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기억하긴 싫지만 기록해야 할 '시대의 진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기억하긴 싫지만 기록해야 할 '시대의 진실'

<기고> '여명의 황새울', 그 길었던 1년전 하루

지난 4일 경기도 평택역 앞에서는 200여명 남짓 모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반대하며 마을을 지켰던 주민들과 '지킴이'들이었다. 이날은 지난해 5월 4일, 대추리에 1만5000여명의 경찰과 용역이 투입돼 반대하는 이들을 연행해가며 대추분교를 파괴했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펼쳐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 4월 초, 정부와의 합의대로 주민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이후 대추리와 도두리는 폐쇄된 채 빠른 속도로 미군기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를 비롯해 이날 모인 많은 이들은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미군기지 확장이전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미군기지 확장의 부당성은 '여명의 황새울'만큼이나 명백하다"고 말한다. 당시 피투성이가 된 채 연행되는 이들의 모습은 인터넷 속보로 전파됐으며 이를 본 많은 이들은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대립을 '쓸데없는 갈등'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이날의 광경 앞에서는 대부분 입을 다물었다. 수십명의 부상자와 100여명의 연행자가 발생한 이날은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이후 최대 규모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날 대추분교에 있던 '목격자'이자 '당사자' 중 하나였던 다산인권센터 박진 상임활동가가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5월 4일의 기억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다"며 "그날 국가가 저질렀던 건 일반 시민들과 국민들을 적으로 간주한 전쟁이자 고도의 심리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더라도 기록해야 할 것이 있다"며 "그건 전쟁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그토록 긴 하루가 내 인생에 또 있을까, 서러움과 무력감에 휩싸인 분노가 갈피를 잡지 못했던 하루. 새까맣게 몰려오던 전경들의 군화발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던 심장. '평화란 참으로 뜨거운 대가를 필요로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그날. 그로부터 일 년이 흘렀다.

사이렌이 울린 것은 새벽 4시였다
▲ 2006년 5월 4일, 대추분교 철거를 위해 투입됐던 1만5000여명의 경찰 병력. 이날 경찰은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이름으로 새벽녘부터 작전에 돌입했다. ⓒ프레시안

벌써 몇 번째인지, '오늘이다 내일이다' 작은 마을 대추리 도두리를 향한 군사작전을 펼친다는 소문은 3월부터 5월 그날까지 많은 이들의 일상을 뭉개 버렸다. '대추리 군부대 투입 임박! 대추리로 달려와 주십시오!', '평택 대추리 행정대집행! 군부대 투입 임박!'이라고 수시로 뜨던 문자 메시지는 그야말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온 신경을 평택에 쏟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정문에 쇠사슬을 두르고, 굴삭기 바닥에 기어들어가고, 레미콘 차량에 올라타면서 지켰던 평화였다. 수천 명의 경찰들, 수백 명의 용역들, 그들과 실랑이를 하면서 이번에도 이길 수 있을까, 지킬 수 있을까 마음 졸였던 날들이었다. 5월 3일 밤늦은 시간, 전국 각지에서 속속히 사람들이 모였다. 내일의 전투를 준비하는 결의대회 시간들… 피부의 솜털까지 모두 서는 듯 긴장감이 온 몸을 송곳처럼 찔렀다.

대추 초등학교 주위에 초조하게 서 있던 사람들, 실시간 중계를 위해 달려온 공중파 방송차의 커다랗고 둥그런 안테나, 눈을 붙이기 위해 찾은 빈집의 차가운 냉기, 새벽을 맞기 전 들판을 울리던 영농단의 작업소리, 주인이 버리고 떠난 강아지의 울음소리, 잠들지 못하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소곤거림…새벽 4시경 사이렌이 울리기 전까지의 장면과 소리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겪어보지 못한 전쟁전야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번에는 이길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과 죽도록 지키고 싶었던 절박한 심정까지 함께 기억나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다.

대추초등학교, 보미싼원, 홍농계, 황새울

보미싼원
홍농계
황새울
너희들에게는 휴지 조각 같은 이름인 줄 모르겠지만
그 이름에서 폭격기가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꿈에서라도 치가 떨린다

보미싼원이 날아가
아시아 어느 국가를 때리고
홍농계가 날아가
아랍 국가 어디를 때리고
황새울이 날아가 동족의 심장을 때린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고작
우리 마음에서
폭격기를 띄우려고
맨손으로 들판을 만들었던가.

대추 초등학교 담에는 서수찬 시인이 쓴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5-김지태 이장'을 비롯한 많은 시들이 적혀있었고, 창틀에는 조선례 할머니, 방승률 할아버지, 병철이, 연수의 얼굴도 그려져 있었다. 매일 촛불행사를 치렀던 비닐하우스 행사장, 낡았지만 여전히 튼튼하게 아이들 놀이터가 됐던 그네며 미끄럼틀, 수십 년 세월을 버틴 커다란 은행나무. 그곳에는 주민들뿐 아니라 대추리 도두리 병에 걸려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추억까지 보태져 있었다.
▲ ⓒ프레시안

그날 국가가 부순 것은 그 모든 것이었다.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수백 일동안 촛불로 밝힌 반전평화의 상징. 주민들이 봄에 바다를 막아 만든 논 보미싼원, 갯벌에 둑을 막는 고단한 작업을 함께 하기 위해 주민들이 만든 계의 이름을 딴 논 홍농계, 저녁노을이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황새울 노을. 평화를 지키고 싶었던 이들의 간절한 소망.

