급했었다. 클린턴 국무부 장관, 커크 무역대표부 대표 등 오바마 정부 핵심 관료들도 한미 FTA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직후 캐나다를 방문해서도 나프타(북미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 의지를 밝혔다. 한미FTA 의회 비준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일관적 입장이었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대답은 "(한미 FTA를) 진전시키는데 한미 상호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 진전이 이뤄지길 희망하며 우리 스태프들이 이를 어떻게 진전시킬지 논의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측은 "진전이 이뤄지길 희망한다"는 발언에 방점을 찍어 오바마 대통령의 입장이 변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미 정부 고위관계자는 "회담에서 (의회 비준) 일정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며 "(한미 FTA 비준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두 정상이) 인정했다"고 밝혔다. 당장 논의에 큰 진전을 없을 것이란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은 오는 6월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한미FTA 문제를 재차 언급할 예정이다.
▲ G20 정상회담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G20회담 기간 동안 한미FTA와 한EU FTA에 있어 큰 진전을 기대하고 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기는 힘들어 보인다. ⓒ청와대 제공 |
노무현 "한미FTA, 선진국으로 가는 도전"
"우리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진국은 그냥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 2007년 4월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선진국으로 빨리 가기 위해 기존에 검토 중이었던 일본, 아세안 등과 FTA가 아니라 제일 '센 놈'인 미국과 FTA를 급작스럽게 추진했다는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 포럼에서 "노무현 정부가 5년 동안 제일 잘한 것은 한미FTA 체결"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선진국에 대한 열망'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특히 이 대통령은 FTA를 세계경제위기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로 여기고 있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FTA를 통해 수출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집권 초기 수출 대기업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추진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747 공약'으로 대표되는 고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우리경제 체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에 기반한 결정이기도 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1일 미국의 케이블 경제뉴스 채널인 CNBC와 인터뷰에서 "지금 세계 무역이 많이 침체된 데 비해 한국은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해 아마 올해 연말에는 150억 달러~200억 달러 가까이 무역수지 흑자가 날 수 있을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한국경제가 '동시다발적 FTA'를 감당할 만큼 양호한 상황일까? 작금이 경제위기에 각국이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상황에서 FTA 협상을 서두르는 게 현명한 전략일까?
두 가지 모두 긍정적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오바마 정부가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도 미국경제 규모에 비해 취할 수 있는 자국의 이익이 적다고 판단해서다. 한국이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선진국들과 양자 협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일만한 역량이 될까? 한미FTA처럼 호기롭게 협상을 개시했지만 주도권을 빼앗겨 결과적으로 얻은 것보다 내준 게 더 많은 불평등한 조약만 동시다발적으로 맺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준비 안 된 개방은 파국 부른다
우리의 경제체력을 과신하다가 큰 코 다친다는 것은 김영삼 정부의 OECD 조기가입에서 이미 한번 겪었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으로 인한 효과로 국가신용도 제고, 선진국과 무역 촉진, 선진국의 경제.과학기술 정보 이용 등을 제시하면서 조기가입을 강력히 추진했지만, 정치권,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1996년 재경원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뿐 아니라 일부 여당 의원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박명환 신한국당 의원은 "급작스런 자본.외환시장 개방으로 우리 경제는 자칫 멕시코 페소화 폭락과 같은 위기상황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상현.김민석 국민회의 의원도 "낙후된 금융현실을 감안할 때 OECD 가입 이후 국내 금융기관 중 상당수는 도산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OECD 가입을 3-5년간 유예하거나 가입 유보의 구국적 결단을 내리라"고 요구했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도 외채가 1100억 달러(그중 단기성 부채가 58%)나 되는 상황에서 OECD 가입 전제 조건인 자본시장 개방을 서두를 경우 자칫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환투기꾼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면서 가입을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 가입 당시 합의한 시장개방 주요 항목과 일정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비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OECD 가입이 당장 가져올 '경제적 효과'는 불투명했지만, '정치적 효과'는 명확했다. 더구나 1997년 대선도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OECD 가입에 따른 어설픈 시장개방으로 서비스 수자 적자 규모 확대, 외국 자본의 국내시장 장악 등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이 현실화됐다. 특히 95-96년 무역적자가 심화되기 시작한 상태에서 OECD 가입을 위해 정부가 금융시장을 획기적으로 열자 돈이 급속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부실기업에 대출해준 시중은행을 믿지 못해 외자 탈출이 가속화됐다. 결국 한국은 OECD 가입 1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게 됐다. 멕시코가 94년 나프타 체결 뒤 1년 만인 95년 페소화 폭락 사태를 맞은 것과 똑같았다.
또 OECD가 과연 명실상부한 선진국 클럽인지도 의문이다. 96년 가입 당시 OECD 성격은 이미 선진국 클럽의 굴레를 넘어 중진국으로까지 확대되는 시기였다. 우리와 함께 가입한 나라인 폴란드, 헝가리 등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선진국 인정'이라고 강조했었다.
장하준 "15등이 1등 그룹에 가면 더 도태된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포함해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미FTA의 경제 효과에 대해 노무현 정부 때 제시했던 대외경제연구원(KIEP)의 분석 결과를 '재탕'하고 있을 뿐 다른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한미FTA가 되면 10년간 GDP가 6% 성장하고, 일자리가 34만개 늘어난다는 KIEP의 연구 결과는 부풀려진 것이라는 지적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경기대 신범철 교수가 똑같은 CGE(연산가능일반균형모형)를 갖고 분석한 결과, 10년간 GDP는 0.2%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 경우 일자리는 1만5000개 늘어난다. 그나마 EU나 호주, 뉴질랜드 등과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 결과도 없다.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는 3일 CBS와 인터뷰에서 "한-미FTA나 한EU FTA나 선진국과 FTA는 우리가 할 처지가 아니다"며 "한EU FTA가 결렬된 것은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선진국과 후진국이 양국간 FTA를 할 경우 후진국이 손해를 보게 돼 있다"며 "지금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한 것 같지만 아직도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하는 제조업마저 생산성이 미국의 반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또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이 자유무역이 아니다"며 "예를 들어 미국과 FTA를 맺는다면 암묵적으로 호주 쇠고기와 독일 자동차를 차별하는 것이다. 진정한 FTA를 하려면 WTO에 가서 다자간 FTA를 해야 된다"고 양자간 무역이 아닌 다자간 무역을 강조했다. EU, 호주, 뉴질랜드, MERCOSUR(남미공동시장) 등 농업강국들과 동시에 FTA를 추진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크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한-EU FTA 뿐 아니라 세계 최대 농업 수출국인 호주, 뉴질랜드와 FTA 추진은 우리 농업에 대한 사망 선고"라고 밝혔다. 강 의원은 한-EU FTA가 현실화 된다면 낙농분야에서 1028억 원, 양돈분야에서 4200억 원, 수산분야에서 403억 원 등 축산업에서만 연간 5000억 원이 넘는 피해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강 의원은 또 한-EU FTA 협상 과정에 있어서도 "국회에서 단 한 차례의 보고도 없었다"며 철저한 '밀실협상'임을 문제 삼았다. 강 의원은 "과정과 절차가 미국과 FTA보다 더 밀실협상이었다"며 "이해당사자인 농민단체나 농민들과 단 한마디 의견수렴이나 토론이 없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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