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나이도 학식도 경험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특정 의견을 대변하는 단체의 책임자로서,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존심만은 굽히지는 않겠다는 자세로 살아 왔다. 그런데 2005년 초봄쯤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을 사석에서 만났을 때, 그 기세에 눌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마디로 '윤 따거'(따거는 형님이라는 뜻의 중국어)라는 별명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했다. 이런 보스형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 경제부처의 수장으로서 관료조직을 이끌어간다면, 대통령은 천군만마를 얻은 격일 것이다. 단, 올바른 경제철학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윤증현 내정자와의 악연
▲ 윤증현 내정자. ⓒ뉴시스 |
윤증현 내정자에게 시장주의자라는 황당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아마도 2004~07년 금감위원장 재임 시절의 행보, 특히 금산분리 완화 및 생보사 상장 등과 같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이른바 '시장원리'에 따라 단순하게 판단하고 밀어붙였던 것에 대한 보수언론의 평가 때문일 것이다. 하긴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의 칼날, 그것도 관치금융의 무딘 칼날을 휘두른 이헌재 초대 금감위원장에 대해서까지 시장주의자라는 명예를 붙여주는 보수언론이고 보면, 굳이 시시비비 따질 일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위기도 아닌 상황에서 관치금융을 자행한 윤증현 내정자에까지 시장주의자라는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에 대한 모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밝히겠다. 윤증현 내정자와 필자는 전생에 대단한 악연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윤증현 내정자만큼 경제개혁연대의 비판논평에 자주 등장한 인물도 없다. 경제개혁연대 홈페이지의 검색창에 '윤증현'을 입력하니 무려 46건의 자료가 뜬다. 2004~07년 당시 금감위가 했던 일 중 경제개혁연대가 그냥 넘어간 일이 없다는 뜻이다.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법 위반 문제, 삼성생명 및 삼성카드의 금산법 제24조 위반 문제, 생보사 상장 논란, 금산분리 완화 논란 등등으로 3년 내내 윤증현 내정자를 괴롭혔다. 특히 금산법 문제와 관련해서는 윤증현 내정자를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상에서 열거한 사건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삼성그룹과 관련된 일이다. 윤증현 내정자가 노골적으로 삼성에 편향된 자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당시 다른 사람이 금감위원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삼성관련 사안에서 독립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못했을 테니, 이 글에서는 삼성관련 사건들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어차피 삼성과 경제개혁연대 사이의 관계도 평범하지는 않으니….
윤 내정자는 시장주의자가 아니라 중상주의자다
그러나 삼성관련 사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증현 내정자가 결코 시장주의자가 아니라 관치금융의 화신임을 증명하는 사례가 있다. 2005년 1월 증권집단소송법이 발효되었다.
증권집단소송의 대상이 되는 불법행위 중에서 초미의 관심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분식회계이다. 논란 끝에 시행 1개월만에 분식회계에 대한 증권집단소송은 2년 유예하는 내용으로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증권집단소송법 제정을 위해 6년간 입법운동을 했던 경제개혁연대로서는 뚜껑 열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국회가 법을 개정했는데…. 그것도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국회가 증권집단소송법을 개정한 것은 과거분식을 사면하자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금감위 감독규정인 '외감규정'을 개정했다. 기업이 과거분식을 자발적으로 수정하면 금감원이 회계감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증권집단소송법은 1800개 상장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법이고, 특히 분식회계에 대한 증권집단소송은 첫 2년간은 자산 2조원 이상의 약 80개 대기업만이 그 적용대상이다. 반면, 금감위 외감규정은 자산 70억원 이상의 1만3000개 외감법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규정이다. 진짜 국민적 합의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윤증현 내정자는 80개 거대기업에 대해 2년간 증권집단소송을 유예한 법 개정을 1만3000개 외감법인 전체에 대한 분식회계 사면조치로 확장해버린 것이다. 법률적 근거도 없이….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의 회계서류를 고칠 경우 '전기오류 수정'이나 '재무제표 재작성'의 방법으로만 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다. 그런데 당시 금감위는 법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 '관련 항목의 수정, 즉 역분식'을 허용하였다. 예를 들어, 재고자산을 과대평가하는 방법으로 분식을 하였다면, 이를 재고자산 평가손의 명목으로 털어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분식회계는 공시 재무제표를 보면 척 알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역분식을 허용하고 감리도 하지 않는다면, 외부 투자자가 분식회계의 존재 및 그 수정 사실조차 알 길이 없고, 따라서 분식회계에 따른 손해를 보상받고 책임을 추궁할 길도 없다. 분식회계를 완벽하게 사면한 셈이다.
