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조는 최근 코레일과 체결한 단체 협약에서 250여 명의 비정규직을 외주업체로 돌리는 데 합의했다. 산별노조인 보건의료노조 가톨릭의료원(CMC)지부는 집단 계약 해지 이후 병원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강남성모병원 파견 노동자들의 시위 용품을 노조 사무실에서 강제로 치웠다.
철도노조, 코레일과 "250명 외주화" 도장 쾅!
▲철도노조는 지난해 12월 두 번째로 마련한 2008년 임금 및 단체협상 잠정 합의를 하면서, 부속 합의로 17개 업종의 외주화 및 효율화에 코레일과 합의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철도노조가 파업 전야제를 벌이는 모습. 당시 파업은 유보됐다. ⓒ연합뉴스 |
이에 따라 기존의 기간제 노동자 374명 가운데 78명만이 코레일과 재계약을 맺게 됐다. 계약이 연장된 사람이 25명, 하던 일을 바꿔 재개약한 사람이 43명이었다.
나머지 250여 명은 계약이 종료돼 사실상 해고(20명)되거나 외주업체로 소속이 변경(231명)됐다. 노사는 이 합의를 하면서 "청소 용역 등 전문업체에 취업 알선을 노력하되, 취업이 곤란하면 위로금을 지급하고 계약을 종료한다"고 단서 조항을 달았다. 한 마디로 "고용 승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 합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구로 이들의 고용 승계가 될 리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철도 비정규직 집단 정리해고 저지 공공대책위원회' 이택진 임시대표는 "사실상 노조가 나서 비정규직의 집단해고에 동의해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비록 230여 명이 외주업체로 취업이 알선된다 하더라도, 임금 및 근로 조건이 열악해지고 2년 후 정규직 전환 기회마저 빼앗기는 만큼 '집단 해고'로 보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노사는 "고용 승계 노력"을 약속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주업체에서도 고용 계약이 거부된 이가 3명이다. 이들은 "철도노조는 정부와 공사의 공세에 밀려 외주화 합의를 했지만 비정규직의 권리를 위해 어렵더라도 투쟁해야 한다"며 지난 12월 31일부터 서울역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이번 합의에서 대상자 374명 가운데 조합원을 중심으로 코레일과 재계약이 이뤄진 점도 관심을 모은다. 업무 효율화에도 불구하고 다시 코레일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게 된 78명 가운데 80% 정도가 철도노조 조합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주업체로 가야만 하는 250여 명 가운데 조합원은 10명 안팎이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동조합이 외주화에 도장을 찍어준 안타까운 합의였다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이번 합의는 연말이면 계약이 해지되는 이들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노조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374명이 모두 잘릴 상황에서 그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얘기다.
'막무가내 병원'에 밀려 정규직 노조 "노조 사무실에서 비정규직 물품 빼달라"
▲ 강남성모병원에서는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 농성 물품을 노조 사무실에서 빼달라"고 요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지난해 12월 29일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들이 직접 물품을 치우는 일이 벌어졌다. ⓒ프레시안 |
이유는 병원 측의 각종 회유와 협박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지원 대책회의 관계자는 "피켓과 현수막 등 시위 용품을 빼달라면서 정규직지부가 '병원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꼭 병원의 압박 때문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맞다"고 말했다.
CMC지부는 같은 달 초에도 "병원 측이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하면 교섭을 할 수 없다고 나온다"며 계획했던 '1박 2일 집중투쟁'을 폐기한 바 있다. 산별 중앙교섭 이후 지부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병원 측의 강경한 태도가 정규직노조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대응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거세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는 성명을 통해 "교섭을 통한 연내 타결이라는 실날같은 가능성을 믿고 각종 투쟁 계획을 포기하거나 변경했지만, 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며 "단협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은 똑같이 중요한데도, 단협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투쟁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보건의료노조 유지현 사무처장은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얘기하기는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유 사무처장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강남성모병원 사태가) 법을 회피하는 사용자나 잘못된 법제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조 운동, '총고용 보장' 구호보다 구체적 대응안 고민해야"
이들은 현대미포조선처럼 정규직노조가 애초부터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는 소위 '어용노조'는 아니다. 현 경제 위기 가운데 "총고용 보장"을 핵심 요구안으로 내걸고 있는 민주노총(위원장 이석행)이 이들의 상급 단체다. 물론 개별 단위노조 또한 이런 원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 어려움이 이들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다. 때로는 수세에 몰려있는 노동조합의 힘이, 때로는 투쟁도 결론은 어차피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는 경험이, 때로는 너무 광범위해 미처 노동조합이 그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확산된 비정규직 규모가 이들의 선택지를 좁게 한다.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적극적 의미에서 비정규직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노동시장의 분화가 노사관계 영역까지 확대돼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현재 민주노조 운동에는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는 이미 실물 경제로 전이된 경제 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노동조합의 구체적 고민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지도부의 '총고용 보장'이라는 원칙에 비해 현실은 너무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비정규직 우선 해고는 없다'는 원칙과 비교해 개별 사안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다"며 "그러나 이 복잡한 문제에 조직된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총고용 보장'의 정당성 자체도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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