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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 정책', 그리고 '대학 훌리건'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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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 정책', 그리고 '대학 훌리건'의 사회

[기자의 눈]'3불 정책' 논란이 놓치고 있는 것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도쿄대(東京大) 법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버블 경제의 후유증으로 일본 금융기관이 대거 쓰러진 1990년대 중반, 한 신문에서 읽은 칼럼의 일부다. 다니던 직장이 부도를 맞자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선 금융인이 외국계 증권사에 면접을 봤다. 첫 질문은 구체적인 직무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도쿄대 법대 출신'이라는 말로 시작됐다. 어떤 종류의 금융 상품을 잘 다루는지, 이전 직장에서 어떤 실적을 거뒀는지가 아니었다. 당시 칼럼은 실무능력보다 학벌을 더 따지는 일본 사회의 풍토를 꼬집는 내용이었다.

'3불정책' 논란…요란한 목소리, 익숙한 주장

10여 년 전에 읽은 칼럼을 다시 떠올린 것은 갑작스레 확산된 '3불 정책' 논란을 접하고서였다. 시끄러운 공방 속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놓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본고사, 고교 등급제, 기여입학제를 금지한 '3불 정책' 은 대학의 학생 선발, 즉 대학입시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대학입시 문제가 이토록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보다 더 중요한 교육 문제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최근 3일간의 논란을 정리해 보자. 지난 21일 서울대가 "'3불 정책' 폐지를 주장하더니, 다음날 유명 사립대 총장들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의 반박이 뒤따르면서 논란이 커졌다.

그러자 '3불 정책'이 금지하고 있는 '본고사 부활' 등을 놓고 정부와 종종 마찰을 빚어왔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잠재적인 대권 후보로 꼽히는 정 전 총장이 이번 기회에 정치 행보를 본격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23일, 〈조선일보〉등 보수 성향 매체가 '3불 정책' 폐지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한나라당도 이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3불정책이란 사교육비 절감이라는 목표로 출발했지만 전혀 그 목표에 다가가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의 불신, 입시의 불편, 대학의 불만을 초래한 '3불'".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의 말이다. 하루 전 사립대 총장들이 "'3불 정책'이 대학의 자율성을 해쳐, 교육 경쟁력 향상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학생을 잘못 뽑아서 대학 교육이 황폐화 됐나?"

사실 목소리만 요란하지 내용은 익숙한 주장이다.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마찬가지다. 사립대학 총장들이 '3불 정책' 폐지를 주장한 직후, 전국교직원노조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망설일 틈 없이 대답이 쏟아졌다. 이미 익숙한 쟁점이라는 뜻이다.

대답의 요점은 '교육 양극화 심화', '사회적 형평 훼손', '대학 교육 실패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말로 요약된다.

'3불 정책'이 폐지돼 본고사가 부활할 경우, 사교육비 부담이 늘어 교육 양극화가 심화되고, 출신 고교에 따라 다른 가중치를 부여하는 고교 등급제는 '사회적 형평'을 깨뜨린다는 것. 그리고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하면서 대학 교육이 황폐화되고 있는 지금, 난데없이 '3불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대학 교육의 황폐화가 대학의 잘못이 아니라 '학생을 잘 뽑지 못 했기 때문'인 것처럼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3불 정책'의 폐지를 주장하는 측이건, 옹호하는 측이건 주장의 내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터넷으로 과거 신문 기사들만 검색해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일보〉가 사설과 칼럼을 통해 '3불 정책'을 비판한 것만 해도 이미 여러 건이다. 내용도 한결같다. 물론 다른 보수 매체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때마다 '3불 정책' 옹호를 외치는 측에서는 같은 논거를 대며 반박해 왔다.

"너는 몇 등이냐"를 묻는 젊은이들

익숙한 주장이 치열하게 오가는 풍경. 어쩌면 촌극 같기도 한 이런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문득 논술학원 강사로 일하는 지인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그는 "논술학원 모범 답안 같은 이야기들이지"라며 말문을 열었다. 최근의 논란이 중·고등학생 논술 주제 수준의 '뻔한 논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논술학원에서 '3불정책' 논란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대학 훌리건'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온라인 공간에서 '대학의 서열'을 놓고 논쟁하는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그렇게 할 일 없는 애들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많단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각종 시험 준비에 목을 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대한민국은 거대한 '수험 공화국'이 됐고, 이 과정에서 점수로 사람을 서열화하는 게 내면화된 이들이 늘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각종 포탈 사이트의 댓글을 한참 살폈다. 실제로 온갖 종류의 서열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입학 성적에 따른 대학 서열 논쟁, 합격하기 어려운 시험 순위 논쟁, 돈 잘 버는 직업 순위 논쟁….

이런 논쟁에 매달린 이들은 사람을 대할 때 "서열 몇 위의 대학 출신, 몇 등짜리 직장과 직업"인지를 먼저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대학 입시에 목을 매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한숨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졌다.

"경쟁 대학 앞서면, 행복하니?"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런 경쟁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일부 대학은 이런 경쟁의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등록금을 올릴 때마다 '학교의 발전, 경쟁 대학 추월' 등을 내세운다. 그러면 많은 학생들이 반발을 머뭇거린다. 아직 반대 여론이 우세한 '기여 입학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쟁 대학을 추월해야 한다는 주장을 꺼내는 순간, 적어도 학교 내에서의 반발은 상당히 수그러든다.

기여 입학제, 본고사, 고교 등급제를 금지한 '3불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놓치고 있는 지점도 이것이다. '3불정책' 폐지를 주장하는 대학들은 학생들의 서열 경쟁을 이용해 더 많은 등록금을 거두고, 심지어 '기여 입학제'까지 도입하려 한다. 또 본고사를 통해 얼마나 까다로운 문제를 내는지를 놓고 경쟁하려 한다. 그리고 고교 등급제를 통해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목고 출신 학생의 비율을 높이려 한다.

그런데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 특목고 출신이 늘면, 더 까다로운 문제를 풀고 대학에 입학하면, 기여 입학제가 허용돼 대학 건물이 더 웅장해지면 학생들은 자랑스러울까. 또 이런 자랑스러움을 가슴에 묻고,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 출신을 내려다보면 행복할까. 그리고 몇 점짜리 대학 출신인지를 끊임없이 신경쓰게 만드는 사회가 과연 정상일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도쿄대 법대 출신 실직자의 촌극을 떠올리고 '남의 나라 이야기'라며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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