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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60주기 기념식', 그곳에 '몽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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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60주기 기념식', 그곳에 '몽양'은 없었다"

[관점] 2007년 오늘, '여운형'을 되살린다는 것은...

지난 19일은 몽양 여운형이 암살된 지 6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몽양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고,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군사정권 시절, 몽양이 "우익이 아니었다"라는 이유로 외면 당했던 사실에 비춰보면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하지만 언론이 주목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사회,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 통일 국가를 꿈꿨던 몽양의 삶이 아니었다. 주요 언론은 해방 정국에서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은 지도자였던 몽양의 암살범이 남로당계의 좌익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몽양이 암살당하던 날, 승용차를 타고 가려 했던 목적지가 미 군정의 민정 책임자였던 E A 존슨(Johnson)의 집이었다"라는 미군 측의 기록을 근거로 몽양을 친미 세력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양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보도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가 잘 드러난다.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미국과 소련에 대해 '등거리 외교'의 원칙을 굳게 고수했던 몽양이었다. 미국과 소련을 향해 던진 그의 말 "안녕하십니까(How do you do)?, 감사합니다(Thank you), 안녕히 가세요 (Good Bye)"은 몽양의 이런 신념을 잘 보여준다. 몽양은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이 묘사한 것과 달리, 미국에 대해 "(조선에서 일본을 몰아낸 것에 대해) 고맙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 말고 나가달라"는 입장이 분명했다.

몽양은 비록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에는 깊이 공감했다. 또 그는 '그저 투표할 자유'만 보장된 민주주의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정치적 절차 상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된 '경제적 민주주의'가 그가 꿈꾼 정치적 이상이었다.

이처럼 투표소에서만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몽양이, 자신의 60주기 행사가 열린 다음날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행사 다음 날인 지난 20일 오전, 정부는 "월급 80만 원도 좋으니, 그저 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이랜드 노동자들을 물리력을 동원해 몰아냈다.

이런 노동자들의 비명과 눈물은 외면하면서, "암살 직전의 몽양이 미 군정 관계자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는 주장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을 지하에 있는 몽양이 봤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몹시 답답해하리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홍기빈 씨도 이런 답답함에 공감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몽양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 왔던 홍 씨가 글을 보냈다. <편집자>

몽양(夢陽)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자의 흉탄에 세상을 떠났다. 일제 패망 직후부터 좌익과 우익으로부터 10차례가 넘는 테러를 당하면서도 좌우익과 남북을 모두 포괄하는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분투하던 몽양이었으나, 이 땅에 분단과 전쟁을 가져올 우리 안팎의 냉전 세력들의 폭력에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19일은 그의 서거 60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그를 기리는 행사가 분단된 남쪽에서도 성대하게 열렸다. 그 동안 몽양은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남한 사회에서 '사상이 의심스러운 인물'로 몰려 제대로 된 논의조차 기피돼 왔으나 이제는 거물 정치인들과 사회의 '원로'들이 대거 몰려들어 줄지어서 공덕을 기리는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다.

죽기 전 2년이 몽양 인생의 전부인가?…혁명가 몽양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최근의 흐름이 진정한 의미에서 몽양 여운형이라는 20세기 민족사의 거목을 제대로 복권시키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은 몽양 서거 60주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이정식 교수의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떼어 내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몽양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설령 몽양이 박헌영 세력에 의해 피살됐다해도, 그것이 몽양이 사회적 불평등에 무관심한 '우익'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당시 우익 세력이 해방 정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다수에게 테러를 가했던 역사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일보

행사를 주도하고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니 현재 집권하고 있는 범여권 세력의 정치가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행사 전체의 취지가 몽양을 요즘 한국의 정치 담론의 일부에 떠도는 '중도'의 원조쯤으로 채색하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같은 보수 언론은 행사에서 발표된 글의 일부를 확대하여 "몽양은 철저한 친미 세력이었으며 그를 암살한 것은 남로당 세력이었다"라고 대서특필하면서 몽양의 이념적 성격을 오른쪽으로 돌려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1920년대부터 타계할 때까지 일관되게 조선, 나아가 동아시아의 혁명 운동에 헌신하여온 몽양 노선의 진보적 혁명적 성격은 탈각되고 말았다. (몽양은 손문(孫文)의 정치 고문이었으며 장개석, 왕정위,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 쪽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20년대 중국 혁명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진보적 혁명 운동가로서의 그의 장구한 연혁은 사라지고 오로지 그의 생애 마지막 2년 간 진력하였던 활동만이, 그것도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명제로 왜소하게 졸아들게 된 것이다.

