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도가 낮은 미국에 비해 문화분야 규제가 높았던 한국 측의 개방폭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 정도면 잘 막아낸 거다."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이다. 이윤만 놓고 보더라도 일방적으로 '퍼주기'밖에 없었다."
지난 4월 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방송, 저작권, 관광, 디지털시청각서비스 등 광범위한 문화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개방이 이뤄졌다.
이를 두고 협상에 참여했던 정부 관계자들은 "미국의 요구를 잘 막아낸 성공적인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애초 개방은 없을 거라던 문화 분야가 다 개방된 것 자체가 실패"라는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2일 문화연대, 언론연대, 정보공유연대IPleft 등 시민단체와 민주노동당 천영세, 열린우리당 김재윤 의원이 함께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한 '왜 협상 무효를 말하는가' 토론회에는 각 분야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과 정부관계자들이 참석해 한미 FTA 문화분야 협상 결과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
"케이블TV 시청자들, 10배 가까운 시청료 내야 할 것"
"이건 온통 미국의 요구만 있었던 협상이었다. 시청각미디어분야의 협상 책임기관인 방송위원회는 '미국의 요구를 막아냈다. 방어했다'고 하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굴욕적인 무역협정이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양문석 정책실장은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 외국인 간접투자 전면 개방은 국내 PP 초토화의 서곡이 될 것"이라며 "이는 시청자들에게도 직접적인 부담으로 넘어간다"고 밝혔다.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PP에 대한 외국인 간접투자가 100% 허용된다. 이로 인해 국내에 법인을 설립한 외국 법인은 PP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다.
"얼마 전 CJ 미디어의 tvN이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에 시장의 상식을 뛰어넘는 고액의 콘텐츠료를 요구했다. 스카이라이프는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지난 4월 30일부로 tvN을 빼버리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는 곧 미국 PP들이 한국의 유선방송사업자(SO)들에게 가하는 횡포가 될 것이다.
결국 SO는 고액의 콘텐츠료를 미국과 외국 PP에게 제공하고 그 부담을 시청자들에게 전가하게 될 것이다. 지금 케이블TV 평균 시청료가 6000원 가량인데 순식간에 1만 원에서 1만5000원까지 치솟는 건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시청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보다 많게는 10배 가까운 시청료를 내며 텔레비전을 보는 상황이 닥쳐올 것이다."
방송위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이에 대해 협상에 참여했던 곽진희 방송위원회 국제교류부장은 "간접개방의 영향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을 수 있다"며 "그간 PP 시장에 들어올 수 없었던 국내 우량 기업들도 한미 FTA를 계기로 시장에 들어오게 된다면 새로운 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수신료 인상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유료채널이 늘어날 경우 SO나 위성방송은 다양한 유료 패키지를 구성하게 될 텐데 시청자들은 선택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양 실장은 "국산 쿼터 5% 축소는 그간 유료방송시장에 콘텐츠를 팔던 한국 영화와 애니메이션 시장에는 5%가 아닌 20%에 가까운 수익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또 1개 국가 쿼터 완화도 애초 이 제도의 취지였던 '프로그램 및 국가의 다양성'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곽진희 부장은 "우리나라 쿼터 규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도가 높고 다양한 수준"이라며 "전세계에서 가장 문화다양성을 강조하는 유럽의 경우에도 '유럽 지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 60%'라는 딱 한가지 규제만 있다"고 밝혔다.
"선진제도 도입? 제도의 기본도, 미국의 전략도 모르는 말"
이날 토론회의 또다른 주요 쟁점은 저작권 분야였다. 협상 결과 △저작권 보호기간은 저자 사후, 또는 저작물 발행 후 70년으로 연장 △네트워크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 등 일시적 저장에 대한 복제권 인정 △온라인서비스 제공자 면책 규정 강화 및 집행 규정 강화 등으로 저작권이 대폭 강화됐다.
정보공유연대IPleft 남희섭 대표는 "1차 협상이 끝난 후 정부가 스스로 마련했던 협상 전략에서는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 불수용 △일시적 저장 복제권 인정 불수용 등 대부분 '불수용 입장'을 취했었다"며 "이를 대부분 수용한 타결 결과는 '협상'이 아닌 '일방적 양보'로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이번 협상 결과를 '선진 제도 도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한미 FTA에서 지재권 보호 강화를 주장한 것은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취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뿐"이라며 "오죽하면 영국특허청 지적재산권위원회에서 '개도국들은 국제협정에서 양보한 것 이상을 쌍무협상을 통해 강요하는 선진국의 지재권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된다'고 권고했겠나"라고 물었다.
그는 "지재권 제도의 기본은 '권리'와 '이용' 사이의 균형"이라며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 협상 결과를 포장하려는 점은 이해되더라도 제도의 기본과 미국의 전략은 알고 해야 했던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 김정배 저작권팀장은 "저작권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는 더 거셌다"며 "마지막까지 미국이 계속해서 압박했는데 버티기를 잘해서 뺀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또 그는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은 세계적 추세"라며 "온라인서비스 부문도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나라의 저작권자들도 많은 침해를 당하고 있는데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해명했다.
"정책 목표대로 진행되지 않은 건 '실패'다"
한편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이원재 공동상황실장은 협상 결과 평가에 앞서 한미 FTA 협상 결과를 호도하는 정부의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정부는 지금 자신들이 실패한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바로 그것이 가장 큰 실책이다. 1년 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은 미국 협상단의 시나리오를 공개하면서 문화분야 개방은 이미 '세팅된 테이블'이라고 했다. 정부는 부인했다.
이제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미국 언론들은 '최대 수혜자는 헐리우드'라고 말한다. 문화 분야는 최고의 '퍼주기 협상'이었다. 작년 1월 방송위는 '방송 개방은 언급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방된 것을 두고 왜 잘 했다고 얘기하나.
정책 목표대로 진행되지 않았는데도 잘했다는 건 억지다. 실패를 인정하고 어떻게 수습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이원재 실장은 특히 문화부 및 방송위 관료들의 자세가 한마디로 "무책임하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최소한 문화부라면 문화적 감수성은 없고 경제실적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와는 달라야 하지 않나. 정부 관료에게는 국익적 역할이 있겠지만 자기 분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우선 아닌가. 왜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나.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외교부는 문화다양성 협약 인준을 철저히 막았다. 이건 문화부가 선언했던 장기비전과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거다. 문화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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