물론 경제개혁연대가 길길이 날뛰었다. 법률적 근거도 없이, 그것도 상위 법령에서 금지하고 있는 방법으로 사실상 과거분식을 사면한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감사원 감사도 청구했고, 국회와 청와대에 조사도 요청했다. 놀라웠다.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고, 그리고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 정말 놀라운 돌파력이고 추진력이다.
이 사례의 의미를 정리해보자. 과거분식 사면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물론 분식을 묻어두고 있던 기업들은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분식된 정보를 보고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본 사람은 어디에 하소연하나? 기업들이 회계장부를 마음대로 고치도록 감독당국이 앞장서서 독려하는 나라에 어느 투자자가 장기투자를 하겠는가? 공시자료도 감독당국도 믿을 수 없는 나라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을 만들면 자본시장이 선진화되고 글로벌 투자은행이 육성되는 건가? 웃기는 일이다.
윤증현 내정자가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불특정 다수 투자자의 권익이 아니다. 기업,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수 기업인들의 기득권이다. 윤증현 내정자가 육성하고자 했던 것은 투명하고 공정한 금융시장 질서가 아니다. 국민들의 소중한 저축자금을 소수의 기업들이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도록 하는 구래의 관치금융 질서이다. 윤증현 내정자의 머리에 있는 시장은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의 것이 아니다.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다수의 희생 하에 소수의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중상주의자의 것이다.
그렇다. 윤증현 내정자는 시장주의자가 아니라 중상주의자다. 그것도 '한다면 하는' 브레이크 없는 중상주의자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17세기의 중상주의자를 경제팀 수장으로 두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경제팀 개편에서 '제발 이 사람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던 이가 바로 윤증현 내정자다. 심상정 전 의원이 표현했듯이, 늑대(강만수 장관) 피하려다 호랑이(윤증현 내정자) 만난 격이다. 정말 미치겠다.
몇 가지 질문
결론을 대신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윤증현 씨를 금감위원장에 임명했는가? 윤증현 씨의 정체를 몰랐는가 아니면 알고도 임명한 건가? 2004년 당시 카드대란의 여파로 금융시장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뚝심 있는 관치기술자가 필요했던 것인가? 지금이라도 윤증현 씨를 등용한 것은 큰 실책이었음을 인정할 생각은 없는가? 참여정부에서 금감위원장을 3년이나 지낸 사람이 MB정부에 달려가는 것을 보고 솔직히 배신감은 느끼지 않는가? 답답해서 물어봤다.
둘째, 이명박 대통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윤증현 씨를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했는가? 흔히 하는 말로, 선거가 없는 올 1년이 과감하게 국정을 운영할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한 건가? 그래서 경제위기 극복과 MB노믹스 추진이라는 상충하는 두 가지 목표를 앞뒤 가리지 않고 몰아붙일 뚝심 있는 관치기술자가 필요한 건가? 윤증현 씨가 같은 중상주의자는 구시대 인물이고, 따라서 윤증현 씨를 경제팀 수장으로 등용하면 이명박 대통령도 낡은 중상주의자로 평가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윤증현 내정자. 1997년 재경원 금융정책실장, 그리고 2004년 금감위원장. 이 정도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본인이 일할 기회는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일을 하기에 본인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가? 그 일이 '국민 개개인의 권익보호와 건전한 시장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는가? 본인이 진정 시장주의자라고 자신하는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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