몽양이 "중도"의 아이콘?

그리고 그렇게 협소화된 알량한 명제 하나가 빌미가 되어 이제 그는 엉뚱하게도 2007년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태어난 '중도 노선'의 아이콘으로 떠밀리게 된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어떤 정치 세력이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서는 턱하고 내세울 수 있는 '아이콘(icon: 聖像)이 필요한 법이다. 이 아이콘이 있으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념 등을 시시콜콜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위기와 이미지와 역사적 휘광까지 입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 보수 세력에게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다. 북한 지배 세력에게는 김일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남한의 '중도'를 표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없다. 이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연출할 수 있는 이력이나 경륜을 가진 선 굵은 이들을 찾을 수 없고 대개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여러 격동의 틈바구니에서 성장한 이들일 뿐이다.
▲ 한 행사에서 연설을 하는 몽양 여운형. 60여 년 뒤, 그가 '중도의 아이콘'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뭐라고 할까. ⓒ몽양기념사업회

더욱이 이 '중도'라는 것도 "우리 사회의 보수 진보 갈등을 넘어선다"는 선언 이상의 이렇다 할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좌우 합작의 아버지' 몽양 여운형을 자신들의 '중도'의 아이콘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정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몽양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보수 진보를 넘어서는 중도 이념'의 아버지 따위는 더욱 아니다.

그는 조선 근로 대중들의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과 고통을 해소하고자 했던 사회 혁명가였으며 또 동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제국주의 세력과 강대국들의 부당한 강압에 한반도가 희생되지 않도록 일관되게 맞서 싸웠던 반제국주의 투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20세기 전반기에 국제 공산주의의 압력에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의 구체적 현실과 조건에 합당한 진보 이념과 행동을 만들어내고자 골몰하였던 세계 도처의 '독립 좌파'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옳다.

"사회 경제적 문제를 외면한 민주주의는 파시즘이다"

몽양은 마르크스주의가 내걸었던 인민의 완전한 해방과 무계급 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였다. 그가 보았고 살았던 현실은 제국주의의 강점으로 이리저리 찢어발겨진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그리고 그 속에서 근로 대중들을 생활의 한계선으로까지 몰고가도록 가혹하게 벌어지는 착취와 수탈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를 타개하는 방법으로서 혁명적인 변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혁명운동가로 여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혁명은 노동자, 농민을 필두로 한 모든 근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활동을 동력으로 하면서 민주주의적 질서를 지도 원리로 삼는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 방법으로서 또 목표로서 내걸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산주의적 방법에 대한 부정을 빌미삼아서 몽양이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사회 혁명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는 결코 투표나 선거와 같은 '정치적 질서'로 국한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땀흘려 일하는 모든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자본주의에 의한 농촌의 수탈 구조를 분석한 글에서부터 해방 이후 인민당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 등 그가 조직하고 관여했던 모든 정당들의 강령에서 이러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제1의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주요 기간 산업의 국유화나 부당한 축재를 이루는 독점 자본가들에 대한 규제가 명시되고 있다.

이러한 몽양 민주주의의 사회 혁명적 성격은 해방 후의 한 연설에서 그가 말했던 "사회 경제적 문제를 도외시한 민주주의란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라는 언명에 명징하게 표현되어 있다.

'좌우 합작'은 '중도 이념 창출'이 아니었다…강대국 제국주의에 맞선 연대

몽양은 일생에 걸쳐 반(反)제국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혁명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 시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에 대해 그의 반제국주의가 갖고 있었던 특징은 첫째 조선과 일본만이 아니라 좁게는 동아시아 전체 넓게는 세계정세 전체 속에서 조선 독립을 볼 수 있었던 폭넓은 지정학적 시야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둘째는 그의 반제국주의 사상이 협소한 배타적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전 세계 및 아시아 피억압 인민 전체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중국 혁명과 조선 독립이 아시아에서 세계 제국주의 열강 전체를 패퇴시키는 과제로서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1920년대 전체에 걸쳐 중국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멀리 필리핀까지 나아가 '영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모든 동아시아 약소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반제국주의 선동을 감행하기도 한다.

