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회계부정 및 횡령 의혹이 불거져 논란을 빚었던 전국언론노동조합이 31일 서울 목동 SBS 사옥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지난 4주간 진행된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4월 27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를 착수했던 언론노조 중앙집행위원회는 이날 △투쟁기금 등 각종 기금의 실제 집행 여부 △정치기금 모금과 집행 및 법률 저촉 문제 △규약규정 위반사례 등 의혹이 제기됐던 내역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20쪽에 걸친 조사 보고서에는 2001년부터 4억8000만원 규모의 횡령이 있었다는 의혹에 관한 자체조사 결과와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의 자문 내용이 첨부돼 있었다.
이날 회의는 시작부터 회의 의사진행 및 보고서 내용에 대한 KBS 노동조합 소속 중앙위원들의 집중적인 문제제기가 이어져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지는 양상이었다. 7시간 가량 이어진 회의는 결국 KBS 노조 측의 퇴장으로 의사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향후 대책에 대한 논의없이 마무리됐다.
"3억여원 외에는 상당부분 의혹 해소됐다"
이번 의혹은 지난 3월 출범한 언론노조 현 집행부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가운데 불거졌다. 지난 4월 20일 열린 중집회의에서 처음 보고됐으며 내부 조사를 우선하자는 다수 의견과 달리 이준안 위원장은 직권으로 같은 달 23일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같은 달 27일 검찰의 조사와 별도로 자체 대책 마련을 위해 중집위원 8명이 참여한 진상조사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진상조사소위는 보고서에서 우선 3억3000만 원으로 가장 큰 규모의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김미영 전 총무부장에 대해 검찰의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정확한 액수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당초의 혐의와 비슷한 규모의 횡령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SBS노조의 최상재 위원장은 구두로 "2004년 4월부터 지난2월까지 240여 회에 걸쳐 3억여 원의 횡령 사실을 확인했다"며 "횡령금액이 당초 알려졌던 것보다 줄어든 것은 2000만 원 등은 사무처 직원들에게 대출됐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별도의 횡령 의혹을 받았던 나머지 1억5000만 원도 상당부분 당초 전임 집행부가 해명했던 지출 내역과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진상조사소위가 밝혔다.
1200여만 원을 대출받아 생활비로 쓴 뒤 되갚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신학림 전 위원장 임금 보전금에 대해서는 "퇴직금 가압류 해제 시점에 즉시 보전금을 상환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며 "그러나 당시 한국일보의 체불 행태, 신 전 위원장이 체불 상여금을 수령한 후 곧바로 상환한 점, 그의 진술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횡령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2004년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치기금 조성 및 전달이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의혹에 대해 조사소위는 "2004년 당시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기 전후로 모금 결의와 지원이 이루어져 불법성 여부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 동안 증빙서류가 없어 확인되지 않았던 후원금 중 대부분은 이번 조사과정에서 전달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한 '비자금 통장'이라고 알려졌던 별도 통장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 연구조사를 실시했던 사무처 직원들이 상조 등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은 기부의 성격이 강하다"며 "그러나 이를 애초 조합의 수익으로 간주하고 유용했다고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앞으로 이 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특별기금, 신분 안정기금, 외부 연구사업 등 문제가 됐던 회계처리 부분들에 대한 자체 규정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KBS 노조의 잇따른 문제제기와 집단 퇴장
이날 회의에서는 KBS 노조 소속 중앙위원들이 잇따라 문제제기를 하는 바람에 다른 중앙위원들과 충돌을 빚었다. KBS 노조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진상조사소위 인적 구성 및 보고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반면 다른 이들은 조사 결과가 믿을만하며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토대로 한 향후 대책 마련이라고 주장해 의견이 엇갈렸다.
그 이후 보고서 사안들이 참석자들의 거수로 속속 승인되는 가운데 참석자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KBS 노조측은 박승규 위원장을 비롯해 집단 퇴장했다. 이로 인해 160명의 중앙위원 중 참석자가 과반수를 넘지 못하게 된 오후 9시 무렵 회의는 의결 정족수 미달로 일부 안건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7시간만에 끝났다.
한 중앙위원은 KBS 노조 측의 지적들에 대해 "회계 관리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며 "그러나 이번 사건을 부풀려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언론노조 개혁을 위한 진정성이라기보다는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위원은 "진상조사 결과대로라면 애초 보고됐던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며 "제대로 확인도 되지 않은 시점에 <조선>, <동아> 등 일부 매체에 횡령 의혹이 보도돼 언론노조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된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 악용되는 것 저지하겠다"
비대위는 앞으로도 검찰의 조사와 별개로 내부 대책마련을 위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며 이른 시일 내에 중앙위원회를 다시 열겠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고 "진상조사 결과와 회계감사의 특별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관련 책임자들에 대해 응분의 가혹한 징계를 할 것"이라며 "동시에 회계 시스템 재건, 미비한 산별노조 규약 규정의 완비, 규약 규정에 따른 조합비 징수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정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언론노조의 이번 사태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 모든 진보세력에게 거듭 죄송하다"며 "이번 사태가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악용될 경우 우리는 이를 저지하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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