국가는 그런 마음과 상징을 부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경찰이 그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찾아오던 이들을 검문하지 않고 들여보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다. 단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우리들이 지키려는 희망의 싹까지 싹둑 자르기 위해서는 국가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도록 벌인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일반 시민들과 국민들을 적으로 간주한, 국가가 선포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전은 성공했다. '여명의 황새울'은 예상보다 더 치명적이었고 예리했으며 무자비했다. 대추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전쟁에서 분명하게 졌다. 그리고 노무현과 그의 정부는 그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수 천, 수 만의 사람들 마음에서 죽었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었다.

어린이날이었지만 집으로 갈 수 없었다

5월 4일의 기억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다. 그들의 날선 방패, 무기력하게 무너지던 초등학교, 울부짖는 할머니를 말리지도 못하고 주저앉아있었던 망연한 시간들, 초등학교에 남아있겠다는 동료를 두고 돌아서야했던, 눈앞에서 잡혀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도망 가야했던 비참함.

잡혀갈 사람 다 잡혀가고 평화동산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날 저녁 촛불행사에서 신종원 씨(현 대추리 이장)가 울고 있었다. 조명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서로 얼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곳의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다치거나 잡혀가지 않았음을 안도할 힘조차 없었다. 내일 아침, 우리가 확인해야할 잔인한 현실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어린이날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를 마주하고, 엄마는 졌단다, 평화는 졌단다, 이제 대추 초등학교는 없단다, 황새울에는 군인이 있단다'…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가 품고 있을 평온한 일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2006년 5월 4일, 국방부는 황새울 폐쇄를 위해 헬리콥터를 동원해 철조망을 수송했다. ⓒ프레시안

잠조차 초라했던 다음날, 빈집에서 헬리콥터의 비행소리에 잠을 깼다. 논의 곳곳에 들어선 철조망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 돼버린 황새울의 아침은 예상하지 않았던 만큼 생경했다.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누군가의 오토바이 뒷 자석에 올라 돌아본, 그 망가진 논밭 길 어디쯤에서 김지태 이장을 만났다. 그는 담배를 물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망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저 쳐다보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때도 알지 못했다.

그날 다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올라왔다. 어린이날임에도 불구하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황새울을 향해서 왔다. 마침 영농단 옥상에 있었던 나는 철조망을 끊고 마을을 향해 오는 사람들과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승리였지만 감동스러웠다. 대추리 도두리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승리 이후에 철조망은 더욱 두터워졌고, 불심검문이 시작됐다. 작은 마을 대추리를 향한 발걸음은 무력감, 패배감으로 인해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 우리는 마을을 잃었다. 1년이 지난 대추리에는 지금, 마을 회관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들렀던 날, 지킴이 집 앞 밭에서 마늘과 흙을 떠왔다.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제2의 대추리를 위해

안타깝게도 이주보상합의를 먼저 하게 된 도두리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추억조차 나눌 수 없게 됐지만 대추리를 떠난 주민들은 대추리 인근의 송화리 빌라에 함께 살고 있다. 가족이 많은 가구는 30평, 주로 단독 세대인 할머니들은 20평의 좁은 집에서 산다. 논에 모를 내야할 때, 밭에 고추를 심어야할 때인데, 그들은 조그만 화단에 가지를 심고, 파를 묻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정부가 보상이라고 던져준 공공근로를 나가, 한 달 50만원도 받고 60만원도 받으면서 거리 청소를 하고 있다. 농번기는 농번기대로 농한기는 또 그대로 일하다가 놀다가 논밭에서 삶을 보냈던 이들이 평택 도시의 거리에서 남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송화리를 찾았던 어느날, 김지태 이장님의 아버님인 김석경 할아버지는 대추리 마을에서 보다 더 많이 반겨주시며 함께 간 딸아이에게 돈 만원을 쥐어주셨다. '반갑다'고,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하는 그이들의 손을 잡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추리 때문에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여전히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과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김석경 할아버지, 이호순 할머니가 살아왔던 세월 때문에 평화를 몸으로 배웠기 때문인가 보다. 보미싼원이, 홍농계가 내가 잠시 머물던 그 집의 터가 전쟁기지가 되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북한 아이들의 심장을 겨누는 것을 몸으로 막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그들 때문인 듯하다.

내게 1년 전의 기억은 분명, 죽는 순간까지 잊혀지지 않는 분노이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더라도 기록할 것이다. 제국의 병참기지가 된 한반도 곳곳과 세계 전 지역에서 전쟁으로 인해 살해되는 무수한 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대추리, 제2의 대추리를 건설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 길었던 하루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것이다. 전쟁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 아직 진지는 무너지지 않았고,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