해방 정국에서 몽양이 헌신했던 '좌우합작 운동'은 '극좌와 극우를 넘어서는 중도 이념의 창출'과 같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전 세계가 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지각변동의 시작점에 있음을 직감한 몽양이 자신의 폭넓은 지정학적 시야에서 강대국에 맞서 한반도 사람들의 정치적 자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일종의 반제국주의 투쟁 전술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미국, 소련이여! "Thank you, Good Bye"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가 극심한 변동을 겪고 있던 20세기 중반 몽양이 조선의 자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취했던 전술은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조선에서 아래로부터 독자적인 정치 질서를 건설해나가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패배주의에 물들어 일제에 투항하고 있던 1943년, 몽양은 이미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전국의 수만명의 비밀 조직원을 포괄하는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직후 단 며칠 만에 전국적 규모에서 '건국 준비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자주 국가 건설'이라는 방침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모태로 출범을 선언했던 '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다.

두 번째는 '좌우 합작 남북 합작' 운동을 하던 시기다. 한 때 '건준'과 '인공'의 우산 아래에 모이는 듯 보였던 국내의 여러 정치 세력들이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몽양은 변화된 지정학적 구도에서 새로운 전술이 필요함을 직감하고 '좌우 합작 남북 합작' 운동을 시작하며, 이를 추동할 정치적 조직으로서 '건준'이나 '인공'과 같은 국가 조직 대신 인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지는 정당 조직을 건설한다.

이 '합작 운동'은 결코 좌익이나 우익에 대한 이념 투쟁을 통해 '중도 이념'을 만든다거나 단순히 좌우익의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는 '상층 통일전선'을 만드는 종류의 작업이 아니었다.

좌익과 우익이 각자 표방하고 있는 노선들에 대해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큰 규모에서 민족 구성원 전체의 근본적 사활을 좌우할 "자주적 국가 수립"이라는 가장 절박한 정치적 목표가 있음을 천명하고 (그가 옳았음은 그의 서거 후 벌어진 분단과 전쟁의 참극을 통해 증명되었다), 정당 운동을 통해 이를 지지할 수 있는 대중적인 세력을 아래로부터 조직해내는 적극적인 대중 정치 운동이었다.

이 점에서 몽양은 미국과 소련 어느 한쪽과 유착하여 이후 한반도를 냉전의 최중심지로 내몰았던 세력들과 명확히 구분된다. 미국과 소련에 대해 그는 일관되게 등거리 외교의 원칙을 천명하였지만, 그 핵심은 항상 그의 명구 "안녕하십니까(How do you do)?, 감사합니다(Thank you), 안녕히 가세요 (Good Bye)."에 집약되어 있듯, 한반도 사람들의 삶이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논리에 휘말릴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뽑을 권리 얻었지만, 민주주의는 일과 삶 앞에서 멈췄다

이제 우리는 2007년 한국이라는 조건 속에서 몽양 노선의 함의와 그 이념적 위치에 대해 음미해 볼 수 있다. 먼저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이 될 것이다.

숱한 이들이 지적했듯, 1987년에 시작된 정치적 영역에서의 민주화는 1997년 외환 위기와 그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인 구조 개혁의 와중에서 소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구호에 묻혀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는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많은 이들이 소위 '범민주 세력'이니 '개혁'이니 하는 말들에 권태와 염증을 느끼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일상은 비정규직 고용, 청년 실업, 교육비와 생계비의 앙등, 사채업의 창궐 등으로 그 고통이 점점 심화되고 있으며 거시적으로는 외국 자본의 진출, 산업 구조의 파편화, 중소 제조업의 몰락 등으로 이러한 고통이 아예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릴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구조를 안착화시킬 만한 한미 FTA 와 금융 허브 발전 전략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몽양의 민주주의 노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 시장주의의 독재에 맞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과감한 정치적 활동이 될 것이다.

美·日주도의 동아시아 군사화…한반도 지정학 고민했던 몽양이 봤다면….

지정학적 측면으로 보자면,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을 가능케 할 수 있도록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롭고 진보적인 질서가 안착될 수 있도록 할 새로운 외교 노선의 수립이다.

특히 21세기 들어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는 또다시 크게 변동하고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 개악과 호주와의 군사 안보 조약 체결 등을 통해 미국에서 인도양으로 이르는 해양 세력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군사 대국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삼아 인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협력의 제안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북한도 6자 회담의 극적인 성과를 계기로 동아시아 지역의 재구조화에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변동 속에서 현재 진행 중인 한미 FTA의 의미도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미묘한 지정학적 갈등의 고조 속에서 한국 정부도 군사 예산을 대폭 늘여가는 등, 동아시아의 '군사화'의 우려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몽양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좁게는 한반도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를 좌우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전략을 면밀히 읽어내어 그 논리 속에서 우리의 평화와 자주적 결정권이 희생당하는 사태를 막아내기 위한 총체적인 전략 수립이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중도'를 표방하고 나선 세력이 과연 이러한 작업을 떠맡을 것인가.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몽양을 '한미FTA에 대해 침묵하는 자들의 아이콘'으로 내버려 둘 것인가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간 지속되어온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한미 FTA와 같은 최대의 현안에 대해서조차 가타부타를 밝히고 있지 않다.
▲ 1944년 가을, 한 농촌을 방문한 몽양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몽양은 청년과 농촌을 유독 사랑했다. 이랬던 몽양이 젊은이과 농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한미FTA 체결 추진 소식을 접한다면 뭐라고 말할까. ⓒ몽양기념사업회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주변 강국들과의 선린 외교를 강화하여 동아시아 공영을 꿈꾼다'는 '햇볕 정책'의 명제들은 현재의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사실상 진부한 상식 이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세력이 동아시아의 군사화와 미국을 필두로 한 주변 강대국들의 책략에 맞설 우리의 주체적인 전략 전술의 제출이라는 작업에 고심하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2007년 한국에서 몽양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의 함의가 차지하는 이념적 위치는 대단히 명확해 보인다. 그것은 '중도'도 아니며 심지어 '중도 좌파'도 아니다 (사실상 지금 '극좌파'가 어디 있는가?).

앞에서 말한 신자유주의에 맞서 사회 경제적 영역을 민주화해나가고 강대국의 지정학적 책략에 맞서 독자적 생존과 남북 및 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과제를 오롯이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2007년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진보 세력의 과제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을 포함하여 한국의 진보 진영을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이 몽양 여운형의 정치적 사상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받아안는 노력을 저들 '중도' 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80만 원짜리'이랜드 노동자의 농성장에서 몽양은 살아 있었다.

이것이 몽양 여운형을 진보 세력의 '아이콘'으로 만들자는 말은 아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 굳건히 발딛고 항상 변화 발전해가는 진보 세력이라면 어떤 아이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몽양 서거 60주기 기념 행사가 열린 다음날. 월급 80만 원을 받으면서도 "그저 일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장에서 강제로 끌려나갔다. 몽양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그는 어디에 서 있었을까. ⓒ프레시안

항상 청년들을 사랑했고 스스로 청년처럼 살다 그 어떤 청년보다 장렬하게 산화한 몽양이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21세기 한국 진보 세력이 기억하고 생각해볼 '동지'로서 그를 부른다면 몽양도 지하에서 흔쾌히 응답해 마지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19일은 몽양 서거 60주기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오전에는 이랜드의 횡포로 일자리를 잃게 된 월급 '80만원짜리' 아주머니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경찰력의 강제 진압으로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왁자지껄한 크리스마스 파티는 12월 24일에 벌어지지만 정작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순간으로 기념되는 것은 것은 25일 새벽이다.

7월 19일의 기념 행사가 만약 정말로 몽양을 '중도'의 아이콘으로 채색하는 행사였다면, 그는 거기 없었다.

아주머니들이 결국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나갔던 20일 새벽이 몽양이 있었던 때요. 아주머니들의 눈물과 절규가 있었던 농성장이 그가 있었던 곳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정이 벅차 말을 못 잇던 몽양은 그때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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